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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첫 본격 인터뷰] 김응룡 전 야구감독

“ DJ(金大中)가 대통령이 되고 딱 그다음부터 광주 야구장에 관중이 안 오더라고.”

“그라운드를 떠나서 보니까 나를 해태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70~80%이고, 나머지는 삼성 감독이야. 한화 감독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 신기해.”

⊙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최다, 최고, 최초’ 등 수식어 가장 많이 단 감독
⊙ 한국시리즈 ‘V10’에다, 삼성 사장 시절 우승 횟수까지 더하면 ‘V12’
⊙ 선수들 “잘하거나 이긴 날에 오히려 화를 내는 감독”으로 기억
⊙ “한화·삼성·KIA 3팀 중에서 한 팀이 우승하면 좋겠어”

金應龍
⊙ 75세. 한국운수·대한통운·한일은행 선수.
⊙ 국가대표 선수(1961~72), 한일은행 야구감독(73~81), 국가대표 감독(77~80),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2000), 해태 타이거즈 감독(83~00),
삼성 라이온즈 감독(01~04), 삼성 구단 사장(04~10), 한화 이글스 감독(13~14).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 기자 2015-06-19 12:49

  ‘우승 제조기’ ‘우승 청부사’ ‘야구장의 마에스트로’라 불렸던 김응룡(金應龍·75) 전 감독. 2013~14년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하면서 찬사가 무색하게 됐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名將)이다.
 
  야구 그라운드에서 그만큼 이긴 장수(將帥)도 드물지만, 한화 감독 2년의 기억은 그에게나, 그를 믿었던 팬들에게나 충격이었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의 생애는 어둠보다 빛이 훨씬 많아 보인다. 말년의 ‘어둠’이 그의 인생을 좀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나보니 ‘빛’의 시절(해태·삼성 감독)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늘 긴장과 경쟁 속에서 초조하게 살았던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 5월 7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뤄졌다.
 
  ―집에 야구 관련 자료가 엄청나지요?
 
  “그런 것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사진도 하나 없어. 기자들이 다 가지고 가버려서. 내가 야구 해서 훈장 3개를 탔거든. 그것도 야구박물관의 ‘명예의 전당’에 필요하다고 해서 그냥 줘버렸어.”
 
  ―훈장은 언제 탄 건가요? 대륙간컵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때인가요?
 
  김응룡 감독은 1977년 대륙간컵 대회 준결승에서 일본을 3대 2, 결승에서 미국을 5대 4로 이기고 우승했다.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건 두 번째고 첫 번째는 65년도. 그때 석류장 타고, 동백장 타고, 몰라 하여튼 3개 받았어.”
 
  (인터뷰가 끝나고, 여러 자료를 뒤져보니 1971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탄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7년 두 번째 훈장은 체육훈장 백마장이었다. 현역감독 시절, 한국시리즈 10차례의 위업을 달성할 만큼 우승을 밥 먹듯 해서인지 디테일한 수상의 설명엔 둔감했다.)
 
  ―기사 쓸 때는 구체적으로 (훈장내역을) 써야 할 텐데.
 
  “훈장도 써야 돼? … 석류장, 동백장, 그리고 하나 뭐였더라? 아이고…. 한참 프로야구 할 때인데 뭐였더라. 응. 기린장, 기린장!”
 
  ―기린장은 어떤 공적으로 받았나요?
 
  “그거이 뭐, 모르겠어.”
 
  평안도 사투리가 툭 튀어나왔다.
 
  “프로야구 감독 할 때 주더라고. 점수가 돼가지고… 올림픽 가서 동메달 따고 점수가 돼서… 감독들에겐 메달을 안 주니까 대신 훈장을 준 것 같아.”
 
  김 전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야구대표팀 사령탑으로 출전, 야구 종목 최초로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당시 대표팀 코치는 강병철·김인식·주성노였고, 선수는 이승엽·구대성·정대현·정민태·박재홍·김동주 등이 주전으로 뛰었다. 이듬해 2001년에는 세계야구연맹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화 2년 그거이 지우고 싶은데. 하하하”
 
해태 감독 시절 김응룡.
  ―여러 이력 중에서 ‘야구선수 출신 최초의 CEO’라는 직함도 빼놓을 수 없지요.
 
  그는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18년(9번 우승)을 이끌다가 ‘감독들의 무덤’이었던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2001년 부임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거이 잘못된 거지.”
 
  ―네?
 
  “그거이 잘못이라고.”
 
  ―왜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되는데 그놈의 사장 때문에… 영, 하하하.”
 
