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회고록 상·하권.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0년 전인 2011년 8월 8일 '노태우 회고록'을 출판했다. 당시 회고록에는 정치자금 관련 내용까지 담겨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비자금 문제까지 공개한 것을 볼 때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기록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회고록의 주요 내용을 다시 읽으며 그의 생애와 업적에 관해 회상해보고자 한다. 노태우 회고록 상·하권의 부제는 각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과 '전환기의 대전략'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국내적으론 민주 사회로, 국제적으론 탈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전환기의 지도자로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6·29선언을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었고, 탈냉전 시기 북방정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 영토를 넓혔다.

이하는 노태우 회고록의 주요 대목들을 옮긴다.

제14장 6·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두가지 지침: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1987년 6월 17일 안가 만찬,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후보,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장관,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

전두환: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정부에서 뭘 연구하더라도 이제는 전부 노(盧) 대표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안기부장을 오라고 한 것은 비서실과 긴밀히 협조해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날(6월 17일) 밤 연희동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할게" 하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말을 받아 '노 후보가 시국수습의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날 밤 박철언(朴哲彦)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며 초안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박 특보가 몇 명의 참모들과 함께 초안을 잡으면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제18장 '5共 청산'이란 狂風

▶마녀 사냥

<5공(共) 청문회도 그랬다.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 등이 뒤범벅되어 버렸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命題)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안 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춰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위정자(爲政者)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23장 민주화와 자율화의 전면적 확산

▶"언론은 장악될 수 없다"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6·29선언 제5항만큼 내가 명심(銘心)했던 말도 없을 것이다. 언론인들과 야당에 대해서 최대의 자유를 준 것은 나였고 그들로부터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도 나였다. 나도 인간인 만큼 때때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으나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약속을 떠올리면서 나를 다스렸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보장하면 그에 따른 책임과 신중함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5년 안에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순 없었다. 민주화는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임을 새삼 깨닫고 나의 성급함을 반성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제도가 바뀌는 것보다 인간이 바뀌는 것은 더 더디다.

나는 언론자유가 민주화의 견인차(牽引車)라고 생각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의 어머니라고 한다. 내 재임기간 중 언론의 자유는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제24장 전환기의 經濟, 도전과 응전

▶북방정책으로 열린 한국 경제의 活路

<소련 측에 제공한 경협자금에 대해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14억5000만 달러밖에 가지 않았다. 국제교역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한국은 북방외교를 통해 수교한 중국과 동구권에서만 흑자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는 적자(赤子)를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련에-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빌려 준 차관은 이미 그 이상의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국방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위상(位相)과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6공은 민주화와 공산권 붕괴라는 도전(挑戰)에 대해서 경제의 자율화와 북방정책이란 응전(應戰)을 했다. 그 승부의 결과는 대승(大勝)이었다.>

▶경제正義와 민주화의 代價

<6공화국을 출범시킨 나의 앞에는 '민주화'라는 절대적인 과제가 놓여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단언할 수 없었지만 적잖은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경제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6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가면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경제정의(經濟正義)'는 6공화국 초기부터 강조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18년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7년의 성장위주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분배구조는 이른바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6·29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副應)하다 보니 누구라도 경제정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을 만난 것이다.>

제46장 북방외교의 철학

▶북방정책 추진의 원칙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문에 북방외교는 소련과 중국, 남북한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가면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소련을 놓고도 단지 소련만이 아니라 중국·일본·미국·남북한 간의 관계를 모두 고려하면서 전략과 구상을 세웠다. 최고통치자로서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그 효과까지도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큰 틀 안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외교에서 자주(自主)외교로 전환시켰다. 나는 냉전 시절부터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 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 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內在)된 나의 기본 철학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외에 노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밝힌 내용도 흥미롭다. 그는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다. 그러나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 인식의 차이로 해서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이 예전의 우정을 회복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퇴임 후 '개인 전두환'과 '개인 노태우'는 여전히 친구로서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비슷한 시기에 감옥생활을 했던 전직 대기업 회장의 교회 간증 내용이다.《월간조선》2011년 9월호에 실린 내용을 옮긴다. 

<노태우, 전두환 두 대통령은 수감 중 12·12 사건, 5·18 사건 등과 관련해 같은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서울구치소에, 전 전 대통령은 안양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똑같은 사건으로 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이야기가 두 사람 간에 오갈 수 있기 때문에 법정에 함께 선 두 사람의 대화를 교도관이 가까이서 들어야 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제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법정에서 만나자 전 전 대통령이 먼저 노 전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구치소에서는 계란 후라이 주나?"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이 "안 준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은 "우리도 안 줘"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전직 대기업 회장에게 전한 교도관에 따르면 오래된 친구에게서나 오갈 수 있는 어투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