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의 개국은 왕씨의 나라를 이씨의 나라로 바꾸는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 역성혁명론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이론적 배경과 당위성을 부여했던 인물이 정도전이다.

조선 개국 전의 고려 말 상황은 국운이 바닥으로 기울어가던 터였다. 원(元)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펼치던 공민왕의 사후, 고려왕조는 군왕다운 군왕이 부재한 상황이 이어졌다.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던 권문세족은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일부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광대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귀족들이 몽땅 토지를 강탈해가는 바람에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내몰렸다. 성리학적 이념을 숭상하는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비참한 현실에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도전은 고려왕조 체제로는 더 이상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해 역성혁명을 통한 왕조교체를 꿈꿨다. 하지만 변변한 벼슬이나 권력도 없던 아웃사이더 지식인이 홀로 혁명을 시도하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그의 꿈을 실현하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 바로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 때부터 조상 대대로 원의 지방관을 해오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 가문은 부원(附元: 원나라에 붙음) 세력에 속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이 고려 이주민 차별정책을 취하면서 원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무렵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反元) 정책을 펼쳐나가던 참이었다. 이자춘에게 반전의 기회가 왔다. 1356년 공민왕을 도와 원이 동북면(함경도 일대)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이다. 이 전투에는 이성계도 참전했다. 이자춘은 공적을 인정받아 동북면을 책임지는 병마사로 임명됐다. 자연스레 부원 세력이라는 꼬리표도 떨어졌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이 병사한 뒤 그 지위를 이어받았다. 특히 1362년 원이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보낸 장수 나하추의 대군을 격퇴함으로써 고려 조정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전국적인 무명(武名)을 얻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

원·명 교체기 격동의 시대에 등장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할 무렵인 14세기 중반, 고려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국제질서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원(中原)에서는 명나라가 세력을 일으켜 원나라를 위협하고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원의 쇠약을 틈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발호하면서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다. 혼미한 국제정세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유발했다. 그런 시대상황은 무인(武人)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부터 30년 이상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힘겨운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동북면의 이성계를 찾았다. 그는 단 한번도 패전한 적이 없는 승리의 화신이자 맹장(猛將)이었다. 활을 다루는 능력은 신궁(神弓)에 가까웠다. 고려 최고의 장수 타이틀은 그의 몫이었다. 백전백승의 이성계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전쟁은 장수 한 명의 무용(武勇)이 뛰어나다고 해서 승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군사들도 용맹하고 기강이 잘 잡혀 있어야 한다. 그런 군사들이 있더라도 승전을 거두려면 장수의 전략과 전술, 리더십이 탁월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어떻게 군사를 조련했을까. 동북면 토호(土豪)였던 이성계의 부대는 기본적으로 사병(私兵)을 기반으로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성계가 거느린 부대의 구성원이다. 이성계에게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의형제가 한 명 있었다. 여진족 출신의 용맹무쌍한 이지란(퉁두란)이 그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전쟁터에서 찰떡 호흡을 과시하면서 매번 승전고를 울렸다. 훗날 이지란은 고려에 귀화한 후 이성계의 조선 개국 과정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성계 부대에는 이지란 말고도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여진족 등 이민족이 제법 편성돼 있었다. 다민족 혼성 부대였던 셈이다.

이성계는 이민족에게 관대했다. 오랫동안 북쪽 변방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일찍부터 여진족, 몽골족, 한족 등 이민족을 겪어봤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여진족 상당수는 원나라 때 동북면 일대에서 정주(定住) 생활을 했다. 동북면의 맹주였던 이성계는 여진족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에도 여진족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국경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을 귀화시킴으로써 잠재적인 불씨를 미리 제거하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이성계는 여진족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문호를 열어 귀화를 장려했다. 그의 이민족 포용정책은 조선 개국 초기 정치·경제적 안정에 적잖이 기여했다. 오늘날 다문화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겸손한 처세술로 두터운 신망 쌓아
이성계는 전형적인 무장 스타일과는 좀 다른 품격의 소유자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명종·선조 때 문신 이정형이 고려 말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정치와 명신(名臣)의 행적을 기록한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는 예의로써 부하를 대해 주변의 신망이 두터웠다.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고 싶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항상 겸손하게 처신했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정도전, 조준, 남은을 비롯해 성리학을 숭상하는 신진사대부 다수가 이성계 주변에 몰려든 데는 그의 인품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성계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1383년 정도전은 동북면 함주로 향했다. 이성계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친원(親元) 정책을 내세우던 조정 대신들에게 맞서다 유배형을 받은 지 8년이 지난 때였다. 불우한 지식인 정도전은 기나긴 유배생활 동안 갈고 닦은 사상과 신념을 실현시키고 싶었다. 그는 기강이 잘 잡혀 있는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북면 도지휘사인 이성계를 만나서는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며 뼈 있는 말을 건넸다.