  다분히 겸사(謙辭)의 표현이었다.
 
  “사장 하니까 재미있었어요. 아이고, 피곤은 한데, 만날 그라운드에서 유니폼 입고 생활하다가 넥타이를 매니 죽겠더라고. 경조사 참석하고… 우린 그냥 운동장에서 야구만 했잖아. 그런데 사장 되고부터는 구단 대표로 일일이 다 가서 인사해야 되잖아. 심지어 군청 소재지며 시골까지 다 다녔네.”
 
  ―한화 감독 2년의 ‘실험’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시간이 좀 흘러야 될 것 같아요.
 
  그에게 그 2년은 실험일까, 도전일까?
 
  “그래서 내가 그만두고 오늘 처음 인터뷰하는 거야. 한화 2년 그거이 지우고 싶은데. 하하하.”
 
  ―지울 수 있나요, 어디….
 
  “내가 한 것은 트레이드밖에 없어. 좋은 투수 하나도 못 잡고. 변명 같은… 그래서 내가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해. 그게 류현진이 기둥 아냐? 나도 순진했지. 새로 부임하는 감독에게 (메이저리그 진출 여부를) 맡긴다고 했잖아. 현진이가 기둥이기에 어떻게 뭐, 주물럭거리면 안 되겠나 했는데 내가 가니까 내 권한은 이미 떠났더라고. FA 투수 두 명은 선수로 잡아준다고 약속했는데 안 돼.”
 
  ―당시(류현진이 한화를 떠날 2013년 무렵) 국내 FA투수 중에 누굴 잡고 싶었는데요.
 
  “대형 선수는 없었지만 몇 명 있었어. 투수가 약하니까 안 되더라고. 초장에 무너지니, 야구는 투수가…(좌지우지한다는 걸) 새삼 느꼈어. 선발이 4~5회는 끌고 가야 하는데 이건 뭐 1~2회 때 7~8점씩 주고 무너지니까 그래서 내가 (한화 얘기는) 안 하려고 하는데,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농사짓고 있는데….”
 
  ―농사짓는다고요?
 
  “농사짓지. 요 며칠 전에 양준혁이 하고 색시하고 와서….”
 
  ―김은아씨 말인가요?
 
  야구인 양준혁과 탈북녀 김은아씨가 부부로 나오는 TV조선의 가상결혼 프로그램 〈남남북녀〉에 김 전 감독이 출연한 모양이었다.
  
   
  
  “농사나 짓고 《월간조선》이나 읽고…”
 
1997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9승(83년, 86~89년, 91년, 93년, 96~97년)을 달성할 당시의 신문기사.
  ―어디서 농사를 짓나요.
 
  “집 부근에 땅이 있어요. 양준혁이 경운기를 가지고 와서 한 1000평을 일궜어. 그날 고구마, 토마토, 오이, 강냉이 많이 심었어. 감자는 한 달 전에 내가 심었고. 양준혁이 힘 좋더라고. 땅 다 합치면 2000평 되는데 일군 것은 1000평이야. 나머지는 묵혀뒀어. 매일 나가서 일하니까 하루가 금방 지나가. 봄이 되니까 너무 좋아. 겨울엔 죽겠더라고.”
 
  ―겨울엔 왜요?
 
  “갈 데가 없어서. 용인 주변 구립도서관 4곳을 순회하면 일주일이 다 지나가. 부성도서관, 포곡도서관, 용인시청 앞 중앙도서관, 동백도서관… 매일 가면 눈치 보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그래야 가끔 온다고 하지. 하하하. 《월간조선》이나 《신동아》도 읽고 소설도 읽고.
 
  만날 마누라 눈치 봐. ‘3식(食)’이 안 하고 ‘2식’이만 해. 옛날 야구감독 할 때는 한 달에 몇 번밖에 안 보니까 집에 가는 길이 그저 설레었지. 항상 신혼 분위기였어. 하하하.”
 
  ―밖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지요?
 
  “그라운드를 떠나서 보니까 나를 해태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70~80%이고, 나머지는 삼성 감독이야. 한화 감독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 신기해.”
 
  ―그럴 리가. 2년(2013~14년)이나 하셨는데.
 
  “해태 팬이 많긴 많아. 삼성에서 감독 4년, 사장 6년을 했는데 그래도 10명을 만나면 8명은 해태 감독으로 기억하고, 2명은 삼성 감독, 한화는 아직까지 없어. 한화 팬들이 들으면 섭섭해할라.”
 
