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홍위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천안문 광장 앞을 사열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과 책에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와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각각 2위로 선정되었다고 경향신문이 2007년 보도했다. 2012년 12월 리영희 교수가 타계했을 때 좌파 언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은 ‘실천하는 지성’ ‘사상의 은사’로 고인을 추모했다. 백낙청은 조사에서 “고인이 살던 시절은 비록 험난했으나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고 이를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던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 나는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공산당은 악(惡)이고, 이를 따르는 무리들은 상식적인 도를 넘어서는 비도덕적 인물일 것이라는 게 당시 내가 알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리영희의 책에서 본 마오쩌둥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한 ‘인류 최초의 위대한 실험’이었다.
   
   
   “나는 리영희 추종자 중 하나였다”
   
   리영희와 만남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자본주의의 온갖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나라, 공산주의 나라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리영희의 안내에 따라 숭고한 이상을 향한 혁명적 실천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백낙청의 말대로 리영희를 따라나선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여 이의 실천에 나선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나의 청년 시절 공산주의자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동안 나의 사상과 이에 입각한 실천은 도전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 공산권들의 연이은 붕괴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나라들은 내가 알던 이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토록 경멸했던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더욱 심한 인권 탄압과 부정과 독재로 일관된 최악의 나라들이었다. 그즈음 탈북자들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탈북자의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실상은 더욱 충격이었다. 마지막 결정타는 황장엽씨의 탈북과 그의 증언이었다. 북한은 책에서 본 나라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의 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참혹한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탄압, 최악의 식량난,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최악의 1인 통치, 독재국가 그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겼던 믿음과 너무나 다른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즈음 다시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해 공부했다. 리영희의 안내는 거짓이었다. 그는 ‘실천하는 지성’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우리에게 안내한 ‘잘못된 안내자’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혁명과 그를 위한 헌신과 실천은 통째로 부정당했다. 나는 잘못된 안내자를 따라 잘못된 길을 나선 ‘저능아’였다.
   
   
▲ ‘전환시대의 논리’와 ‘대화’

   문화대혁명은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조정’에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과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당시 쿠바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외국어대 안경준씨의 글을 인용하여 ‘중국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즉 문화대혁명에 대해 두 가지 평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잘못 평가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류 최초의 인간의식 개조 혁명이었다. 리영희는 이어 한 서방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 혁명은 못했다. 마오쩌둥은 공업화와 인간 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놓고 있다. 이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이고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의 평가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이상인 평등사회 실현을 위한 노력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1977년 발행된 ‘우상과 이성’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 현지의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마오쩌둥의 ‘인간성 개조’ 노력은 실패했고, 중국 인민들에게 거부당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이 강압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인간적 방법으로 진행되어 스탈린의 무자비한 정적(政敵) 탄압이 아니라고 했던 리영희의 강변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책 실패로 권좌에 물러난 후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순진한 젊은이들을 동원한 최악의 정적 숙청이었다. 나이 어린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정적 제거와 권력 찬탈이 이루어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건물 2층에서 내던져졌다. 그는 평생을 불구자로 지내야 했다. 당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광장에 끌려 나와 다중 앞에서 인간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수모와 폭력을 당해야 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사망했다.
   
   
▲ 리영희

   “그는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미국의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저서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에서 문화대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서술하고 있다. “‘우익분자’ ‘봉건잔재’ ‘뱀과 괴물’ ‘자본주의 노선을 주창한 당국자들’이라는 애매모호한 규정만으로 폭력이 자행되었다. 거리마다 마오 주석이 말한 유명한 어록이 게재되었고, 교차로와 공원마다 확성기가 설치되어 마오쩌둥의 사상을 방송했다. 각 가정은 물론이고 열차와 버스, 자전거와 택시에도 옆면에 마오쩌둥의 사진을 붙여야 했다. 열차와 버스의 검표원들도 마오쩌둥의 사상을 외워야 했다. 문화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집단폭력 현장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리영희는 2005년 발간된 ‘대화’에서 자신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찬한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내가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더구나 남한 같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는 누구나 그랬지요.… 나 개인으로는 겹겹이 제한된 상태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었어요. 도대체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하며, 그것이 운동의 발전법칙상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가 하는 점을 완전히 파악하기조차 정말 어려웠으니까.”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강변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가 문화대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한지 등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말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는 이전 그의 글에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스탈린의 물질제일주의를 넘어서는 인간 개조 혁명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던가. 양동안 선생은 “지식인이란 정확히 알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식인을 설명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 몰랐던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던 ‘실패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에 끌려나온 사람들. ‘고집 센 주자파’ ‘대반역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photo 뉴시스

   “그는 끝내 진실을 외면했다”
   
   리영희는 중국이 개방되고도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변명대로 1970년대 당국의 탄압 때문에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1990년대 민주화된 정부 아래 마음만 먹었다면, 중국을 방문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든지 관계자, 학자, 젊은이들을 만나 당시의 상황과 전모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과 마주하는 정직한 태도가 지식인의 필수 덕목이다. 사실이 그에게 불리하고,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정직히 마주해야 한다. 리영희는 중국을 방문하여 자신이 주장했던 인류 최초의 인간 개조 혁명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그것이 정직한 지식인의 태도다.
   
   리영희가 왜 중국을 방문하여 문화대혁명을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는 그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실천적 행동양식에 공감했다고 리영희는 말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것이다. 추종자에게 비판적 성찰은 없다. 리영희의 활동 목적은 지식인의 성찰적 활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중을 향해 공산주의를 선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리영희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전모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리영희는 공산주의에 대한 추종을 거두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회와 혁명가 마오쩌둥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지지가 그를 사실과 멀어지게 했던 것이다. 소련이 멸망하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세기적 사건 앞에 그는 여전히 공산혁명가를 자처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혁명을 못내 아쉬워했다.
   
   리영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옳았다. 그의 변명대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가 밝혀진 다음 그가 보여준 변명과 태도는 올바른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잘못된 자신의 글로 인해 평생을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한 후학(後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된 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