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석 명예교수는 “지금도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한다”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그 생각이 끝나면 아마도 우리 인생이 끝나지 않을까”라며 “인생에서 제일 좋고 행복한 나이는 60에서 75세까지이고,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조선일보DB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입니다.”

“어제도 밤 10시 반까지 일했어요.”

첫 번째 말씀은 올해 101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것이고, 두 번째는 올해 백수(白壽)인 이종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의 말씀이다. 100세를 전후한 두 어른이 서울대 총동문회 소식지(7월호) 1면과 2면을 장식했다. 

김 교수는 지난달 8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같은 대학 조찬포럼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국내 1세대 철학자, 수필가, 기독교인이다. 1920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젊은 시절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들었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30여 년간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김 명예교수는 “지금도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한다”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그 생각이 끝나면 아마도 우리 인생이 끝나지 않을까”라며 “인생에서 제일 좋고 행복한 나이는 60에서 75세까지이고,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저는 누굴 만나든지 90 전엔 늙지 마라, 늙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 했다. 60쯤 되니 조금 철이 드는 것 같았고, 75세쯤까지는 성장을 하는 것 같았다고도 했다. 

김 명예교수는 나이 80에 얻은 일에 대한 깨달음 하나를 보탰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을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전엔 백 사람이 백 가지 일을 하면 백 가지 목적이 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정치가는 국민의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해 정치를 합니다. 기업도 가난한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혜택을 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하는 거죠. 교육도 마찬가집니다. 이기주의자는 사회생활에서 일다운 일을 할 길이 없습니다. 내 소유를 위해서 사니까요. 이 생각을 하고 경제관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돈 벌기 위해 일했는데, 이젠 내 돈을 쓰더라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게 됐어요.”

김 명예교수는 100세 넘도록 장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욕심이 없고, 남을 욕하지 않으며, 그 가운데서도 존경 받는 이는 좀 더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살아보니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어요. 생각해 보니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 위해서 기도하고 일하고, 피곤하지만 강연도 다니니까 더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고생하고자 합니다.”

그는 “정신력은 절대로 늙지 않는다. 95세쯤 되니 내 정신력이 신체를 끌고 가더라”며 “노력하는 사람은 신체가 끝날 때까지 사고력이 계속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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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삼영그룹 창업자는 사재 97%를 기부해 재단을 만들었다. 기금 운용소득을 재원으로 매년 국내 200명, 해외유학 300명의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인원도 부족하다 느낀 관정은 내년엔 국내 500명, 해외 500명을 지원할 계획이다. 사진=조선일보DB

이종환 삼영그룹 창업자는 앞서 김형석 명예교수가 언급한 대로 ‘남을 위해 베푸는 일’을 실천하고 있다. 1923년 출생인 그는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를 2년 수료한 후 소련과 만주, 일본 등을 오가며 사선을 넘나들다가 해방을 맞았다. 6·25전쟁 후 1958년에는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창업했고, 현재는 16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02년부터 사재 1조5000억원을 출연, 아시아 최대 장학재단인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창립, 세계 1등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는 자선사업가로 활동한다. 관정(冠廷)은 그의 호.

서울대 총동창신문에 따르면, 관정은 평소에도 밤늦게까지 일한다. 그의 사재 97%를 기부해 재단을 만들었다. 기금 운용소득을 재원으로 매년 국내 200명, 해외유학 300명의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인원도 부족하다 느낀 관정은 내년엔 국내 500명, 해외 500명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 21년간 관정재단 장학생은 1만1000여 명. 이중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700여 명이다. 국내외 유명대학 교수도 상당수라는 게 재단 측 설명이다. 관정의 말이다.

“내가 지원해준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해 왔어요. 그런데 노벨상이 서구 쪽에 치우치고 있는 것 같아 아시아 쪽도 소홀하지 않도록 그런 상을 직접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관정은 ‘한국의 노벨상’을 만들고 있다. 그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상을 제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검토할 사항이 너무 많더라”고 했다. 관정과학상을 노벨상과 어떻게 차별화할지, 학문적 이론 창출에 손을 많이 들어주는 노벨상과 달리 실용적 과학에 더 역점을 둘지 등을 현재 검토 중이다. 

관정은 “몇 년 전 노벨 물리학상을 탄 미국의 석학이 방한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서 “지식에는 수동적 지식과 능동적 지식이 있는데 남한테 배워 아는 지식보다 스스로 알아내는 새 지식을 창출해야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곧 창조적 지식의 창출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동적 지식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선 이제 능동적·창조적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정은 장학재단을 만든 계기에 대해 “유럽 출장길에 들른 스위스가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고 했다. 1960년대 말 어느 날 사업상 유럽을 가게 된 관정은 바쁜 비즈니스 일정 중 딱 하루 스위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처음엔 단 하루 머물려던 계획은 일주일로 연장됐다. 당시 관정의 눈에 들어온 건 한국보다 부존자원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나을 것도 없는 스위스가 세계적인 부국으로 우뚝 선 모습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우리보다 못한 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10배 이상이나 잘살고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비결이 궁금하기도 했다. 보아하니 바로 사람이더라”고 했다. 관정은 이때부터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시키는 데 조건 없이 앞장서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관정은 현재 집이 따로 없다. 40대 중반에 지은 살림집을 10년 전에 헐고 재단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 건물 6층을 임대해 임대료를 내고 살고 있다. 그는 “일을 하다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다해 쓰러지는 게 내 소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