2003년 10월 2일 삼성 이승엽 선수가 56호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치고 난 후 김응룡 감독의 축하를 받고 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 통산 몇 승 하셨어요.
 
  “그거이 몰라. 1500 몇 승 했을 거야. 작년에 기념패 하나 받았는데 아이고 모르겠어.”
 
  기록을 찾아보니 1567승을 했다. 해태 감독(1983~2000년)으로 1164승, 삼성 감독(2001~2004년)으로 312승, 한화 감독(2013~2014년)으로 91승을 거뒀다.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내게 중요하지 않아. 감독 오래하다 보니 많이 이겼고, 물론 한국시리즈 우승, 그것은 기억하지. 현장감독으로 10번(해태 감독으로 9번, 삼성 감독으로 1번), 삼성 구단 사장 하며 2번(2005년, 2006년. 당시 삼성 감독은 선동열)을 더해 12번 우승한 셈이지.”
 
  ―옛날 신문 기사를 뒤져보니 ‘세계 유일의 V10 감독’이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미국 MLB에 없을까? 몰라. 일본 재팬시리즈 9회 우승 감독은 아는데. 10번이 세계 유일인가? 그런가?”
 
  일본의 V9 감독은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 현역 시절 ‘타격의 신’으로 불린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황금시대를 구축해 ‘V9’(9년 연속 센트럴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김응룡 감독은 ‘V10’에다 삼성 사장 시절 우승한 횟수까지 더하면 ‘V12’.
 
 
  세계 유일의 V10, V12 감독?
 
2004년 11월 10일 삼성 경산볼파크에서 삼성 라이온즈 김응룡 신임사장이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하고 있다.
  그는 실향민이다.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열 살 때인 1950년 12월 말 1·4후퇴를 앞두고 아버지(김영식), 큰누나(김옥희)와 월남했다. 그는 기댈 만한 연고 없이 오직 실력 하나로 야구판에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산에 피란 와 부산(에)서 학교를 나와 부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나를 롯데 감독으로 안 데려가더라고.”
 
  프로야구가 출범할 당시 김 전 감독은 미국에서 코치연수를 받고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출범했다.
 
  “1981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 야구스쿨에 입학해 2년간 코치 수업을 받고 있었어. 아무리 기다려도 한국에서 전화가 안 와. 굉장히 섭섭했어. 출범 당시 프로야구 6개 구단에 감독, 코치가 50명이나 되는데, 야~ 내가 그 50명 안에도 못 끼나 싶어 실망이 컸지.”
 
  그는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고 싶어 몰래 한국에 들어와 관전한 뒤 다시 몰래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 계셨더라면 감독이 되지 않았을까요?
 
  “몰라… 내가 프로야구 생기기 전까지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했잖아요. 그리고 국가대표 선수로 뛴 12년 동안 타격왕이다 뭐다 기록은 다 가지고 있는데, 와 이거, 진짜 야~, 그 안에도 못 끼나 싶어 실망을 많이 했지. ‘사바나’라고,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 있었거든. 거기서 4시간이나 차를 타고 애틀랜타까지 간 다음, 다시 비행기를 4시간 타고 뉴욕까지 가서 다시 한국에 날아가 프로야구 개막전을 봤어. 그리고 조용히 되돌아갔어. 개막전을 그만큼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보따리를 두세 번 쌌다가 풀었어. 한국에 들어가자고 마누라에게 졸랐어. 마누라가, ‘여보, 창피하지도 않아? 오라는 곳도 없는데 들어가면 뭐해’ 그랬어. 하하하.”
 
  김응룡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지휘봉을 잡은 것은 1982년 11월 3일. 그때까지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최다, 최고, 최초’ 등 수식어를 가장 많이 다는 감독이 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요즘 야구감독 사이에 형님 리더십이 유행이더군요. 형님처럼 선수 챙기고 친절하게 대한다고.
 
  김응룡 감독에 대한 주위 야구인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원체 말이 없는 분이라 무척 어려웠다거나 무서웠다”고 평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소심하고 꼼꼼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나는 리더십의 ‘리’자도 몰라. 우리는 선수생활 많이 해봤잖아. 여러 감독을 모셨는데 잔소리 심하고 운동장 위에서 자나 깨나 (군림하는 감독이) 싫더라고. 그때 운동장 밖에선 절대 선수들에게 간섭 안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스트레스 받으면 덕아웃 벽을 팍~ 쳐서 주먹이 다 나간 적이 많았지. 여기 봐. (주먹을 내보이며) 다 내려 앉았잖아.”
 
  ―감정조절을 못 하나 봅니다.
 
