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어렵고 외로울 때면 꼭 ‘마마보이’가 되고 싶었다”던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8년 작고한 노모(老母)의 팔순(2006년) 기념 문집(文集) 《어머니의 추억》(메디치, 2018)과 문형렬 작가와 나눈 대담집 《이낙연의 약속》(21세기북스, 2021)에서 어머니를 추억했다. 사진=조선일보DB

“낙연이, 이놈! 종아리 걷어라... 어서!”

밭일 나가셨던 어머니는 마당 한 편의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낙연이는 어머니의 매질에 아픔을 느끼기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보리 한 되 들고 간 것을 어쩌다 들켰을까?’ 보리가 담긴 항아리는 컴컴한 골방에 있었다. 복숭아와 바꿔먹으려 한 되 퍼내고 흔적도 감쪽같이 없앴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알고 계실까... “이놈, 왜 도둑질을 하느냐!” 7남매의 장남(長男)을 모질게 매질하는 어머니의 심정도 편치는 않았을 터, 어느덧 칠순(七旬)을 눈앞에 둔 아들은 아직도 ‘그때 그날’을 잊지 못한다. 여당(與黨)의 대선주자 이낙연(李洛淵)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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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표지 캡처

《동아일보》 민완(敏腕) 기자로 필명(筆名)을 날리던 이낙연 전 대표는 특유의 정연한 언변(言辯)과 간명한 글솜씨로 정계(政界) 입문 후에도 민주당의 단골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 시절에는 야당 의원들의 날 선 질의를 근엄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받아쳐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정권 방탄(防彈) 총리’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항상 ‘엄숙 모드’에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치밀한 언동(言動)의 소유자인 그도 전남 영광의 시골 부모님 앞에서는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아들내미였다. 특히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삶이 어렵고 외로울 때면 꼭 ‘마마보이’가 되고 싶었다”던 이 전 대표는 2018년 작고한 노모(老母)의 팔순(2006년) 기념 문집(文集) 《어머니의 추억》(메디치, 2018)과 문형렬 작가와 나눈 대담집 《이낙연의 약속》(21세기북스, 2021)에서 어머니를 추억했다.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어머니와 닮은 나... 그저 뵙는 것만으로도 위안받았다”

이 전 대표는 두 책에서 “어머니는 굉장히 긍정적인 분이셨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수가 적으셨다”며 “유머러스하고, 독특한 데가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노환이 와서 처음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독방을 주니 그때 어머니가 그러셨답니다. 여보시오, 내 독수공방 10년을 했소. 또 독방을 주시오? 그래서 6인실로 옮겼어요. 어머니다운 방법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이낙연의 약속》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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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6일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가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모친상을 치르며 조문객을 맞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앞서 유년 시절, 집안의 양식인 보리를 훔쳐 어머니께 회초리를 맞을 때도 이 전 대표는 어머니의 혜안(慧眼)에 감탄했다. 그는 “저의 보리 도둑질이 왜 들켰는지 저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며 “어머니는 도대체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아시는 걸까. 저도 아이를 키우는 아비지만, 저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같은 집에 사는데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저는 잘 모릅니다. 아이를 눈앞에 두고 봐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눈을 따라가려면, 저는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 그저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어머니의 짧고 일상적인 말씀, 제게는 너무도 익숙한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저는 격려를 받습니다. 제가 다시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요. 요즘엔 제가 어쩌면 ‘마마보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요즘 저는 차라리 마마보이가 되고 싶어졌습니다.〉(《어머니의 추억》 P.52, 54, 61)

맏아들 ‘정치 旅程’ “길게 봐라” 말씀하신 어머니... 그 깊은 心地에 격려받은 이낙연

이 전 대표는 “아버지와 제가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학식도 논리도 아닌 ‘심지(心地)’였다”며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위안과 격려를 받는 것은 어머니께서 감추고 계신 심지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런 어머니께서 2006년 5.31 지방선거 직후에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방선거는 제게 좋지 않은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번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채셨을까요? 어머니는 민주당 분당(分黨) 직후의 전화 이래 처음으로 제게 다시 전화를 거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길게 봐라.” 어머니께서 제게 전화를 거시는 것은 2~3년에 한 번 꼴입니다. 그런 통화마저도 한 문장으로 끝내십니다 ‘농축이라고나 할까요. 2~3년에 한 문장 외의 말씀은 모두 증발 또는 풍화시키시는 모양입니다.〉(《어머니의 추억》 P.64, 65)

어린 시절 이 전 대표는 가세(家勢)를 일으켜야 할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랐다. 생일이면 어머니는 시루떡에 불을 켜고 그의 앞날을 위해 한참이나 기도했다고 한다. 그만큼 본인이 느끼는 책임감도 컸다. 그는 “중학교 3년 동안 제가 일기를 썼다. 여름방학 때는 그 일기를 가지고 시골에 갔는데, 동생들이 그 일기를 다 봤다”며 “거기에 늘 장남의 책임감 같은 게 가득 차 있었다. 책임의 무게, 맹세, 그런 것이 굉장히 강했던 거 같다”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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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중학교 3년 동안 제가 일기를 썼다. 여름방학 때는 그 일기를 가지고 시골에 갔는데, 동생들이 그 일기를 다 봤다”며 “거기에 늘 장남의 책임감 같은 게 가득 차 있었다. 책임의 무게, 맹세, 그런 것이 굉장히 강했던 거 같다”고 떠올렸다. 사진=조선일보DB

