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이 선서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26일 서거한 고(故)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6·29 민주화 선언’과 ‘북방외교 정책’을 꼽을 수 있다. 특히 1987년 한국 사회에 민주화 열기가 부풀어 오르고 6·10 민주항쟁 같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간선제(間選制) 출신의 군사정권(軍事政權)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질 당시, ‘직선제(直選制) 개헌(改憲)’을 전격 선언한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은 민주화 시대의 개막(開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정가(政街) 일각에서는 ‘노태우의 6·29 선언은 대국민 저항에 부딪힌 5공(共) 세력이 불가피하게 직선제를 떠밀려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 정치적 함의(含意)를 평가절하해왔다. 6·10 항쟁은 시민들의 자발적 민주화 투쟁인 반면, 6·29 선언은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만큼 두 사건을 연결지어 민주화 정착의 기초로 보는 시각은 잘못됐다고 비판해온 것이다. 이 같은 논리를 펴는 진영에서는 6·29 선언 직후 치러진 제13대 대선에서 일로삼김(一盧三金) 구도 하에 노태우 정부가 수립된 결과에 대해서도 비판을 이어간다. 노태우가 전두환(全斗煥)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만큼, 노태우 정부는 사실상 ‘군사정권의 연장’이었다는 논리다.

6·29 선언의 시대적 의의와 정치사적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위 논리처럼 군사정권 세력이 시민항쟁의 기세에 눌려 일방적으로 백기(白旗)를 든 항복 선언에 불과한 것일까. 이와 반대로 학계 일각에서는 민주화에 기여한 6·29 선언의 정치적 함의를 호평(好評)하기도 한다. 당시 5공 정권을 대표하던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전면 수용은, 향후 우리 사회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튼 ‘중대 계기’였다는 의미다.

2007년 6월 29일 당시 ‘6·29 선언 20년 기념’으로 김용갑 한나라당 국회의원(전두환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이 주최한 국회 정책토론회 ‘6·29 민주화 선언 알고 있는가 – 6·29 선언의 역사적 평가’에서 주제발표(6·29 선언을 재조명한다)를 맡은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학과 교수는 관계 논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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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효종 교수 논문 캡처

〈적지 않은 사람들은 87 민주화를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민주화에 대한 매우 단순한 ‘버전’일 뿐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타협에 의한 민주화’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나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구분되는 제3의 유형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6·10 항쟁과 6·29 선언을 ‘하나의 패키지’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박 교수는 “확실히 6·29 선언은 집권세력의 ‘강요된 선택’ 혹은 ‘제약된 선택’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의 요구’는 열화(熱火)와 같았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선택의 의미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국의 헌정사(憲政史)를 돌이켜 볼 때 제3자의 눈으로 볼 경우 민의(民意)의 흐름과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유일한 ‘합리적 선택’이며 동시에 ‘강요된 선택’으로 보여지는 경우에도 ‘최악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자유당 시절 대학생들의 부정선거 항의에 대한 억압적 대응이나 부마 사태에 대한 강압적 대응 또한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억압적 대응들이 바로 그랬다”며 “따라서 6·29 선언이 ‘강요된 선택’이라고는 하나, 민의를 억누르려 하지 않고 순응하기로 결정한 것은 ‘제약된 선택’이면서도 ‘현명한 선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87 민주화 이행과 관련, 6·10 항쟁 못지않게 6·29 선언도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1987년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 이후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절정(絶頂)에 달하여 극적인 민주개혁 없이는 더 이상 효과적인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므로, 전두환 정부는 헌팅톤의 표현처럼 “권위주의 체제로는 더 이상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현실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정당성의 위기를 기존의 권위주의 체제로 해결해나갈 수 없으며 이 정치 구조를 수정해야 하겠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6·29 선언이야말로 권력 공간의 폐쇄성을 전제로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권력의지’를 포기하면서 유권자들의 심판과 공정한 경쟁에 의한 민주적 방식을 받아들이겠다는 공약이었다. 국민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한 정권교체를 약속한 6·29 선언은 이때까지 한 번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적이 없었던 한국 정치과정에 새로운 전례(典例)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민주적 틀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정치 협약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결국 6·29 선언을 반추할 때 역설적인 것은 권위주의(權威主義)의 핵심이면서도 시민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에 순응하여 권위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던 의지와 선택이 돋보인다는 점”이라며 “6월 항쟁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복원을 요구하는 절제된 목적 지향성과 온건성을 가졌다면 6·29 선언은 이러한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 인해 절차적 민주화에로의 길이 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