  “(스트레스가) 확 올라오면 주먹으로 팍. 하하하. 그런데 덩치 큰 놈 치고 강한 놈 없어. 큰 놈이 마음이 약해. 조그만 사람이 오히려 독종이잖아.”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죠?
 
  “야~ 스트레스, 진짜, 미국에서 나온 직업별 수명(壽命)통계를 봤더니 프로야구 감독 수명이 제일 짧더만. 그다음이 작가, 기자 순이야. 제일 오래 사는 거이, 신부·수녀야.”
 
  그의 인생은 야구로 치면 현재 몇 회를 지나고 있을까.
 
  ―야구 인생이 7회 초에서 말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죠?(그의 나이가 올해 75세다.)
 
  “끝났어. 9회야, 9회. 끝나고 있는데, 이제는 뭐 다 진짜 버리니까.”
 
  ―《주간조선》 2001년 10월 18일자 기사를 보니, ‘은퇴하면 아이들에게 과자나 사주고 야구 가르치는 게 꿈’이라고 하셨던데요.
 
  “이젠 꿈이 이북 고향에 가서 묻히는 게 꿈이야. 하하하.”
 
  그는 북한에 어머니와 둘째 누나, 그리고 두 여동생을 두고 왔다. 한때는 가족의 생사를 알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가 3번 이산가족 신청을 하시고 나도 했는데 안 돼. 한완상(韓完相) 총리가 대한적십자 총재 하던 시절, 한번은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북한에 갔어. 고려호텔에서 파티를 하는데 한 총재가 헤드테이블에서 불러, 나를. 북측 대표단 관계자에게 가족사항을 이야기하라고. 얘기했더니 얼마 뒤에 ‘이사 가서, 소식을 알 수 없다’는 거야. 시드니 올림픽 때도, 북한 측 대표팀 단장에게 말했는데 나중 들리는 답이 똑같아. 북한은 여행 자유가 없는 나라인데, 이사 가서 소식을 모른다고 하니, 그 말을 믿겠어? 우리 가족은 아마, 어떻게 잘못된 것 같아.
 
  내가 브로커를 통해서도 알아봤어. 중국 조선족 아이스하키연맹 회장이라는 분들을 통해 연락했더니 여동생하고 어머니가 있는 사진이라고 가지고 왔어. 그 사람에게 ‘나는 얼굴을 기억 못 하지만, 경기도 안양에 이모 한 분이 살고 계셔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자, 그냥 사진을 가지고 내빼더라고. 하하하. 사기 칠려고… 한두 번이 아니야. 내가 이산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했어.”
 
 
  김응룡 리더십의 正體는…
 
  감독은 외로운 자리다. 외롭지만 숙명인 것이 감독이란 자리다.
 
  ―경기에서 지면 혼자 술도 드셨죠?
 
  “혼자 술 많이 먹죠. 그거이, 내일 또 시합을 해야 하잖아요. 맹숭맹숭하게 누워 있으면 계속 시합 장면만 떠올라 잠이 안 와. 빨리 소주 한 잔에다 맥주 태워서 먹고 자야 다음날 시합을 하지.”
 
  ―한화 감독 시절에 많이 그랬겠네요.
 
  “한화 때는 내가 나이가 먹어서인지, 피곤해서 그런지 코치하고 맥주 딱 한 잔만 먹고 그냥….”
 
  ―야구감독은 기술자인가요, 지휘자인가요?
 
  “기술자는 코치들이고, 감독은 관리를 하지. 미국 감독들은 화려한 선수 출신이 대체로 없잖아. 코치들은 기술이 없으면 안 되지. 직접 가르쳐야 하니까. 감독은 코치들만 잘 컨트롤하면 되는데, 관리직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맞겠지.
 
  감독은 선수들이 졌을 때 (코치들에게) 절대 꾸지람하지 말고, 이겼을 때 혼내라고 말해. 기분 좋을 때 얘기해야 머리에 들어가지, 졌을 때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귀에 안 들어가.”
 
  그래서 잘하거나 이긴 날에 오히려 화를 내, 선수들이 “(감독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마 선수들은 이해를 못 했을 거야. 질 때는 빨리 끝내고 가버리니깐. 져서 기분이 안 좋은 선수들 상대로 얘기를 해봤자 효과가 있겠어요?”
 
  ―유명 감독치고 고집쟁이가 아닌 경우가 없더군요. 왜 그런가요?
 
  “그거이, 그저 선수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 아니에요? 선수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하나하나 선수들 의견 들어주면 오합지졸이 되지.”
 
