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2월 재건축 시공사 선정이 예상되는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소재 ‘한강맨션’ 단지 전경. 사진=조선일보DB

서울의 ‘센터럴 파크’가 될 용산공원을 중심으로 한강변 도시정비사업들이 속도를 내는 가운데 시공권을 둘러싼 건설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올해 안으로 시공사 선정이 예상되는 용산구 한강맨션. 1971년 준공한 한강맨션은 국내 최초로 중산층을 위한 고급아파트로, 동부이촌동을 대표하는 주거단지다. 최근 용산구청이 ‘한강맨션 주택재건축정비사업 사업시행계획인가’를 고시하면서 5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털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강맨션 재건축 조합은 오는 13일 현장설명회를, 다음달 29일 입찰을 마감할 예정이다. 이어 오는 12월 30일 시공사선정총회를 열고 시공사를 선정할 계획이다. 

조합에 따르면, 한강맨션 재건축 사업은 기존 아파트·관리동 24개동을 허물고 35층 아파트·복리시설 15개동을 짓는 프로젝트다. 가구수는 임대 138가구를 포함한 1441가구로, 기존 660가구보다 781가구 늘어난다. 총 사업비는 9134억 원. 한강변을 접하고 있고 지하철 4호선과 경의중앙선 이촌역도 가까워 교통 입지 또한 좋다.

현재 입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업체는 GS건설과 삼성물산이다. 이들 건설사 외에도 다른 건설사도 참석할 가능성은 있지만 정비업계 상황을 고려하면 두 건설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

현재 GS건설은 카카오톡 채널에 ‘한강맨션 자이채널’을 홍보하고 있다. 삼성물산 또한 ‘톡톡 래미안 한강맨션’을 열어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GS건설이 한강맨션 시공권을 수주할 경우 인근 LG한강자이와 함께 이촌동 자이 브랜드 타운을 만들 수 있다. 일각에서는 GS건설이 용산구 한남3구역에서 외면 받은 헤리티지 브랜드를 내세워 경기 과천시 과천주공5단지 공략에 나선 것을 두고 한강맨션 재건축 사업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앞서 GS건설은 2019년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 수주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당시 GS건설이 제안한 브랜드 네이밍이 ‘한남 자이 더 헤리티지’였다. 당시 경쟁사들은 자사 하이엔드 브랜드 ‘디에이치’와 ‘아크로’를 들고 나왔지만 GS건설은 ‘그랑자이’를 쓰지 않아 GS건설을 지지하는 조합원들의 아쉬움이 컸다. GS건설은 과천5단지 재건축 수주전에서 또 다시 자사의 하이엔드 브랜드 ‘그랑 자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GS건설이 용산권 최대 재건축 사업인 ‘한강맨션’에 하이엔드 브랜드 ’그랑자이‘가 아닌 ’자이 더 헤리티지‘를 들고 나온다면 시공권 싸움에서 밀릴 것이란 분석이 업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GS건설을 지지하는 한강맨션 한 조합원은 “우리 단지에 GS건설의 하이엔드 브랜드 ‘그랑자이’를 적용 안한다면 삼성물산과의 2파전에서 밀릴 것”이라며 “네이밍이 아파트 퀄리티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조합원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 하이엔드 브랜드로 작명하게 되면, 그에 걸맞게 마감재와 조명, 커뮤니티 시설 등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동안 수많은 정비사업 현장에서 프리미엄 네이밍을 아껴 두려는 건설사와 쟁취하려는 조합원 간 줄다리기가 있어 온 이유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물산, 현대건설도 수주전에서 만나면 바짝 긴장했던 유일한 건설사가 GS건설이었다”며 “곳곳에서 도급액 증액을 두고 조합과 다툼을 벌이거나 인허가 소홀로 시공권을 박탈당하는 사태를 보면서 옛 명성이 아쉽다”고 전했다.

삼성물산 또한 한강맨션 시공권을 따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클린 수주’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정비사업에 특단의 대책 없이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고 전망한다.