이 만남은 조선왕조 개창의 첫 단추를 꿰는 운명적 회동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성계의 군사력과 리더십이 정도전의 사상 및 이념과 결합하면서 ‘혁명무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성계는 정도전을 제대로 알아봤다. 유비가 제갈량을, 한(漢) 고조 유방이 장량을 책사로 기용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이성계는 정도전의 출중한 능력과 원대한 비전을 단숨에 꿰뚫어본 것이다.

훌륭한 군왕이 되려면 용인술을 갖춰야 한다. 인재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주군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게 돼 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는 짧은 만남에서도 정도전의 왕재(王才)를 알아챌 만큼 인재를 간파하는 안목이 높았던 셈이다.

글로벌 경영컨설팅업체 헤이그룹은 리더십의 유형을 비전형, 친화형, 민주형, 솔선형, 육성형, 지시형의 6가지로 분류한다. 특히 높은 성과를 내는 리더는 6가지 리더십 유형 중 3가지 이상을 혼용하는 게 특징이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맞춤형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헤이그룹의 리더십 분류법에 따르면 이성계는 비전형, 친화형, 솔선형 등 여러 유형에 두루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리더십은 한 가지 유형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조직은 언제나 다양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적절한 리더십 방식을 취사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탄력적이고 융통성 있는 리더십 스타일이 진정한 리더를 만드는 셈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었던 이성계 리더십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비전(vision)형 리더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전형 리더십은 조직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가장 부합하는 리더십이다. 정도전 역시 웅대한 비전의 소유자였다. 그런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왕사(王師)로 모신 것 자체가 이성계의 비전형 리더십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지난 2011년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식 행사 모습.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임금이 정사를 돌보던 근정전 명칭은 이성계의 왕사 정도전이 작명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왕사로 기용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하는 새 왕조 개창의 비전과 명분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 핵심에는 토지제도 개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도전은 소수 권문세족이 독식하고 있던 토지를 환수해 백성 수대로 나눠주는 이른바 ‘계민수전(計民授田)’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토지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성계는 동북면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토지개혁론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귀족만 배부른 나라 고려와의 차별화를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전략적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몫을 내려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의 그릇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1388년 고려 우왕은 수문하시중 최영과 함께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고려 영토인 철령 이북 땅에 ‘철령위’라는 직할지를 설치하려 하자, 그에 정면으로 맞서 반격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4가지의 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골자는 전쟁을 치를 때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밀어붙였다. 마침내 5만여명의 요동정벌군이 출병했다. 우군도통사 이성계,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정벌군의 진로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이른바 위화도 회군이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왕명을 거역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엄청난 번민을 했을 것은 불문가지. 이성계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고, 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결과로 이어졌다.

1389년 고려 창왕 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됐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토지제도 개혁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당초 정도전이 주창했던 계민수전 방식의 토지개혁보다는 온건한 절충안이었다.

