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 입구의 표지석.

때는 바야흐로 6·25 전쟁이 격화(激化)하던 1952년 10월 초. 전년(前年)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停戰會談)으로 인해 피아(彼我) 간의 혈투(血鬪)는 고지(高地)마다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휴전협정(休戰協定)을 체결하는 시점의 전선(戰線)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아 남북의 땅을 가른다는 이유에서였다. 30만 발에 가까운 포탄(砲彈)이 떨어져 산등성이의 허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마치 달리는 백마(白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백마고지(白馬高地)’가 대표적인 격전지(激戰地)였다.

미국을 필두로 한 UN, 즉 자유세계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과 소련·중공(中共) 등 공산주의 세력을 뒷배 삼아 남침(南侵)을 강행한 북한. 좀 더 유리한 땅을 많이 차지하기 위한 양자 간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이 가장 치열하게 펼쳐졌던 곳. 후삼국(後三國)의 궁예 대왕이 고구려의 혈맥(血脈)을 이어 세운 나라 마진(摩震)과 태봉(泰封)의 왕도(王都)이자, 인민의 고혈로 독재왕조를 이룩한 북괴(北傀) 김일성이 탐을 냈던 곡창지대(穀倉地帶). 백마고지를 비롯한 고원(高原)과 평야(平野)에서 열전(熱戰)이 거듭됐던 6·25 최대의 격전지. 이제는 DMZ(비무장지대)가 지척인 국가 안보의 최전방(最前方)이자 남북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반도의 중심적 본토(本土)로 거듭난 바로 그곳.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을 《조선펍》과 《어린이조선일보》가 지난 10일 취재했다. 《조선펍》과 《어린이조선일보》가 ‘호국 보훈의 달’ 특집기획으로 현장 답사한 ‘호국영령(護國英靈)의 숨결’이 깃든 철원의 진경(珍景)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보자. (편집자 註: 사진 일체는 모두 기자가 현장에서 찍은 것이다.)

1. 백마고지(白馬高地): 뼈가 드러난 산등성이의 ‘우국충정(憂國衷情) 혼백(魂魄)들’이여

때 이른 무더위였다. 날은 흐렸으나 살갗에 파리처럼 달라붙는 습기가 땀을 빨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탄강의 시원한 바람이 인도한 백마고지(白馬高地)에선, 도착한 그 누구도 더위를 탓하거나 찡그리지 않았다. 저절로 기분이 숙연해지고 가슴이 차분해졌다. UN군과 중공군의 열흘간의 분투(奮鬪) 동안 무려 2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바로 그 해발 395m의 고지였다. 정확히는 현재 국군 GP(경계초소)가 지키고 있는 실제 고지 앞에 위치한 전적지(戰迹地) 기념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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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적지 초입의 백마상.

입구부터 일렬종대로 선 태극기가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군인의 기상(氣像)을 상징하는 백마상과 전적비(戰迹碑)가 방문객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전적지 중턱에는 중공군에 맞서 고지를 사수(死守)하다 산화(散花)하신 용사 844위(位)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慰靈碑)와 높이 솟은 위령탑(慰靈塔)이 세워져 있었다. 마침 현장에서는 ‘철원군 예림회’라는 민간 여성 단체가 호국 용사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다례제(茶禮祭)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 차림의 중년 여성들은 위령비에 차를 올리며 국군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있었다. 취재진 일행을 인솔한 현지 문화해설가의 말이다.

“이곳 백마고지에서는 말 그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요. 3400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했음에도 끝없는 아군의 분투로 1만5000명의 중공군을 섬멸(殲滅)하고 끝내 국토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포탄이 떨어져 나무는 물론이거니와 1m 깊이로 산등성이가 떨어져 나가, 허연 흙이 다 드러난 모습이 흰 말을 닮았다 하여 백마고지란 이름이 붙여졌지요. 고지전에서 용맹을 떨친 국군의 9사단은 후일 베트남전에서도 기염을 토하며 전승(戰勝)을 이끌었답니다. 전적지로 올라가는 길에 하얀 껍질이 눈에 들어오는 자작나무는 호국영령의 유골(遺骨)을 상징합니다. 죽어서도 백마고지를 지키는 용사의 혼백을 말해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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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적지의 전승 기념탑.