앞서 삼성물산은 올해 도곡삼호와 부산 동래구 명륜2구역 재건축 사업 등에서 모두 단독 입찰을 통해 수주권을 확보했다. 삼성물산이 참여한 정비사업지 내에서 발생하는 법적 다툼 또한 수주전에서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강북 용산권의 최대 사업이 될 한강맨션 재건축 사업. GS건설이 하이엔드 브랜드를 사용할지, 또 삼성물산이 ‘시공권 확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단의 전략을 내놓을지 관련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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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월간조선 2006년 7월호 '위대한 世代의 증언, 주거혁명의 旗手 張東雲' 인터뷰 기사 발췌

 한강맨션의 역사적 의의

張東雲(장동운) 前 대한주택공사 총재는 한국인의 주거양식을 바꾼 인물이다. 1962년 서울의 한 채소밭에 국내 최초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를 세웠고,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강맨션 단지를 만들었으며, 현대식 아파트 분양제도를 고안해 냈다. 육사 8기생인 그는 야전공병 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死線(사선)을 넘나들었다. 5·16 때는 朴正熙(박정희) 장군의 2군사령부 직할 공병대대장으로 거사에 참여했다. 「혁명 주체」들이 政界(정계)와 官界(관계)로 진출할 때 그는 공병 특기를 살려 대한주택공사 총재로 두 차례 일하면서, 한국인의 주거생활을 바꾸는 「혁명」에 나섰다. 지난 2008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내 최초로 아파트 단지를 건설, 획기적인 주거문화 개선에 기여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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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東雲 前 총재가 1969년 한강맨션아파트 기공식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에게 사업전반을 설명하고 있다(왼쪽). 1970년 완공된 한강맨션은 프리미엄이 붙은 최초의 아파트이다. 사진=월간조선

 마포아파트를 성공시킨 張東雲 총재는 1963년 군사정부가 민간정부로 전환하면서 공화당 사무차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이듬해 金鍾泌씨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공화당에서 밀려났다.

  『金鍾泌씨가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주체세력 간에 알력이 생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는데 그때는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싸움이 대단했지요』  

  張東雲씨는 1968년 住公 총재로 되돌아오기까지 한국원양어업협회장, 서울신문 이사 등을 지냈다. 이 무렵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 위원장(1966년)으로 있으면서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李舜臣(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그는 1968년 청와대로부터 「住公 총재를 다시 맡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住公은 서민용 주택단지와 외국인(힐탑아파트), 공무원(공무원아파트) 등 특정계층을 위한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1970년 한강맨션 完工의 의미

張東雲 前 총재가 1969년 한강맨션아파트 기공식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에게 사업전반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1969년 아파트 건설 중흥기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강맨션(現 한강아파트) 건립이 바로 그것이다. 한강맨션은 중산층用 아파트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아파트 분양제도가 처음 도입됐고, 프리미엄이 붙은 최초의 아파트였다. 모델하우스를 지어 일반인에게 사전 공개했고, 계약금·중도금·입주금을 받아 일반인에게 분양했다.

  대지 2만3500평에 5층 건물, 23개동으로 27평형(144호), 32평형(258호), 37평형(198호), 51평형(40호), 55평형(20호), 점포 40호를 건설했다. 총 660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29억7200만원이 들어갔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규모의 건설공사였다.

  한강맨션 분양이 성공하자 민간 건설회사들이 앞다투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한강 모래사장 위에 200만원을 들여 32평짜리 모델하우스를 짓고, 800만원을 들여서 신문광고를 했습니다. 1000만원을 들여 시작한 게 한강맨션입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丁一權(정일권)씨가 「張총재, 꼭 봉이 김선달 같구먼. 한강 모래 팔아 돈 버는 것 같아」 라며 농담을 하더군요. 「住公의 공신력으로 집장사를 좀 해야겠습니다」하고 웃어넘겼지요』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제도를 도입한 배경이 뭡니까.

  『정부에 돈이 없으니 민간자본을 끌어들일 수밖에요. 5·16 혁명 이후 근대화·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중산층이 급격히 증가했어요. 중산층용 아파트가 성공할 사회적 토대가 마련됐다고 봤지요』

 일본 신문에 난 주택광고에서 힌트

  ─어디서 힌트를 얻었습니까.

  『한국원양어업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때 일본 신문을 보면 주택광고가 80% 가까이 차지했어요. 광고를 보고 중산층 아파트를 생각해 냈지요.

  住公 총재로 올 당시 수자원개발공사에서 한강변을 매립한 땅을 내놓았는데 安京模(안경모) 사장과 땅값으로 많이 싸웠습니다. 저로서는 싼 값에 구해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安사장이 평당 2만3000원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어음으로 구입했어요』

  ―1969년 무렵 일본의 경제력은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1964년에 올림픽을 치른 일본에서 성공한 아파트 분양이 한국에서도 성공할 걸로 자신하셨습니까.

