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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노동자 이경석의 ‘밥보다 소설’

장인어른, 마법 좀 부려주세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목소리 섬』

글 | 이경석 소설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5-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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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김세미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환상[명사] :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환상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꽤 부정적이다. ‘헛된’까지 붙었으니 말 다했다. 국어사전은 이처럼 환상을 아무 보람이나 실속이 없는 것, 허황돼 믿을 수가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환상’이 ‘소설’에 붙는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그리고 근사한 환상 소설들은 기기묘묘, 신비로운 이야기 속에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우리네 삶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그려낸다.
 
머지않은 과거(혹은 미래라고 해도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케올라는 남태평양의 섬 몰로카이에서 아내 레후아, 장인 칼라마케와 함께 살고 있다. 몰로카이는 원주민 사이에서 마법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 전설에 부응이라도 하듯 현자賢者로 불리는 장인 칼라마케는 별자리를 읽고, 죽은 자들의 시체로 점을 치며,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찾아와 모든 대소사를 의논하는 것이 당연한 그런 재주 많고 현명한 인물이었다. 신비한 소문도 따라붙었다. 그가 옛 영웅의 재능이나 기술을 가졌다거나, 한밤중에 절벽 사이를 걸어서 다닌다는 식이다. 마치, 마법사처럼.
 
신비한 힘을 가진 이는 종종 경원시된다. 누구나 그를 좋아하고 떠받드는 것 같아도 내심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 크립톤 행성에서 온 칼엘이 영웅 슈퍼맨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한순간에 지구를 결딴 낼 수 있는 위험한 외계인으로 치부되는 것과 비슷하다. 칼라마케의 경우를 말하자면, 단순히 그럴 거라는 상상이 아닌 좀 더 구체적인 증거에 의해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그의 적들,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거나 뜻을 거스른 이들은 죄다 파국을 맞았으니.
 
“그의 적들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그의 주문 때문에 병에 걸려 수가 점차 줄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명과 육체가 모두 쫓겨나서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뼈조차 보이지 않았다.” 20p
 
케올라 또한 장인을 둘러싼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 의심이 갈 뿐 대부분 무시한 채 살아갔다. 다만 그의 마음 한 구석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장인의 재력이다. 칼라마케는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전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값은 반짝거리는 새 돈(소설 속 통화는 은화다.)으로 치러 하와이 제도에는 ‘칼라마케의 돈처럼 반짝거린다’는 비유가 흔히 쓰일 정도였다.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지도, 세를 놓지도 않는 그는 어디에서 그 많은 은화를 가져오는 걸까.
 
인간은 비밀에 약하다. 숨겨둔 것은 숨겨둔 이유가 있을 테고, 그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일지라도 인간은 굳이 그걸 파헤치고 비밀을 공유하는 일에 동참하려 애쓴다. 굉장히 낙천적인 인물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무슨 돈인지 알게 뭐람, 장인이 부자면 좋은 거지.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평범한 인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마법사의 신비한 의식에 동참하고, 장인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장인이 반짝이는 은화를 언제든, 마음껏 가질 수 있는 사람인 걸 알게 된 케올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장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 그로인해 갖게 된 두려움 따위는 물욕 앞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두고 보라지. 나는 어린애가 아냐. 나도 칼라마케만큼 재간 있고, 그의 비밀도 알거든.” 29p
 
욕심과 용기를 구분치 못하게 된 케올라는 결국 장인에게 당당히 돈을 요구하고 장인은 웃으며 케올라를 이끌고 바다로 향한다. 지난 번 보다 돈을 얻기에 더 좋은 방법을 알려준다는 달콤한 유혹과 함께. 기대감에 부풀어 배에 오른 케올라는 어떻게 됐을까? 비밀을 알게 된 이가 그걸 빌미로 제몫을 요구하는 빤한 전개의 다음 장은 역시나 빤하기 마련. 바다에서 거인으로 변신한 칼라마케는 깊은 바다에 우뚝 선 채 케올라가 탄 배를 비스킷처럼 부서뜨린다.
 
가라앉다 물마루를 타고 떠오르길 반복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케올라. 운 좋게도 교역선을 만나 목숨을 건지지만 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살아갈 방법이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멀리 외딴섬에 도착한 케올라는 이곳에서 마법사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낼 요량이지만 그건 잘될까. 섬에서 만난 친절한 부족민들과 형체 없이 목소리만 들려오는 이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목소리 섬』은 바다출판사가 펴낸 보르헤스세계문학컬렉션 중 한 권이다. ‘바벨의 도서관’이란 이름이 붙은 이 컬렉션은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가 ‘환상’을 키워드로 인상적인 단편 소설을 선별해 엮었다. 책마다 보르헤스가 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서문 형식으로 실려 있는 것도 이 컬렉션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책에는 표제작인 「목소리 섬」과 함께 못지않게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인 「병 속의 악마」, 그리고  「마크하임」과  「목이 돌아간 재닛」까지 4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 유명한 『보물섬』과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를 통해 환상 소설, 모험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은 이 컬렉션을 통해 또 한 번 환상과 인간이 욕망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세상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래서 케올라와 칼라마케의 이야기는 어떻게 됐느냐고?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한 독자는 당장 서점으로 가 이 책을 집어들 일이다. 단돈 8,000원에 얻을 수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그 근사한 재미를 빼앗을 순 없는 노릇이니.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경석 소설가

밥보다 소설이 더 좋다는 초짜 소설가다. 실제로 점심시간마다 밥 안 먹고 소설이나 읽고 있다. 2016년 겨울, 한국작가회의 주관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에 단편소설 「삐걱삐걱」이 당선돼 등단했다. 부업으로 조선뉴스프레스 여성미디어본부에서 기자로 일한다. 장래희망은 전업 작가다.

등록일 : 2019-05-16 14:51   |  수정일 : 2019-05-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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