전적지의 제일 높은 지대에는 ‘백마고지 전승 기념탑’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물론 커다란 태극기가 허공에 그 위용(偉容)을 드러내며 펄럭이고 있었다. 이주섭 해설가에 따르면, 양손을 하늘로 길게 뻗은 듯한 형상의 기념탑은 실제 불행하고 비극적인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소망하는 인류의 간절한 두 손을 상징한단다. 물론 기념탑 안쪽 부분에도 힘차게 내달리는 백마의 뜀박질을 형상화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탑과 이어서 나온 ‘자유의 종각(鐘閣)’을 지나, 실제 백마고지와 국군 GP가 수호하고 있는 여타의 고지들을 조망할 수 있는 ‘DMZ 평화의 길’ 입구에 서니 너른 철원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녹음(綠陰)이 싱그럽게 자라난 숲과 더불어 농작물을 기르는 비닐하우스와 논밭은 평온한 기색이었다. 군사 통제 지역이라 그런지, 가끔 농사용 차량이 흙길을 오갈 뿐 인적도 드물었다. 이윽고 풀 내음을 머금은 나비 몇 마리가 낮게 날갯짓하며 취재진 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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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용사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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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적비.

겉으로 보기에는 동화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으나, 불과 몇백 미터 앞으로 조국의 자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목숨이 흩뿌려진 ‘피의 능선’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은 다시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너머 말 그대로 지척인 고원과 산기슭 사이, 북한이 강점한 우리 영토가 보이고 그곳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싸운 국군 용사들의 웅혼한 희생을 다시금 읽어낼 수 있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며, 평화는 전쟁을 강인하게 준비하는 나라와 민족에게만 허락되는 소중한 가치”라는 ‘안보 격언(格言)’을 실감하고 체화하는 순간이었다. 해설사는 전방의 백마고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바로 백마고집니다. 민통선(민간인통제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지요. 비무장지대는 현재 민정경찰(민사행정경찰, 비무장지대에서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사실상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 고지에는 우리 국군 1개 소대(小隊)가 GP를 요새(要塞)처럼 철통같이 수호하고 있습니다. 저기서부터 서해로 1㎞, 동해로 2㎞가량 이어지는 요지(要地)마다 북한 경계를 위해 GP 수십 곳이 늘어서 있지요. 

멀리 북한의 하회산이 보이죠? 저기서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5만 구의 시체가 나왔다고 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시신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물줄기를 타고 골짜기를 물들여 ‘피의 500능선’이라고도 부릅니다... 백마고지를 ‘민족의 상흔(傷痕)’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용사들의 핏값으로 지킨 ‘자유의 상징’이지요.”

서울에서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6·25 최대 격전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38선 너머 북한이 지척인 민통선 안쪽과 남방한계선 근접 지역을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자욱한 포연(砲煙) 속 아득한 전쟁 이야기가 온몸의 전율로 다가온다는 사실. 접전의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사실(史實)이 주는 안보의 엄중함과 역사의 무게감은 실로 대단했다.

2. 비무장지대(DMZ): 아연한 밀림(密林)에 ‘자유 일념’ 북진(北進) 용사의 피 냄새가 흐르노니

취재진 일동은 백마고지 인근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부터 철원군 시설 관리 사업소의 협조와 통제 아래 ‘DMZ 탐방’을 위해 차량으로 이동했다. 출입 차량에는 안보 견학을 증명하는 경광등을 부착해야 했다. 비무장지대 조망을 위해 민통선 안쪽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인 데다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출입 인원에 대한 군 당국의 검문이 엄격했다. 

일정한 절차를 밟아 진입한 ‘철원 평화 전망대’에서 전방 지역에 대한 안보 교육을 받은 후 해설사의 지도에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철원평야에서 저수지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촉촉하기보다 서늘했다. 민정경찰의 순시(巡視)하에 철저 경계가 이뤄지는 DMZ는 군사 기밀 지역으로 사진 촬영이 불가했으며, 본 기사에도 군사적 요로(要路)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하지 않았다.

