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제2의 문익점, 일본인 ‘와카마쓰 도사부로’

조선에 '목화혁명'을 불붙이다.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5-11 13:42

서울 중랑구 망우묘지공원에 한 일본인이 잠들고 있다. 다름 아닌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다. 그의 묘비명이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다쿠미(巧)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임업시험소의 직원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자라는 나무 및 수입된 나무종의 묘목을 기르는 등 임업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한복을 입었다. 한복을 입은 까닭에 본부 현관의 순사로부터 검문을 받기도 했다. 조선의 각 지역을 돌며 양묘(養苗) 강연을 하다가 폐렴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과로(過勞)였다.
 
다쿠미보다 앞서 조선에서 근무한 외교관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郎, 1869-1953). 조선에 신품종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이다.
 
‘목화 꽃과 그 일본인’
 
본문이미지
와카마스 도사부로(사진: 야후재팬)
<나는 와카마쓰(若松)의 일생을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비록 심정적으로는 ‘불편한’ 총독부의 관료였지만, 일본 해군의 레거시(Lagacy: 유산)가 된 이순신 영전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본 장교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목화재배와 천일염전 개발이라는 적산(敵産)의 레거시를 남기고 한반도를 떠난 와카마쓰도 있는 그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김충식(65) 박사의 저서 ‘목화 꽃과 그 일본인’(메디치 미디어) 머리글의 중간부분이다. 책을 써야했던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자는 동아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도쿄 특파원 겸 지사장을 지냈으며, 게이오(慶應)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가천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책 ‘목화 꽃과 그 일본인’에 의하면 육지면(陸地綿)은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붓두껍에 숨겨온 재래면을 뛰어넘는 미국산 개량종이었다. 와카마쓰에 의해서 신품종 목화가 우리나라 전역에 퍼졌던 것이다. 책속으로 들어가 본다.
 
<중국에서 귀국한 외교관 다카마쓰는 1902년 7월 목포로 갔다. 그는 목포 지방의 기후와 풍토가 중국의 목화 산지로 유명한 사스 지방과 유사한 점에 주목했다. 확신을 가진 그는 목포 앞 바다의 고하도(高下島)에 육지면 씨를 뿌렸다. 6개월 정도 자란 육지면은 성공리에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고려 말 이래 500여 년 된 한반도 재래면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와카마쓰다...1904년 목포에서 육지면의 시험재배에 성공하자 정부와 정계, 관계, 방적업계가 면작 장려에 나섰다. 그리하여 미국 육지면이 한반도 전역에 퍼지는 ‘목화 혁명’이 불붙었다.>
 
또 하나의 책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나가노 신이치로(永野慎一郎)의 저서 <하얀 꽃 면화와 소금>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시대, 조선의 목포 영사관 영사로 부임해서 ‘육지면’과 ‘천일염’을 도입한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 와카마쓰. 그는 조선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한일의 가교가 되고자 했다. 그는 사리(私利)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사랑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다.>
`
육지면(陸地綿)의 발상지를 찾아서
 
필자는 어린이날 연휴를 맞아 책 ‘목화 꽃과 그 일본인’을 들고 용산역에서 목포행 KTX를 탔다. 육지면의 발상지를 찾아서다. 목포역 근처에서 차(렌트카)를 빌려서 유달산을 바라보며 길게 누워 있는 고하도(高下島)로 달렸다. 섬이 아니라 근사한 다리(목포대교, 4129m)로 연결돼 있어서 편리했다. 다리 아래의 바다도, 다리 위의 하늘도 파랬다.
 
 
본문이미지
유채꽃이 만발한 옛 목화밭

내비게이션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목적지 목화 농장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그런데, 목화 대신 노란 유채꽃들이 섬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겠지....요즈음 목화가 어디 있으랴!’
 
관광객들은 유채 꽃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필자는 커다란 카메라에 유채꽃을 담고 있는 사진 작가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목화밭이 유채 밭으로 변했나요?”
“그렇죠. 옛 목화 농장에 목포시가 유채를 심어서 관광지로 만든 것이지요.”
“혹시, 목화(육지면) 발상지 비석이 있는 곳을 아시나요?”
“목화 발상지 비석이요? 잘 모르겠습니디만...선착장에 가시면 이충무공 유적지가 있어요. 아마도 그 근처일 듯합니다.”
 
