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경기도 파주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문'에 사인한 뒤 서로 포옹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문재인 정부가 남북 관계에만 몰두하며 전략의 길을 잃었다며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의 '전략적 모호성'이 아닌 '선명성'을 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헤게모니 변방국'인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미국 우선 정책을 지속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했던 현인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신아시아연구소 소장)는 지난 6월 국제정치 학술지 '신아세아'에 게재한 '미·중 패권전쟁과 한국의 생존전략'이란 논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현인택 교수는 논문에서 "동맹으로부터 신뢰도 얻지 못하고, 남북 관계에서 조롱당하고, 한중 관계에서 무시당하고, 한일 관계에서 냉대 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외교안보 현실"이라며 "이런 불편한 진실의 가장 큰 이유는 남북 관계에 올인한 정책이 탈선하면서 생겨나 후탈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도 예견할 수 있었던 '예정된 사고'"라고 말했다.

현 교수는 "문 정부는 3년에 걸친,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끝난, '북한 올인 정책'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며 "북한 정책을 위해 대미, 대중 정책을 끼워 맞추려 하는 시도는 상당한 전략적 불협화음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논문은 미중 패권전쟁의 양상을 설명하며 "향후 미중 패권전쟁은 적어도 30년 이상 진행되는 매우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라며 "이 싸움은 미국과 중국이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붓는 총체적인 경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여기에 미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의도하든 아니든 개입돼 있다"며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지돼왔던 동맹과 국제 제도가 다 같이 테스트받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문재인-바이든 정상회담에서 보듯 북한 문제는 겨우 봉합했고, 쿼드 문제는 피했으나, 대만 문제, 남중국해 문제, 인권 문제는 어떠한 형태라도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이것은 시작이고 앞으로 그 강도는 더욱 세질 것"이라고 말했다.

논문은 한국은 헤게모니 주변에 위치한 헤게모니 변방국으로서 미중 간 헤게모니 싸움에서 빠질 수 있는 '퇴장 선택권'이 없다고 설명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무조건 대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것이다. 현인택 교수는 논문에서 헤게모니 변방국으로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전략적 선택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다음은 현 교수의 주장을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첫째, 미중 사이의 '전략적 모호성'은 하책이다. 전략적 모호성은 잠시 미봉책으로나 비본질적 이슈에 대해선 한두 번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견고한 전략적 선택으로서는 부적절하다. 미중 양쪽으로부터 다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사안마다 전전긍긍해야 하는 매우 졸렬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책이다. 이러면 국가는 자존을 지키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국가 이익도 지키지 못한다. 현실적이며 바람직한 선택은 동맹인 미국 우선 정책을 지속하는 것이다. 다만 중국도 한국의 경제, 안보에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을 배타적으로,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둘째, '안미경중'(安美經中)도 대안이 아니다. 미중 패권경쟁이 노골화되고 있는 지금 안보와 경제 이 둘을 분리해서 접근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이 이미 경제적으로 중국에 제재를 가하고 있고 이는 이미 안보 사안이다. 오히려 한국이 중국에 대해서 경제적 의존도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전략적 관심사가 돼야 할 것이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심화하면서도 중국이 경제 카드를 썼을 때 '상호의존성의 취약성'이 우리 경제에 치명적이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경제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한국이 미국 편에 선다고 해서 모든 사안에 대해서 중국은 적이고 반대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저차원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또한 한국이 미국 편에 선다고 해서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모든 사안에 대해서 배척당하고 갈등을 겪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 못하다. 다만 한국은 헤게모니 변방국이며 중국과 지정학적으로 밀접하게 얽혀있고,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압박도 좀 더 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이 감내해야할 숙명적인 것이다. 이것도 감내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자존을 가진 선진경제국가로서 우뚝 서기 어렵다.

넷째, 전략적 선명성을 표방해야 한다. 2017년 4월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전언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이 "한국이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중국 지도부 전체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한국을 보고 있고,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하면 할수록 중국의 이런 시각에서의 압박의 강도는 더욱 세질 가능성이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가 '전략적 모호성'을 말하며 상대방의 눈치나 보는 듯한 행동으로 중국에 대응하면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오히려 한국이 전략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이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 전략적 선명성을 표방해야 한다. 

우리의 전략적 입장은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를 대외 정책에서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이상 국제 사회에서도 이러한 한국의 목표와 가치가 지켜지도록 노력하겠다고 표방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동맹을 동맹이라고 당당히 하고 우리의 안보적 이익은 지키겠다고 해야 한다.

다섯째, 능력이 있어야 원칙과 국익을 지킨다.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안보와 경제의 '탄력성'이다. 이는 상대국이 타격을 가했을 때 그것을 버텨내면서 상대에게도 일정 부분 타격을 가할 정도의 적극적 능력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안보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최소한의 안전판이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꾸준히 독자적 안보 능력을 키우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반도체, 배터리, 5G, AI(인공지능), 자동차, 조선, 철강, 중화학 등 산업 분야에서 초일류 기업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것만이 경제의 탄력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한국이 세계 최고 경제 국가가 될 때 비로써 헤게모니 변방국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