전망대 옥외(屋外)에서 바라본 DMZ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짙푸른 천연(天然) 그대로였다. 빽빽하기 이를 데 없는 수풀과 나무에 한적한 물가까지 갖춘 그곳은 흡사 남미(南美)의 아마존 같은 원시림(原始林)을 연상케 했다. 금방이라도 원시인 궁수(弓手)나 날렵한 맹수(猛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철원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삼은 두루미 몇 마리가 고운 자태를 뽐내며 낮게 날았고, 그 뒤로 끝없는 적요(寂寥)가 계속됐다. 적막하고 고요한 밀림(密林)을 사이에 두고 경계 초소 간 남북의 대치는 삼엄하게 이어졌다. 날씨는 비가 내릴 듯 꾸물꾸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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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쪽 지역에서 DMZ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철원평화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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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인근 저수지 너머 철원 평야가 보인다.

현장에서 기자는 다시금 ‘힘과 힘의 대결로 팽팽하게 조성되는 긴장’이 곧 평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DMZ, 그곳은 단순히 희귀동물과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라나는 세계 문화적 생태계가 아니었다. 자유 수호의 일념으로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이룩하기 위해 전선을 넘나들었던 용사들의 피 냄새가 서려 있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안보의 공간’이었다. 우리가 무력하면 저쪽이 내려와 적화(赤化)의 서슬을 드러낼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일국의 평화는 ‘힘이 있을 때 지키는 것’이고, 강한 국방력이 뒷받침돼야만 유지되는 것임을 가슴에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현지 해설사의 말이다.

“역사 속 철원은 늘 변방(邊方)이었지만 ‘한반도의 양곡(糧穀) 창고’ 역할을 했기에 여러 나라가 노렸던 곳이지요. 북한의 김일성도 너른 철원평야를 보고 그렇게 탐을 냈다고 하네요. 남과 북 모두 확보하고 사수해야만 했던 요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기에 전투와 희생도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서부터 평양이 200㎞, 서울이 100㎞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북단이자 북측 지역에 궁예 왕의 옛 도성(都城) 터가 아직 남아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저 멀리 북측 지역의 고암산 기슭 아래에는 북한의 선전마을이 있습니다. 북한군의 막사(幕舍)로 쓰이고 있지요. 망원경으로 보시면 DMZ 너머 인공기(人共旗)가 펄럭이는 북한 초소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북한 지역과 군 초소를 제일 가까이, 직접 볼 수 있는 철원 민통선 안쪽 지역에는 준수하고 건장한 군인 여럿도 최전방 관람을 하러 왔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우리 민간인들이 평화를 만끽하며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사히 여기며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3. 월정리역(驛): 어느 초인(超人)이 철마(鐵馬)의 안장에서 일통천하(一統天下)를 호령하리오

곧바로 평화전망대 인근에 있는 월정리역에 도착했다. 남방한계선에 인접한 최북단 지역에 있었다. 현재 폐역(閉驛)으로 역사(驛舍)만 남아 있는 월정리역은 한때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簡易驛)으로 신탄리역의 바로 다음 역이었다. 깨진 등(燈)과 창문, 하얀 회벽(灰壁)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 너머에는 이미 녹슨 고철(古鐵)이 돼버린 기차의 잔해(殘骸)가 전시돼 있었다. 6·25 전쟁 당시 폭격(爆擊)을 맞아 해체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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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역에 전시된 옛 기차의 잔해.

그 곁에 있는 커다란 푯말에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히 들어왔던 바로 그 표어가 적혀 있었다.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 일제에 항거했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편(詩篇)처럼, 과연 우리 시대에 어느 초인(超人)이 있어 북한 김씨 왕조를 궤멸하여 ‘자유통일’을 이룩하고 철마의 안장 위에 올라 말고삐를 잡아당길 것인가. 눈앞의 평강고원을 내쳐 달려 저 북단(北端)의 개마고원까지 질주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지도자는 오늘날 배출될 수 있을 것인가. 해설사의 말이다.