“동생들은 자라는데 난 뭐 하고 있나”... ‘고시의 꿈’ 접게 한 長男의 무게, 맹세, 책임감

〈제대하고 나니까 한 친구가 저한테 제안을 했어요. 자기 월급 절반을 너한테 줄 테니 너는 법조인이 되라고. (편집자註: 이 전 대표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고시공부를 하라고 봐주겠다 하니 하숙을 했지요. 그런데 한 6~7개월 하다 보니까 도저히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 친구한테 부담감도 있지만 동생들은 자라는데 난 지금 뭐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친구에게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 (아버지는 법조인이 되길) 소으로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좀 달랐습니다. 법조인 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아니고, 당신이 살아보니 “남자 쓸 만한 놈은 공부 안 해도 다 먹고사는데 너는 못나서 공부나 해야 먹고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낙연의 약속》 P.33, 37)

이 전 대표의 고향 마을 선배인 부길준씨는 《월간중앙》 2017년 6월호에 “(당시 총리 후보였던) 이 후보자는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와 동생들을 위한 책임감이 남달랐다”며 “서민복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리더십은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하 이 전 대표의 생애를 다룬 지난달 6일 자 《중앙일보》 인물 기사의 일부분을 옮긴다.

〈1970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할 때 이 전 대표의 아버지는 “등록금은 어떻게든 보내줄 테니 먹고사는 것은 알아서 하라”고 선언했다. 이 전 대표는 청년 시절에 끼니를 자주 굶어서 “시체처럼 말랐었다”고 말했다. 몸무게는 50kg, 배꼽이 등에 닿을 정도의 24인치 허리였고, 영양실조 초기 증상을 겪었다. 잘 곳이 없어서 친구들의 하숙집을 돌아가며 며칠씩 묵었다고 한다. 청년 이낙연에게 “입대 영장은 숙식이 해결되는 탈출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해 카투사로 복무했다. 그는 “웃통을 벗었을 때 갈비뼈가 안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전역 후 친구의 지원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가 7개월 만에 포기했다. 그는 “고향에 있는 동생들에게 미안해 느긋하게 고시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양 이겨내고 의사가 된 외아들... “몸 아파도 밝은 얼굴에 애비로서 미안할 뿐”

이 전 대표는 전남 영광의 농부 출신 부모님 사이에서 4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가족은 10남매로 위로 두 명의 형을 둔 그는 삼남(三男)이었지만, 두 형을 포함해 형제 3명이 유명(幽明)을 달리해 장남이 됐다. 이 전 대표는 이후 미술 교사 출신의 부인 김숙희씨와 결혼, 슬하에 외아들 이동한씨를 뒀다. 이씨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본인이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라서일까. 외아들에 대한 이 전 대표의 부정(不情) 또한 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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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저서 《이낙연의 약속》 출판 기념회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아들이 의사가 된 남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신생아 때 결핵 예방 주사를 맞았는데 바로 결핵에 걸렸습니다. 우리 둘 다 맞벌이니까 처가에서 장모님이 아들을 여섯 살까지 키워주셨습니다. 결핵약이 독하고 양도 많아요. 한주먹씩 6년 동안 약을 먹고 자랐습니다. 대학 1학년 방학 때 미국 어학연수를 가서는 머리가 또 심하게 아파서 현지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뇌하수체 종양이었습니다. 공부 다 집어치우고 바로 서울에 돌아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에 앞서 주의사항을 들었는데 확률은 낮지만 죽을 수도 있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했어요. 아내는 그 말을 듣다가 기절해버렸지요. 수술실 밖에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근데 애비라는 놈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지요. 기도할 줄도 모르니 이건 인간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것이 훗날 교회에 나간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의 병은 재발이 잘 된다는데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전신마취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몸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그게 의사가 되는 계기였습니다.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잘 내색하지 않고 늘 밝은 얼굴이었어요. 그래서 더 미안하지요.〉 (《이낙연의 약속》 P.86, 88)

‘모든 분야에서 국민의 삶을 국가가 보호하겠다는 의지.’ 차기 대선에 출마한 그가 ‘국가비전’으로 내세운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는 이 같은 가족애(家族愛)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 전 대표는 “고단한 저녁을 서로 위로하고 내일 용기를 가지는 하루하루를 국민들게 선물하고 싶다”며 “차 한 잔 마시며 수다도 떨고, 친구 만나 술도 마시고, 가족들끼리 밥도 먹고. 일터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쉴 수 있는 일상의 회복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