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돌, 채규엽의 두 얼굴’

글 | 이동순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유행가수는 누구일까요?

이런 궁금증에 대한 분명한 해답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채규엽입니다.

식민지라는 우울한 시대사를 배경으로 가요계의 위상이 점차 구체적 형상을 이루어 가던 1930년, 채규엽은 두 곡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유랑인의 노래>(채규엽 작사, 작곡)와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 작곡)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한 장의 음반으로 채규엽은 노래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던 식민지 대중들에게 최초 직업가수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이 음반의 라벨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수의 이름 앞에 ‘성악가’란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당시 대중가요와 성악의 구분이 아직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채규엽은 1906년 함흥 출생으로 원산중학을 다녔는데 재학시절 독일인 교사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고 1년 뒤에 돌아와 귀국독창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채규엽은 바리톤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그로부터 본격적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극단 토월회와 취성좌의 공연에서 막간가수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강한 억양의 함경도 사투리에 완강한 이미지로 느껴지는 용모. 신장은 비교적 작은 편이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음악학교 교사의 경력을 가졌으며, 가창력 또한 뛰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찬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채규엽에게는 무엇보다도 흥행사로서의 남다른 자질이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출생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결코 화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차마 말하기 힘든 개인사적 열등감 때문으로 짐작이 됩니다.

당시 조선 민중들은 식민치하에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날이며 날마다 괴롭고 숨 막히는 심정을 가슴속에 안은 채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채규엽이 불렀던 <봄노래 부르자>(서수미례 작사, 김영환 작곡)는 빼앗긴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을 꿈에 가만히 그려보는 설렘과 아련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가늘고 잔잔한 미성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여운 효과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기가 워낙 높아가자 이 곡은 곧 수상한 곡으로 낙인찍혔고 발매금지가 되었습니다.
 
명사십리(장재성작사,죽강신행작곡,채규엽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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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엽음반광고(조광1936)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 돌아 꽃은 피고
새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모들아
모도 다 몰려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봄노래 부르자> 1절
 
이 밖에도 채규엽은 <서울노래>, <눈물의 부두>, <북국 오천키로> 등의 대표곡을 비롯하여 80여곡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쓴 <서울노래>(조명암 작사, 안일파 작곡)는 지금 읽어도 유구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 번민이 잔잔하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눈물의 부두>(조명암 작사, 김준영 작곡)도 채규엽의 노래를 통하여 매우 특별한 반응으로 대중들의 심금을 크게 울렸던 명곡입니다. 이 곡을 반복해서 듣노라면 한국인의 민족정서와 그 고유성이 떠올리게 하는 묘한 반응으로 가슴은 젖어듭니다. 그
                                            것은 슬픔과 애절함의 빛깔로 우리를 사무치게 합니다.
 
ⅰ)한양성 옛 터에 종소리 스며들어
   나그네 가슴에도 노래가 서립니다.
   한강물 푸른 줄기 말없이 흘러가네
   천만 년 두고 흐를 서울의 꿈이런가
 
   밤거리 서울거리 네온이 아름답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꽃 피는 한양성 잎 트는 서울거리
   앞 남산 피는 구름 서울의 넋이런가

-<서울노래> 전문

ⅱ)비에 젖은 해당화 붉은 마음에
   맑은 모래 십리 벌 추억은 이네
   한 옛날에 가신 님 행여 오실까
   비 나리는 부두에 기다립니다
   저녁 바다 갈매기 꿈같은 울음
   뱃사공의 노래에 눈물집니다

-<눈물의 부두> 전문
 
ⅲ)눈길은 오천 킬로 청노새는 달린다
   이국의 하늘가엔 임자도 없이 흐드겨 우는 칸데라
   페치카 둘러싸고 울고 갈린 사람아
   잊어야 옳으냐 잊어야 옳으냐
   꿈도 슬픈 타국 길
 
   채쭉에 문허지는 눈보라가 섧구려
   연지빛 황혼속에 지향도 없이 울면서 도는 청노새
   심장도 타고 남은 속절없다 첫사랑
   잊어야 옳으냐 잊어야 옳으냐
   달도 운다 타국길
 
   잔들어 나눈 사랑 지평선은 구슬퍼
   거리가 가까웠다 모스도와야 기타야스가 좋구나
   달뜨는 쎈도라루 펄럭이는 옷자락
   잊어야 옳으냐 잊어야 옳으냐
   별도 떤다 타국 길

-<북국 오천키로> 전문
 
ⅲ)은 <북국 오천키로>(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의 노랫말입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집과 논밭을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들을 대거 만주 벌판으로 내몰기 위하여 일제는 이른바 농업이민이란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백성들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갔었던 것일까요? 그 수는 당시 자료를 통해 보더라도 무려 20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등을 떠밀려 고향에서 쫓겨 갔던 것입니다. 일제말로 접어들수록 유랑민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북국 오천키로>란 노래는 이런 슬픈 사연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습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고통의 길은 당시 식민지 백성들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하게 해줍니다.