과전법은 귀족들의 사전(私田)을 혁파해 전국 토지 대부분을 국가의 수조지(收租地 : 조세를 받는 땅)로 재편하는 것이 골자였다. 고려는 농본(農本) 사회였다. 국가경제의 중심이 농업이자 국가운영에 필요한 세원(稅源)이 토지였다. 과전법 실시로 농민들은 귀족에게 빼앗겼던 경작지를 돌려받게 됐고, 국가는 세수 증가로 재정적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고려 기득권 세력은 세금 한푼 안내고 막대한 치부(致富)를 가능케 했던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새로운 경제 시스템 도입은 새로운 국가 출범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과전법’ 실시로 권문세족 경제력 박탈
이성계는 용맹하고 과단성 있는 무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침착하고 신중한 분별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함으로써 단숨에 국가권력을 틀어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공인이었다. 반대파의 주장에도 귀를 열어두고 민심도 세심하게 살폈다. 단지 권력욕에만 눈이 멀어 정권을 찬탈하는 부류의 속물은 최소한 아니었던 것이다. 천명과 민심이 무르익을 때까지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지 4년 후인 1392년(공양왕 4년) 7월17일, 마침내 이성계는 천하를 호령하는 군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시중 배극렴 등 문무백관의 추대를 받는 한편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는 형식이었다. 외견상으로는 평화로운 수평적 정권교체의 모습이었다고 할까. 이듬해 이성계는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꿨다. 명실상부한 새 왕조국가의 출발이었다.

조선의 통치규범과 법제는 이성계의 왕사 정도전의 머리에서 체계화됐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했다. 왕도정치는 무력과 강압에 의한 패도(覇道)정치와 달리 인(仁)과 덕(德)에 의한 순리의 정치를 말한다. 맹자의 핵심 정치사상이 바로 왕도정치다.

정도전이 당초 이성계를 새 왕조의 군왕 감으로 지목한 것은 그가 막강한 군사력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안는 덕망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애초부터 왕도정치를 조선의 통치방식으로 정해뒀던 것이다.

정도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군주는 나라의 어버이 구실을 하고 실제 정사(政事)는 현명한 재상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조국가가 대대로 성군(聖君)만을 배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무절제한 폭군이나 무능한 군왕이 옥좌에 앉을 수도 있다. 비록 왕조국가이지만 성리학적 이념을 지속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관료중심 시스템정치를 도입하려 했던 정도전의 구상은 그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정도전의 정치구상은 어찌 보면 왕권을 제한하는 듯한 내용을 담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창업동지이자 왕사인 정도전에 대한 신뢰가 바윗돌만큼 단단했다. 모름지기 용인술의 요체는 ‘의심스러워 믿지 못할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아야(疑人勿用 用人勿疑)’ 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는 참모 정도전과의 관계를 신뢰와 위임의 리더십으로 다졌던 셈이다.

조선의 3대 정치이념은 숭유억불, 농본주의, 사대주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은 이념적 동지였던 것이다. 이 3대 정치이념은 500여년 조선왕조의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뼈대가 됐다.

혁명파 신진사대부와 이념적 동지 관계
이성계는 즉위 2년 뒤인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했다. 새로운 나라의 기풍을 진작하고 민심을 일신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궁궐 건립 공사는 1393년에 시작해 1396년에 마무리됐다. 한양 천도 사업의 총사령관은 정도전이었다. 이성계는 궁궐 공사 기간 중에 한양의 행궁으로 거처를 옮겨 현장 관계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재위기간(1392~1398)은 짧았다. 군사 및 정치 분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절차탁마한 데 비하면 아쉬움이 남을 법도 하다. 더 큰 아쉬움은 스스로가 재위기간을 단축하는 결정적 패착을 뒀다는 점이다. 그는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던 5남 방원을 외면하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어린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 결정은 훗날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는 참담한 일의 불씨가 됐다.
5남 방원은 1398년 자신의 사병을 동원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세자 방석을 밀었던 정도전을 제거한 데 이어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마저 살해했다. 이성계의 와병 중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성계는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의 정치스승이자 최측근 창업동지였던 정도전은 물론 두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황망함과 처연함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지만 대세는 이미 아들 방원에게 넘어가 있었다. 천륜을 거스른 아들이 아무리 미워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성계는 권력 때문에 벌어진 골육상잔을 보고는 인생무상을 느꼈고, 결국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2년 뒤에는 방원(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히 깊었지만 결국에는 방원의 왕권을 인정해줬다. 자신이 세운 왕조의 안녕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년에는 불교에 정진하면서 조용하게 염불삼매(念佛三昧)의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창덕궁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는 세자 책봉 과정에서 우를 범함으로써 불우한 노후를 보내기는 했지만, 474년간에 걸친 고려왕조를 허물고 500여년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당대의 영웅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참고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을 말하다>, <왕의 리더십>, <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 <정도전과 그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