  ―경기에서 이기면 그 운(運)을 이으려 속옷을 안 갈아입거나 수염을 안 깎는 감독도 있다고 하더군요. 징크스 같은 게 있었나요?
 
  “그거이, 약해지니까 징크스를 찾게 되더라고요. 내가 아마추어나 프로 감독 할 때도 강한 팀에만 있었잖아. 그땐 누가 지나가는 영구차를 보고 재수 없다고 하면, 쓸데없다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는데 나도 (한화 시절에) 징크스를 찾게 되데. 이기면 속옷을 안 갈아입는데, 지니까 만날 갈아입고. 하하하.”
 
  ―‘축구는 전쟁이고 야구는 인생’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런 말은 모르고 프로는 전쟁이지. 지면 죽는 것 아니에요? 지면 (감독) 잘리는데 전쟁이지. 이제 나는 완전히 옷 벗은 예비역이야. 아주 편해. 하여튼 프로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야. 지면 끝나는 거니까.
 
  감독들 많이 잘릴 때, 아침마다 가슴에 사표를 쓰고 나오지. 그만둔다고.”
 
  김응룡 감독은 선수를 구성할 때 스타 선수만 예우하지 않았다. 이름보다 당장의 컨디션, 기량을 칼같이 파악했다. 그래서 해태 감독 시절에 소위 ‘미치는 선수’가 많았다. 삼성서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삼성 감독 당시 취임 일성은 이랬다. “주전은 없다. 스타도 없다. 오직 실력이다. 1, 2군의 구별도 없다.” 부자 구단, 삼성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말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칭찬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야구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똑같다고 한다. 카메라에 비친 그의 얼굴은 괜히 뚱해 있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선수들에게 그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단 안 맞으면 잘한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제일 미안한 거이 그거지. 잘했다고 칭찬 좀 했으면 좋은데 인색했으니…. 화장실에서 오줌 누다 보면 옆에 잘한 놈이 있잖아. 그러면 ‘야, 너, 오늘 좋았어. 잘해’라고 했지. 어느 기자가 그걸 보고 ‘무뚝뚝한 김응룡이 화장실에서 슬퍼하기도, 기뻐하기도 한다’고 썼어.”
 
  ―집에서도 그렇죠?
 
  “집에서도 애들한테 잔소리 안 했지.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어.”
 
  ―아이들에게 칭찬은요?
 
  “칭찬도 안 했어.”
 
 
  “화장실에 가서 슬퍼하기도, 기뻐하기도 한다”
 
  그는 개인기보다 팀워크를 중시한다. 선수들에게 사적(私的) 감정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따로 선수들을 불러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경기 중에 선수가 홈런을 쳐도 하이파이브 한 번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항상 냉철하게 선수를 기용하고 외풍도 철저히 막아줬다.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는 방법을 많이 취했지. 4번 치던 놈이 못하면 7, 8번 타순에 앉히든가, 아니면 아예 빼버리든가.”
 
  그는 선수들과 타협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타협하면 안 되지. 물론 선수들이 요구하는 것은 많이 들어줘. 부상당한 놈을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지. 못하겠다는 놈을 낼 수는 없잖아. 그런데 자기 컨디션 조절하겠다고 하루 쉬겠다는 놈은 안 되지.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려면 5회를 마쳐야 되잖아. 이미 한계에 다다른 투수를 배려하다가 얻어터져서 팀이 지면 안 되잖아. 그래서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 5회 원 아웃에 바꿔버리거든. 1승이 그냥 날아가는 거 아냐? 그래도 그런 것은 타협 안 했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투수 선동열이 시즌 중에 조금 느슨한 경기를 하자 김 감독이 패전처리용 투수로 기용한 것이다. 그는 선수가 나태하면 강한 카리스마로 자극을 주었다.
 
  그의 야구 스타일은 어떨까.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어떤 때는 작전이 거의 없는 선 굵은 야구를 한다. 또 어떤 때는 주야장천 점수 차와 상관없이 번트를 대는 소심한 야구를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허리가 안 좋은 투수를 상대로 계속 번트 사인을 낸 적도 있다.
 
  ―소심야구와 선 굵은 야구, 어느 쪽이 맞나요?
 
  “다 맞는 말이지. 내가 사인을 제일 적게 내는 편이야. 보세요. 선동열 선수가 던진다고 쳐요. 두 점만 내면 이긴다 싶으면 두 번 번트 대면 되지. 그런데 오늘 선발투수가 평균 자책점이 6~7점이야. 그러면 번트를 한 번 대선 안 되잖아. 계속 대도록 하는 거지. 투수에 따라 작전이 달라져야지.”
 
