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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연숙의 ‘내겐 너무 그리운 것들’

슬기로운 은퇴생활

글 | 이연숙 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6-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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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센터에서 운영하는 영어강좌 시간이었다. 그 날의 주제는 직업에 관한 것이었다. 평일 낮 시간인 만큼 수업 참가자는 대부분 주부였는데 유일한 남자 수강생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강사가 질문을 했고 영어가 서툰 그는 한국인 보조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내용인 즉, 인테리어 사업을 하다가 5년 전에 은퇴를 했고 이후로는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여행은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물으니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미주, 유럽, 아프리카까지 섭렵했다고 했다. 주로 누구와 가느냐는 질문에는 대부분 혼자이고 가끔 한 번씩은 친구와 둘이 간다고 했다. '부자인가 보다'고 강사가 말하자 사람들이 웃었다.
 
젊을 때는 체력은 좋은데 돈과 시간이 없어 못했고 지금은 시간은 많은데 돈도 없지만 체력이 딸려서 못하겠다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시간도 많고 체력도 아직 충분하고 여행할 만큼의 돈도 마련해 놓았다고 말했다. 교실 안이 술렁이면서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환성을 질렀다. 그 중 누군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의 로망인 성공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계시네요.”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성공한 은퇴생활을 주제로 단편을 썼다. 합평을 하는 자리에서 소설 자체보다 ‘성공한 은퇴’에 대해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제각각 다른 의견들을 내어놓았는데 결국 화살은 내게로 향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성공한 은퇴생활이라는 것이 경제적인 부담 없이 여행을 다니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기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남편의 연수관계로 가족들 모두 1년 간 미국 생활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근래 7~8년 사이에 외국 여행을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과정이 늘 비슷했다. 떠나기로 결정을 하기까지 설렜다가 막상 떠나기 전날에는 긴장과 불안으로 어딘가 탈이 났고 힘든 여정 안에서는 ‘내가 다시는 여행하나봐라’ 이를 갈았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떠나고 싶었다. 가끔은 내가 정말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렸다.
 
퇴직을 3년여쯤 남겨 두었을 때 남편에게 물었다. 퇴직하면 뭘 할 거냐고.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30년 동안 당신이 아침밥을 해 줬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 밥해주면서 살 거야.”

작년, 퇴직을 한 이후 남편은 실제로 아침마다 나를 위해(?) 식탁을 차린다. 딸아이가 결혼을 한 이후에 둘만 남았을 때에는 내가 가사 분담을 제안했다.
아침 식사는 남편이 저녁은 내가, 청소와 빨래는 내가 설거지는 남편이. 남편은 순순히 응했고 우리는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계획에 없던 강아지를 입양한 이후에는 산책과 밥은 남편이, 배변처리는 내가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는데 별 불만이 없었다.
 
소설 합평에서 있던 얘기를 남편에게 해 주었다. 내게 꼭 외국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이 성공한 은퇴자냐고 묻길래 대답을 못했다고 했다. 내가 말을 할 때면 자주 딴청을 피우거나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남편이 어쩐 일인지 진지하게 차근차근 말했다.

“여행을 하든 돈을 벌든 확실한 취미생활을 하든 그런 건 일부분인거지. 나는 그냥 지금처럼 아프지 않고 누구에게 부담주지 않으면서 사는 게 성공한 은퇴생활이라고 생각해.”
‘어라? 이 남자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놀라움과 감동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제법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 대화 중 지인의 얘기처럼 은퇴는 그것이 끝이 아닌 것이다. 또 다른 시작이자 어쩌면 지금까지보다 더 중요한 시간들에 놓여있으므로 애초에 성공 여부를 따질 일이 아니었던 거다.
성공적인지를 되짚어보기보다 이제부터 슬기로운 은퇴 생활을 계획해야할 것 같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연숙 작가

63년생 토끼띠 평범한 주부이자 작가. 2009년 문예지 <좋은수필>로 등단하고 2014년 친정엄마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성장기를 엮은 에세이 <엄마 덕분입니다>를 출간했다. 에세이 작가에 이어 소설가에 도전하고 있다.

등록일 : 2019-06-10 10:05   |  수정일 : 2019-06-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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