“여기가 허가를 받고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마지막 길목입니다. 역사 옆의 바로 저 둑방을 넘어가면 그대로 DMZ로 연결되지요. 폭격을 맞아 부서진 이 녹슨 기차는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던 군용(軍用) 화물열차였다고 합니다... 이제 나가시는 방향으로는 일직선 도로가 나 있는데요, 유사시 (전투기들이 출격하는) 활주로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4. 노동당사(勞動黨舍): 허장성세(虛張聲勢)와 금잔미주(金盞美酒)에 취한 좌익의 ‘최후 만찬’

DMZ 안보 탐방을 무사히 마친 취재진은 민통선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위치한 북한 노동당사(勞動黨舍)를 마지막으로 관람했다. 처음에는 북한 1인 독재 왕조를 떠받치는 좌익 졸개들의 소굴인 조선노동당사가 우리 영토에 버젓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다시금 이해가 갔다. 해방 이후 전쟁 전까지 ‘38선 지정’으로 남북이 갈릴 때, 당시 38선 너머 위치한 철원은 김일성의 치하(治下)였다고 한다. 적치(敵治)하에 있던 지역이니 북한 괴뢰들이 제멋대로 건물을 짓고 인근 주민들을 현혹·탄압해왔던 것이다.

지금은 외벽과 골조(骨組)만 남은 이 커다란 서양식 건물은 당시만 해도 위용(威容)이 그럴듯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던 김일성의 사상무장(思想武裝) 교육시설이자 개인 연회장으로 이용됐다고 한다. 김일성이 직접 와서 당원들을 위무(慰撫)한 것도 3~4번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서 북괴들이 인민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빨아들인 고혈(膏血)로 축배를 들어 금잔미주(金盞美酒)를 마시고, 거짓부렁에 가까운 허장성세(虛張聲勢)로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고 생각하면 분연히 가슴 속에 분노의 불길이 인다. 현지 해설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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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사 외벽.

“여기 노동당사는 작은 벽돌을 기둥처럼 쌓아 올린 일명 ‘소련식 공법’으로 만든 건물입니다. 당시 군수물자로 철(鐵)이 많이 쓰여 건물에까지 철근을 많이 쓰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보이는 철근들은 이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후대에 지지대로 삼은 것입니다. 노동당사는 북한 김일성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철원 지역 일대를 관장하기 위해 세운 건물입니다. 

저기 보이는 네모난 구멍들은 복층 구조를 만들기 위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끼웠던 흔적이지요. 당시 공산당들은 자기네들이 우리 국민보다 더 잘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당사에 수도시설을 만들어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노동당사에 깃든 김일성의 야심은 6·25 개전(開戰) 이후 반파된 건물처럼 허물어졌다. 건물 뒤편이 연합군 탱크의 포격과 전투기 폭격을 맞아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이다. 그렇게 국군과 UN군에 의해 철원은 수복되고 당사에 있던 공산 좌익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됐다. 연회를 즐기던 북괴들은 ‘최후의 만찬’을 맞은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당사 외벽은 언뜻 흉물(凶物)처럼 보이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관리 아래 후세의 교육용으로 유지되고 있다.

5. 떠나는 길: 태극기와 새마을기는 말한다 “북괴(北傀)는 결코 철원을 지켜낼 수 없었도다!”

철원에 입성하는 길목과 나가는 요로마다 한탄강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숭고한 태극기와 든든한 새마을기였다. 38선 분단 이후 개전 직전까지 철원은 북괴의 손아귀에 있었다. 인민들이 공산의 거짓에 놀아났고, 죄없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인간의 모든 기본권이 철저히 파괴됐다. 그러나 광신(狂信)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지를 향한 끝없는 국군의 전진, 포격과 포탄 세례를 뚫고 진격하던 우리의 선조 용사들, 한반도의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 어른 세대가 있었기에, 북한은 철원을 결코 지켜낼 수 없었고 다시 빼앗지도 못했다. 선대의 한없는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철원은 온전히 대한민국의 당당하고 자유로운 영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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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전망대 부근에 전시된 실전 탱크.

그리고 이어진 민족 중흥과 조국 근대화의 역사, 온 국민이 함께했던 새마을운동의 발전상이 ‘한강의 기적’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문명 국가로, 경제 강국으로,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거듭난 대한민국은 아직도 철혈(鐵血) 김씨 왕조가 이어지고 있는 북한을 전 국력(國力) 차원에서 압도하게 됐다. 침략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을지언정, 당시 전쟁의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한반도 최후의 승리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몫으로 돌아갔다. 

국방과 안보의 고장 철원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새마을기는 말한다. 아니 증명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내고 발전시켜온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온 국민들이 있는 한, 북한은 결코 우리 대한민국을 이길 수 없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가 민주화되어 끝내 한반도에 ‘최후의 평화’가 찾아오는 자유통일의 그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