  김 감독은 흐름을 잘 읽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자랑이 아니라 초창기 한국시리즈에서 잘한 것은 대표선수로서 경험이 많아서야. 국제대회는 한국시리즈와 마찬가지잖아요. 한번 지면 탈락하니까. 그래서 다른 감독과 경험이나 감각 면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 해태 감독 시절 9번 한국시리즈 올라가서 9번 모두 이긴 거야.”
 
  ―그러나 삼성 감독이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김인식 감독에게 패한 적이 있어요.
 
  “김인식이 놀고 있을 때 해태 코치로 부른 적이 있어요. 내가 무시하는 게 아니고, 속으로 한국시리즈 상대팀 중에서 제일 약한 팀을 만났구나, 생각했어요. 첫 게임을 쉽게 이기고 둘째 날에 비가 와서 경기를 못 하고 셋째 날에 모 선수가 두 번이나 외야 플라이를 놓치더라고. 그래서 2차전에 졌어.
 
  그때, 퍼뜩 옛날 일이 떠올라. 해태 감독 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하고 1승 1패를 했는데 삼성 장효조가 똑같이 미스를 한 일이 떠올라. 그때 삼성이 졌거든. 야, 이거 옛날 삼성 징크스로구나 했어. 그 다음날부터 (두산한테) 깨지기 시작하는데 와~ 미치겠더라고. 하지만 그 다음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겼지.”
 
  현역감독 시절, 그는 하루종일 야구 생각만 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밥만 먹고 야구 생각만 했나요?
 
  “감독들이 다 그렇죠. 집중 안 하는 감독이 어딨나요. 쉴 때도, 불안해서 마음이 안 편해요. 현역선수 때 돈 많이 벌면 감독 안 하잖아요. 미국이나 일본 봐요. 돈 많이 번 선수들이 나중에 감독 해요? 골치 아픈 것, 안 합니다. 시합 때는 아무래도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 불안하죠. 야구는 둘 중 하나 아닙니까. 성공과 실패, 승률은 반반이죠. 히트앤드런 작전을 냈는데 실패하면 엉터리 작전이었다고 욕먹고, 투수교체를 지시했다 얻어터지면(안타를 맞으면) 잘못된 교체라고 또 그러고. 감독은 뭘 해도 욕 얻어먹게 돼 있잖아요.”
 
 
  곰보다 여우, 장비보다 조조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김응룡 감독(당시 삼성)과 김성근 감독(LG).
  놀랍게도 현역감독 시절 그의 별명은 지(智)·용(勇)·덕장(德將) 중에서 ‘지장’으로 통했다. 생긴 것은 ‘곰’이지만 작전 구사는 ‘여우’에 가깝다는 얘기다. 삼국지 영웅에 비교하면 ‘장비’가 아니라 ‘조조’에 가깝다는 평가다. 한 야구전문기자는 ‘김응룡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세심하고, 뱀처럼 냉정하고, 어느 순간엔 여우보다 더 교활하다’고 썼다.
 
  “과찬의 말이고, (주위에서) 복장(福將)이라고 불러줬어. 또는 맹장(猛將)이라고. 현역선수 시절에는 내가 덩치가 제일 커서 코끼리, 곰, 하마 같은 큰 동물이 다 내 별명이었어. 하하하.”
 
  야구경기의 승패는 감독들의 머리에서 결정이 난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식의 조심스러운 야구를 했던 김영덕(金永德) 감독, 통계적 자료와 지옥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金星根) 감독이 있다면, 김응룡식(式) 야구는 세심하면서도 때론 호쾌한 야구를 선보였다.
 
  ―1980년대 해태 야구는 뭔가 다른 팀과 달랐어요. 광주의 울분, 상처, 상실감 등이 해태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하지 않았나요?
 
  “그땐 다른 감독들이 광주에만 오면 긴장이 된다고 그랬어요. 광주 시민들이 경기에 울분을 토하니까 자연적으로 선수들이 이를 악 물고 하지 않았을까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처음 해태 감독으로 가니까, 호남 사람들이 ‘왜 부산 놈을 데려왔나’고 그래요. 그래서 해태 구단 사장이 ‘김 감독은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지, 고향은 이북’이라고 하니까. ‘구체적으로 이북 어디냐고 밝히라’고 하기에, ‘평안도 어디’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부산에서 ‘야, 김응룡이 너 삼팔 따라지였구나’ 그래요. 삼성 감독 하러 대구 가니까, 절반가량이 내가 호남 출신인지 알아, 아직까지. 워낙 해태 감독 이미지가 강했으니까.”
 