  『일을 벌여 놓고 밤잠을 못 잤죠. 혹시 분양이 안 되면 시공업체들이 다 부도가 날 판이니까요. 분양을 촉진시키려고 住公 직원들에게 2만~3만원씩 활동비를 지급했습니다. 당시 2만원이면 좋은 양복 한 벌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어요. 「한강맨션이 분양되지 않으면 감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직원들에게 겁을 줬어요. 직급별로 책임분양을 유도했어요. 손님을 데려오는 데 드는 택시비, 점심값 조로 활동비를 지급했습니다』

  ―효과가 있었나요.

  『직원들이 죽기 살기로 뛰니까(웃음). 분양개시하고 두 달쯤 후 분양 신청자가 늘어나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분양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나중에는 국회의원들이 분양권을 달라고 청탁을 해와 골치가 아팠어요. 입주할 무렵 프리미엄이 100만원가량 붙었어요』

  姜富子씨의 증언

 張東雲 총재는 『탤런트 姜富子(강부자)씨가 한강맨션의 계약 1호이자 입주자 1호였다』며 姜씨를 소개해 줬다. 姜씨의 기억이다.

  『100만짜리 공무원아파트에 전세로 살다가 1969년에 한강맨션 27평형을 345만원에 구입했어요. 제가 살던 공무원아파트가 한강맨션 건축현장 인근에 있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모델하우스를 보고 마음에 들어 「꼭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때 한강맨션을 두고 「모래사장에 집을 지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시공사뿐만 아니라 住公 직원들이 현장에서 합숙을 하는 걸 보고 아파트 품질을 믿게 됐어요.

  당시 張총재를 건설현장에서 만났는데 「모래 위에 집을 지어 기적을 이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강맨션에 입주하니까 고은아, 문정숙, 패티김씨가 차례로 이사를 오더군요』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최초의 아파트다. 당시 시설투자가 과다하고 최신 기술이 필요한 방식이어서 시기상조라는 반대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張총재는 이 문제로 1969년 국회 국정감사장에 불려 나갔다.

  국회에 나간 그는 『국내 난방기술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고, 앞으로도 과감히 밀고 나가겠다』는 고집을 접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1972년 반포 1단지 아파트, 1977년 반포 2, 3단지를 건설할 때 순수 국내 기술만으로 난방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住公 역사의 산증인인 趙恒九(조항구·73) 前 住公 건설이사는 張총재의 「뚝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처음 住公 총재로 온 후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을 때 「저런 무모한 사람이 다 있나. 완전히 깡패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성공해 내더군요. 한강맨션을 지을 때 「국가기관이 호화로운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밀어붙였어요.

  그 덕분에 우리나라 건설산업이 탄력을 받아 꽃을 피운 겁니다. 張총재가 추진한 마포아파트, 한강맨션 건설은 「주택건설사업의 경부고속도로」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張東雲을 만나러 온 鄭周永

 한강맨션이 성공하자 민간 건설회사 사장들이 張東雲 총재를 찾아와 사업자문을 했다고 한다. 張총재의 말이다.

  『鄭周永(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 사무실로 저를 찾아왔어요.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 합디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鄭사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부지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鄭사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그 이후에 삼익주택, 한양, 라이프주택 등이 잇달아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張東雲 총재는 조립식 건물에도 관심을 가졌다. 조립식 건물은 저렴한 가격에 시공 기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8월 일본 大成建設(대성건설)과 합작해 住公의 子회사로 (주)한성프리훼브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에 金明植(김명식·78)씨를 임명했다. 金 前 사장은 張총재와 육사 8기 동기생으로 5·16 혁명 이후 住公에서 함께 일했다. 金씨의 설명이다.

  『張東雲 총재와 육사 8기 동기생이면서 같은 공병 출신이라 호흡이 잘 맞았어요. 한성프리훼브는 국내 조립식 건물의 역사를 시작한 회사입니다. 당시 조립식 건축 기술은 일본 大成建設이 세계 최고였는데 그런 회사와 합작했다는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어요. 당시 大成建設 혼마(本間) 사장과 엔도 요기치(連藤瀁吉) 부사장을 여러 차례 찾아가 「부탁 반, 협박 반」으로 합작을 요구했어요. 결국 일을 성사시켰습니다』

  金明植 前 사장은 『한성프리훼브에서 쌓은 기술력 덕분에 우리 기업이 中東(중동)에 진출해 큰 성과를 냈다』고 했다.

  『조립식 건축 기술은 中東 시장에 진출할 때 유리하게 작용했어요.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KKMC라는 프로젝트는 도시 전체를 조립식으로 짓는 대형사업이었어요. 공사비용이 11억 달러에 달했지요. 당시 삼환기업이 건설을 맡았는데 이 회사의 주요 간부와 기술진이 대부분 한성프리훼브 출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