낯선 땅 거친 바람 속에서 꺼질 듯 꺼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칸데라 등불은 고달픈 유랑민의 행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연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누가 그들을 반겨 맞아줄 것인지…  과연 그들의 앞날은 가사의 한 대목처럼 ‘꿈도 슬픈 타국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노래를 채규엽이 불렀던 것입니다. 대중들은 <북국 오천키로>를 너무도 처연하게 불렀던 가수를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존경심마저 품었습니다. 남인수, 백년설, 이인권 등의 후배가수들도 그들이 가수가 되기 전 채규엽의 인기곡을 교본으로 연습했다는 사실을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채규엽은 한국가요사 여명기의 확실한 대표가수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서 우리는 가수 채규엽의 두 얼굴 중 선한 마스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행적이 문제입니다. 채규엽은 대중들의 높은 지지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상하게도 일그러진 인격으로 변모해갔습니다. 그 과정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엄청난 성원을 보내준 대중들에게 애정 어린 보답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일 아닐까요? 그러나 채규엽의 경우 사뭇 광기가 서린 우쭐거림과 자기도취, 자기과시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1935년 매일신보에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가요계의 왕좌에 올랐으나 인간 채규엽의 처세는 점차 교만하고 방자한 꼴로 바뀌었습니다.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탁하여 자신의 이권과 지위를 더욱 살찌우는 추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유창한 일본어 구사 능력은 그의 이러한 삶에 한층 친일적 관록을 보태었습니다.

일제말 창씨개명이 실시되기 이전에 채규엽은 이미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 혹은, 사에키란 일본 이름으로 음반을 취입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일본의 전통음악인 나니와부시(낭화절, 浪花節)를 맹렬히 연습하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일본 의탁은 점차 병적인 징후로 드러났습니다. 일본군 장교복장으로 공석에 나타나서 좌중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고, 또 당시 막강한 친일단체이던 대정익찬회 소속의 명함을 돌리며 자신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일제말에는 기어이 일본군 비행기 헌납 모금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무렵 채규엽이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언론에서는 내선일체의 훌륭한 본보기라는 칭송이 쏟아졌습니다.

채규엽이 남긴 음반들을 살펴보면 일본 엔카풍 노래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 놀라게 됩니다. 유명 일본인 작사가, 작곡가들이 채규엽의 발매 음반에 솔선해서 작품을 제공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과정들이 단순히 채규엽의 친일적 변모로만 읽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일본 엔카를 통하여 일본문화를 식민지 땅에 강제 이식시키려던 식민통치자들의 정략적 기도는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했습니다. 채규엽은 혹시 그러한 식민지 문화정책의 희생물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내막도 모르고 줄곧 우쭐거리며 환상에 도취되었던 채규엽은 가련한 종이인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채규엽이 취입한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님 자최 찾아서> 따위의 노래들은 모두 일본인 작사가와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전형적 일본 엔카를 그대로 한국어 버전으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닙니다.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다카하시 타로 작사, 고가 마사오 작곡)란 노래는 일본의 인기가수였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가 불러서 히트했던 곡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채규엽에 의해서 그대로 직수입 되어 식민지 땅으로 날개 돋친 듯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술이야 눈물일까 한숨이런가
이 마음의 답답을 버릴 곳장이
 
오래인 그 옛적에 그 사람으로
밤이면은 꿈에서 간절했어라
 
이 술은 눈물이냐 긴 한숨이냐
구슬프다 사랑의 버릴 곳이여
 
기억도 사라진 듯 그이로 하여
못 잊겠단 마음을 어찌면 좋을까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전문
 
이 노래의 가사와 곡조를 유심히 들어보면 듣는 이의 마음을 비탄과 허무, 좌절 속으로 침몰시켜버리는 기묘한 중심의 해체, 혹은 파괴 작용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의 난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로지 술에 의탁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패배주의자의 어설픈 모습만이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혹시라도 가질 수 있는 체제와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들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엔카를 통해서라도 힘의 분산과 약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드디어 채규엽은 식민지적 광기에 오히려 편승하여 대중들의 실망과 분노를 자아냅니다.

채규엽의 방만한 여성편력과 사기행각이 신문에 자주 보도되자 가수의 명예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반성을 모르는 그의 방자함과 교만함은 극에 달하여 후배가수들의 가슴에 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후배들의 연습곡을 귀 기울여 듣다가 자기 마음에 들면 마구 빼앗아 자기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해방 이후 채규엽은 한동안 가요계의 표면에서 사라져 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충남 논산의 시골 마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숨어 살았습니다. 이것은 식민지 시절, 일제와 야합했던 친일파를 척결 응징하는 반민특위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후 흥행사로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방만한 운영과 사기행각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채규엽의 정신적 파산에 대해서도 가요계의 의리는 뜻밖에도 관대했습니다. 후배가수 남인수, 백년설, 최남용 등이 중심이 되어 공연을 열고 무료 출연으로 채규엽 돕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채규엽은 끝내 후배들 앞에서 모범적 선배로서의 자세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끝을 모르는 세속적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자주 내적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되자 불만족으로 인한 채규엽의 고통은 심한 탈모로 나타났습니다. 이 대머리를 채규엽은 몹시 수치스러워했습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숯가루를 물에 개어서 이마에 발랐습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경과하게 되면 얼굴에는 온통 땀과 함께 흘러내린 숯가루로 이상한 용모가 되곤 했습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직업가수였던 채규엽. 분단은 그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기어이 파멸의 길로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1949년 채규엽은 어린 딸과 가족을 서울에 버려둔 채 홀로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습니다. 당시 북조선문예총 음악동맹위원장 직함을 갖고 있던 작곡가 이면상과 가수 이규남이 옛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거물이 된 옛 친구에게 어떤 기대를 가진 계산된 월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황폐한 삶과 행적이 과연 북에서도 통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채규엽은 바로 그해 말, 함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입력 : 2013-09-05 오후 2:59:01 | 수정 : 2013-10-01 오후 4:5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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