  ―1980년대만 해도 영호남 지역감정이 심한 시절이지 않았습니까.
 
  “부산이나 대구에서 광주로 오갈 때 편치 않았어요. 원정경기를 가면 관중이 경기장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선수들이 버스에 타지 않았어요.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빠져나간 다음, 버스를 불렀는데도 어디서 돌멩이가 날아오는데 와장창 하고, 버스 앞 유리창이 많이도 깨졌지요.”
 
  ―요즘의 광주 야구 열기를 어떻게 보세요.
 
  “내가 볼 때 KIA의 야구 열기가 많이 식은 것 같아. DJ(金大中)가 대통령이 되고 딱 그다음부터 야구장에 관중이 안 오더라고.”
 
  ―무슨 이유일까요?
 
  “한(恨)을 다 풀었다는 거지.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해태가 점수를 내면 관중이 목놓아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김대중, 김대중’ 연호하곤 했잖아요.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는 김대중 연호도 없어지고, 관중도 반으로 확 줄고.”
 
  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달랠 유일한 기쁨이었고, 해태 타이거즈를 대표하던 응원곡이 청승맞게도 ‘목포의 눈물’이었다.
 
 
  다시 한화 감독 시절 이야기
 
2013년 김응룡 감독은 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사령탑이 됐다. 그러나 ‘김응룡 매직’에 오점을 남겼다.
  ―다시 한화 이야기 좀 할게요.
 
  “한화 이야기는 싫은데….”
 
  ―김성근 야구의 통계야구와 뭐가 다른가요.
 
  “통계는 어느 감독이든 참조를 하지. 하지만 통계란 것은 죽은 기록이잖아. 현재가 중요한 거야. 그래서 현재 잘하는 놈을 데리고 야구를 해야지.”
 
  통계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의 그날 컨디션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스타급 선수들은 어제까지 잘했다는 뜻이지 오늘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게 김 감독의 지론이었다. 예전도 잘했지만 지금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실력으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한화의 연습량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지옥의 펑고’라는 말도 있고 혹사(酷使) 논란도 있고. 어떻게 보세요.
 
  펑고(Fungo)는 야수가 수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트로 쳐준 타구를 말한다. 김성근 감독의 혹독한 펑고 타구에 선수들이 힘들어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는 선수도 있고 그런 거지. 일률적으로 똑같은 것은 아니잖아.”
 
  ―김성근 감독하고 인연이 많지요?
 
  김응룡 감독은 1941년생, 김성근 감독은 42년생이다. 1994년 김응룡 감독이 해태 감독일 때 김성근 감독이 해태 2군 감독으로 왔다. 그때 김성근 감독이 해태 시스템을 보고 “코치들이 다 하는군”이라고 한 말이 회자한다. 밖에서 볼 때와 다르게, 김응룡 스타일은 코치에게 일임하고 선수 개인의 자율을 강조하더란 얘기다.
 
  “내가 다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얘기야. 실제로 (선수들) 간섭 안 하잖아. 어디 미국이나 일본 감독이 그렇게 합니까. (감독이 나서면) 코치가 할 일이 없잖아. 전문 분야는 코치잖아. 그런 거지. 코치에게 다 위임하되 다만 책임만 감독이 다 지는 거지.”
 
  ―요즘도 열심히 야구 보시죠.
 
  “요즘… 될 수 있는 대로 안 보려고 해. 어느 팀이 1위인지도 몰라. 진짜로. 그냥 편해. 꽃 보는 게 편해. 여기 쭉 올라가면 마성IC까지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3층으로, 한 달 전만 해도 멋있었잖아. 하하하.”
 
  꽃이 좋은지 꽃 얘기를 할 때 그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요즘 한화 성적 아세요? 중위권이에요.
 
  “좋다고 하더라고. 우승해야지.”
 
  ―우승할 것 같아요?
 
  “야구는 모르잖아.”
 
  ―KIA·삼성·한화 3팀 중에서 가장 애착 가는 팀은?
 
  “아무래도 해태에 18년 있었으니까 해태(KIA)에 애착이 가지.”
 
  ―그런데 한화 우승을 바란다고 하셨잖아요.
 
  “한화? 바람이지 뭐. 한화·삼성·KIA 3팀 중에서 한 팀이 우승하면 좋겠어.”
 
  ―김성근 감독이 한화 감독에 내정된 뒤 두 분이 만나신 적이 있나요?
 
