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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은인 두웨성

왜 독립유공자 명단에 빠졌나?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2019-04-15 09:53

▲ 상하이 청방의 3대 두목. (왼쪽부터) 황진룽, 장샤오린, 두웨성. photo 바이두
초대 주한(駐韓) 중화민국(대만) 대사(1949~1951)를 지낸 샤오위린(邵毓麟)이 쓴 ‘사한회억록’(使韓回憶錄·1980)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김구 선생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찰청장(경무국장) 겸 한교(韓僑)회장(한국교민회장)을 맡고 있을 때 두웨성(杜月笙) 선생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샤오위린 전 대사는 장제스 국민당 정권에서 대한(對韓) 외교를 총괄하며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진 외교관이다.
   
이어 샤오위린은 ‘회억록’에서 두웨성과 직접 만난 일을 회고하며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는데 돕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심하시고 혹 문제가 있으면 저를 찾아주십시오”라는 두웨성의 언급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이 바로 두웨성이다. 중국의 ‘알 카포네’로 불리는 두웨성은 상하이의 밤을 지배한 폭력조직 ‘청방(靑幇)’의 전설적인 두목이다. 상하이 푸둥의 과일장수 출신으로 청방에 투신해 아편 제조와 밀매, 도박장과 청루(매매춘) 운영, 부두 하역 노동자 공급, 은행 운영 등으로 상하이를 사실상 지배한 인물이다. 황진룽(黃金榮), 장샤오린(張嘯林) 등과 함께 상하이 3대 ‘다거(大哥)’로 불렸다. 실질적인 세력은 두웨성이 가장 커서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인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그를 “청방 300년 역사상 최고의 두목”으로 꼽기도 했다.
   
장제스가 1927년 상하이쿠데타(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의 실권을 잡을 때 행동대장 역할을 맡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휘를 받던 좌경 노동자 규찰대를 분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공으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부 고문 겸 군사위원회 소장참의라는 고위직에도 올랐고,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주변 경계경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경극여왕이자 그의 다섯 번째 부인인 멍샤오둥(孟小冬)과의 러브스토리로, 상하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적인 이름이다.
   
상하이 최고의 청방 두목
   
두웨성이 임시정부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는 점은 한국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단의 문화재 정보에도 “첫 임시정부 청사는 쑨원의 심복으로 알려진 두웨성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수립되었지만, 이곳이 청사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성주현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
   
두웨성은 암흑계 입문 초기 대외적으로 프랑스 조계의 중국계 순포(경찰) 대장으로 활동한 황진룽의 수하였다. 당시 두웨성은 프랑스 조계 내의 치안유지를 사실상 관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조계 측은 조계 내의 치안유지를 위해 ‘청방’ 인사들을 대거 순포로 채용했다. ‘어둠으로 어둠을 제압한다’는 ‘이흑제흑(以黑制黑)’의 논리였다. 두웨성의 묵인 내지 묵계 없이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비밀회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상하이의 한국 교민 수는 500여명으로, 대부분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를 알선해준 두웨성은 수많은 문헌에 나오는 명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빠져 있어 의문이 일고 있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주관한 옛 문교부, 총무처,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89명(2019년 현재). 이 중 중국 출신은 33명으로 가장 많다. 당시 중화민국의 주요 정재계 인사들과 국민당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장제스(1953·이하 수여 연도) 중화민국 총통에게 독립유공자 1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것이 신호탄이 됐다. 이후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1966), 천궈푸(1966), 쑨원(1968), 천치메이(1968) 등 중화민국의 핵심인사 5명이 1급 유공자에 올랐다. 독립유공자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에도 쑹자오런(1968), 탕지야오(1968), 런썬(1968), 황싱(1968), 후한민(1968), 쑨커(1970) 등이 올라 있다. 그 아래인 독립유공자 3급 건국훈장 독립장에도 다이리(1968), 천리푸(1968), 후종난(1968), 추푸청(1996) 등이 올라 있다.
   
중화민국 인사들은 김구의 차남 김신씨가 주중화민국(대만) 주재 한국대사로 있던 1962~1970년 사이 대거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정부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가는 맹방이었고, 장제스는 김구와의 인연으로 그의 아들 김신 전 대사를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운영 당시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주고받은 중화민국의 고위인사들이 대거 독립유공자에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린 중국인들
   
하지만 중화민국 고위인사들을 대거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릴 때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 교민 보호에 직접적 도움을 준 두웨성의 이름이 왜 빠졌는지는 미스터리다. 두웨성이 암흑가의 보스로 악명 높은 인물이라서 독립유공자 훈포장 명단에 올리기를 꺼렸을 것이란 어림짐작만 할 뿐이다. 1949년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할 즈음 두웨성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장제스·장징궈 일가와 멀어졌다. “장제스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카드로 인신구속만은 면한 것으로 알려진다.
   
두웨성은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건너가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1951년 63세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대만 신베이시의 네 번째 부인 묘 옆에 있다. 그가 살던 상하이의 대저택은 도심개발 과정에서 철거됐으나, 한 사업가가 매입해 상하이 외곽 자딩에 고스란히 복원했다. 그가 첩들에게 나눠준 상하이의 저택들 역시 호텔과 고급식당 등으로 쓰이고 있다. 두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각종 드라마와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모든 역사에는 흑백과 음양이 있기 마련이다. 100주년을 맞이한 상하이 임시정부 역시 예외가 될 순 없다. 국가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독립유공자 지정은 과거 총무처, 문공부 등에서 하다가 1977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며 “학계나 전문가의 추천을 받거나 보훈처 직권조사를 통해 유공자에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등록일 : 2019-04-15 09:53   |  수정일 : 2019-04-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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