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선일보DB

기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여 전, 중앙일간지 소속으로 한 선배기자의 김종인 인터뷰에 취재 지원차 동석한 바 있다. 인터뷰 시기는 조기대선 직전인 2017년 4월, 장소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의아침 사무실 끝방, 비서가 쓰는 응접실이 별도로 있는 비교적 큰 평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50분 남짓 되는 인터뷰 시간 동안, 고령에도 장신(長身)에 체격이 좋았던 김종인씨는 첨예한 대선 정국 쟁점에 대해서 거침없이 답을 했다. 독자 출마 의사를 접은 이후 요란하게 펼쳐지는 대선 구도와 각 후보들에게 염증, 싫증을 내는 듯 하면서도 무언가 여지를 남겨두고 뼈 있는 말은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식의 화법에서 오랜 정치적 내공이 느껴졌다.

해당 인터뷰 이후 그는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가 만든 이른바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다들 그가 여야 비상대책위원장만 지낸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렇게 이른바 '제3지대'에서도 '상왕(上王) 노릇'을 했다는 것까지는 미처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봄, 서울시장 재보선을 두고 안 후보와 치열한 단일화 신경전을 벌인 사람의 과거라고는 떠올리기 힘든 일이었다. 과연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생물(生物)이라는 말을 실제로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기자는 지난 8월 30일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을 종합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른바 '본선 캠프'의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아 '킹 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측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윤석열 대선후보가 선출되고 중앙 선대위 출범을 앞둔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 여야를 넘나들며 선거의 귀재로 추앙받던 김종인의 정치 내공은 정권 교체의 바람 앞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원톱 체제', 즉 캠프 내에서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과하게 요구하다 후보와 선대위 내부의 비토에 직면하게 됐다.

정가(政街)에서는 "김종인 특유의 '몽니 정치'가 역풍을 맞았다"고 지적한다. 항상 최고의 자리, 즉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면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던 그였던 만큼 고집스러움은 예상된 것이었으나 이미 대세를 탄 야당은 더 이상 그의 조력을 갈구할 필요가 없게 됐다. 오히려 "주접 떤다"는 식의 지나친 언사가 공개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통화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면서 야권 지지자들은 김종인의 처신에 실망하는 분위기다. 야권 상왕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자 여권 쪽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제기된다. 당 안팎과 지식 사회에서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병준 국민의힘 중앙 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은 28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에서 "내일 아침 선대위가 정식 첫 회의를 한다. 선대위 출발이라고 보셔야 한다"며, '김종인 합류'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대해선 제가 이야기 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임승호 국민의힘 대변인은 지난 26일 'KBS 라디오 -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20대 청년에게 김종인의 영향력은 정치에 관심 있던 기존 윗세대에 비해 약하다"고 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28일 《매일신문》 칼럼 '보수의 욕심, 진보의 위선'에서 "김종인씨의 총괄선대위원장직 수락 여부를 둘러싼 야당의 혼란은 도대체 누가 대통령 후보인지를 헷갈리게 할 만큼 기가 막힌 일이다. 아직 진행형인 이 상황은 윤 후보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다"며 "2030 세대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좌우될 이번 대선에서 80대 노인과 현 상태에 책임이 있는 60대 이상의 본부장들이 뻔뻔스럽게 나서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가"라고 지적했다.

노원명 《매일경제》 오피니언부장은 이날 '김종인씨는 한국의 딕 체니가 되고 싶은 걸까'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김종인은 자기가 전권을 갖고 선거를 치르기를 원한다. 만약 선거에서 이기면 그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라며 "실권 국무총리? 아니면 무슨 특별보좌관 자리를 만들어 청와대에서 일일이 훈수라도 둘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노 부장은 "일부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지금 항간에선 이재명 캠프 쪽 주요 인사가 김종인씨를 만났다는 소문이 번져나가고 있다.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며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정치가 너무 바닥을 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미식 정당 정치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가치의, 배알도 없는, 정상배적 기술정치다"라고 일갈했다.

노 부장은 "한국 정치가 4류 소리를 들은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이렇게 변태적이고, 제3세계적인 정치공학과 상상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싶다. 김종인씨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길래 나이 팔십에 이처럼 인격모독적인 소문에 휩싸이는가"라며 "도대체 김종인씨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런 김종인씨를 모시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집단들의 가치는 또 무엇인가"라고 개탄했다.

노 부장은 "소위 '김종인빠'들은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선거에 질 것처럼 겁을 준다. 그 믿음은 무속에 가깝다, '그가 가장 용하다'는 믿음 말이다"라며 "빅데이터 시대에 '비책' '비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세상에 비책이 있나, 비책처럼 포장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의 세계에선 기술이 아니라 가치와 명분이 세상을 바꾼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상식화, 정상화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며 "몰가치한 기술자에게 훈수 받아 선거에서 이긴다치고 그런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상식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경향신문》 인물팀장을 지낸 정기수 자유기고가는 같은 날 '데일리안' 칼럼 '김종인의 주접과 중도팔이'에서 "김종인의 속마음은 무엇이고,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는 과연 진심으로 정권 교체를 바라는 사람인가?"라며 "김종인은 정권 교체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일개 책사(策士)다. 대통령 문재인과 586 운동권 출신 기득권자들이 망쳐놓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새롭게 이끌어 가야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 사명감이 이 사람에게는 애당초 없었던 것"이라고 질타했다.

정 기고가는 "그럼 왜 윤석열과 당 대표 이준석, 그리고 일부 중진들과 일부 좌우 논객들은 김종인에게 그렇게 후한 점수를 주고 모셔오려고 갖은 애를 쓰는가?"라며 "그의 '중도 팔이' 장사 솜씨를 과대평가하고 자신들 이익을 위해 그에 편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보수야당의 역량과 자신감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방증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 기고가는 "김종인은 그의 나이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언사의 기자 질문 대응과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주접을 떠는 사람은 정작 노욕의 장본인인 자신이 아닌가?"라며 "윤석열과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를 아직은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과 대한민국의 팔자가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