필자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서 차를 몰았다. 10여 분 만에 작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길이 좁아 더 이상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매점 뒷마당에 차를 세웠다. 걸어서 올라가자 이충무공 기념비가 있었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충무공은 이곳에서 106일 동안 주둔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모충각(慕忠閣)이 나왔다.
 
본문이미지
이충무공의 모충각: 매년 4월 28일 충무공을 추모하는 탄신제가 열린다.

하지만 육지면 발상지에 대한 표지판이 눈에 띄지 않았다. 목포역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도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선착장으로 내려가서 건장한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 그거요. 모충각 담벼락을 끼고 돌아가시죠. 왼쪽 방향입니다. 무화과밭에 있습니다.”

설명은 간단명료했으나 찾기는 쉽지 않았다. 수풀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충각을 한 바퀴 돌아  마을까지 내려가고 말았다.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두 여인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목화 관련 발상지의 비석이 어디 있나요.?”
“그런 거 없는디요.” 
낙심천만. 그런데, 옆 아주머니가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있구먼요. 저기,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으로 가보시오.”
 
그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서 갔으나 ‘컹컹컹’ 길목마다 개들이 지키고 있었다. 무서워서 다시 산 길로 원위치했다. 옷이 찢기고 가시에 찔리면서 숲을 헤쳐 나가자 무화과밭 모서리에 외로이 서있는 하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반세기 동안 방치됐던 역사의 흔적...공적은 인정해야
 

본문이미지
조선육지면 발상지비
<고하도 조선 육지면 발상지비. 고하도는 1904년 최초로 미국산 육지면 시험 재배에 성공한 곳이다. 이후 목포항은 면화 수탈의 대표적인 항구가 되었다. 이 비는 고하도가 육지면 재배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에 건립된 것이다. 앞면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 “1904년에 목포 일본영사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郎)에 의해 고하도에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한동안 마을 야산에 눕혀진 채로 방치되었으나 최근 이 또한 역사의 흔적이라는 의미 부여를 통해 현 위치에 다시 새워 보존하기에 이르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87cm, 너비 62cm, 두께 33cm이다.>
 
비(碑)의 옆에 쓰여 있는 안내문이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팽개쳐뒀던 것을 목포시가 2008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목포시 문화유산 제6호이기도 했다.
 
필자가 역사의 흔적에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려는 순간, 불쑥 누군가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자 그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에서 취재를 왔습니다.”
“목포 시청 담당자들도 찾기 쉽지 않는 곳인디...잘도 찾으셨네요?”

 IT업종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했다는 김영찬(69)이라는 농장주였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본문이미지
조선육지면과 와카마쓰에 대해서 설명하는 김영찬 씨의 진지한 모습

 “목화라면 문익점 선생만 생각허는디(하는데), 이 분(若松)은 신품종 미국산 목화를 들여온 사람이지요. 단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외면을 당했던 것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일본인이다, 한국인이다’를 떠나서 그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찬 씨의 말은 솔직 담백했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비에 새겨진 글을 깨부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길도 내고, 표지판도 만들면 관광객도 많이 올 수 있을 터. 거기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공적을 애써 무시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라고 할지라도 흔적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거기에는 반성의 요소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일 양국의 관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뒤를 돌아보는 일에만 치중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또, 만납시다.

김영찬 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산길을 내려오면서 추규호(67) 전 주일공사가 ‘목화 꽃과 그 일본인’에 쓴 추천사의 한 대목을 떠올려 봤다.
 
“한일 간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곡절과 은원(恩怨)의 역사가 있지만, 이를 단세포적이고 조건반사적인 홑눈(單眼)으로만 보며 대응할 일이 아니다...그런 의미에서 와카마쓰의 생애와 한반도에서 그가 남긴 행적은 겹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한일관계사의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등록일 : 2019-05-11 13:42   |  수정일 : 2019-05-11 13:42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NS 로그인
  • 페이스북 로그인
  • 카톡 로그인
  • 조선미디어 통합회원 로그인
  • pub 로그인
댓글을 입력해주세요.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