  “없어. 전화 통화한 적도 없어.”
 
  ―섭섭한 느낌은 없었나요?
 
  “아냐, 아냐. 프로야구 전통이 그래요. 내가 삼성 감독 되고 전임감독(김용희) 만난 일도 없고, 내가 한화 감독이 되고 전임감독(한대화)에게 전화한 일도 없고. 한대화 감독도 (은퇴해서) 요즘 만나지, 내가 전화한 적이 없었어.”
 
  ―요즘 KIA가 하위권인데 왜 그런가요.
 
  “작년부터 약해졌어요. 그래서 스카우트가 중요한 거야. 내가 삼성 가서 스카우트 보강을 많이 했잖아. 외국용병뿐만 아니라 장래성 있는 선수를 뽑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래도 한화에서의 2년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좋은 경험이 됐죠. 그런데 왜 자꾸 한화 얘기를 물어.”
 
  ―김성근 감독이 잘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은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덕담을 한다면.
 
  “(프런트가) 감독 의견을 많이 들어줘야 돼. 우리나라는 야구단 단장이 나서면 안 되는 거야. 미국 메이저리그에선 야구단 단장 경력이 감독보다 위거든. 우리나라는 야구단장이 건설 하다, 뭐 하다가 와가지고, 하루는 미국 출장 갔다 와서 ‘미국에서 이렇게 하니 이렇게 해라’는 식으로 하면 안 되지.”
 
  ―프런트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라는 얘기지요?
 
  “그럼. 나는 삼성 구단 사장 할 때 감독 말 100% 들어줬어. 뭐 해달라는 것 다 들어줬어. 장원삼이 상대팀 에이스를 FA선수도 아닌데 데려왔잖아. 하하하. 감독이 부탁하는 것 들어주는 게 프런트야.”
 
  2008년 당시 삼성은 쓸 만한 왼손 투수가 절대 부족했다. 10승대 왼손 선발 투수가 절실했던 삼성은 2008년 11월 우리 히어로즈(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구단)의 장원삼 투수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현금 30억원과 삼성의 불펜 투수 박성훈을 내놓았다. 그러나 다른 구단들의 집단반발로 이 트레이드는 1년 뒤에 성사됐다.
 
  ―그 말씀은 한화 감독 시절에 프런트 입김이 셌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뭐. 거기서 다 한 거지.”
 
 
  “한화는 잊어버리고 싶다고”
 
1991년 삼성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과 해태 김응룡 감독이 올스타전에서 만난 모습.
  ―싹수 있는 좋은 선수는 어떻게 알아보나요.
 
  “1분만 쳐다보면 다 알지. 유연성, 눈빛, 몸매 다 보지. 장래성을 봐야 돼. 미국 스카우트들과 우리나라 스카우트들이 보는 관점이 달라. 우리는 투수 구속이 몇 km 나오는지 만날 그것만 재. 즉시 전력감만 봐. 반면 미국은 성장가능성을 보잖아. 몸의 유연성 같은 것을 중시해.”
 
  ―옛날 신문을 찾아보니, 형편이 어려운 신인들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밥도 해먹이고 그랬다면서요.
 
  “당시 해태 2군 선수들은 40평형대 아파트에다 다 집어넣고 살게 했어. 아주머니가 아침에 와서 밥하고 찌개 하나 끓여놓으면 그만이야. 나는 감독이라고 30평 아파트에 혼자 있잖아. 대여섯 명 불러서 계란 프라이, 햄 같은 것을 매(먹)기고 그랬지.
 
  그런 선수 중에 잘된 놈도 있고 못 된 놈이 있고 그랬어요. 해태 2군은 그렇게 먹는데 삼성에 오니 뷔페에다가 고기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먹는데 야~ 떨리더라고.”
 
  ―애착이 가는 제자가 있나요?
 
  “아무래도 해태 주전 선수들이 기억나. 투수는 아무래도 선동열, 야수는 (이)종범이가 날아 댕겼고 (이)순철이, (김)일권이, 요 세 놈은 어떤 투수가 와도 흔들어놓았지. 한방이 있고 타율이 제일 좋은 놈이 (김)종모고, (김)준환이, (김)봉연이 이런 애들이지. 삼성에서는 (양)준혁이가 타율이 좋았고, (이)승엽이는 홈런, 마해영이도 중요할 때 많이 쳐주었고.”
 
  ―한국시리즈 우승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우승은?
 
  “감독 부임한 첫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게 기억나.”
 
  해태 감독 김응룡은 1983년 10월,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예상을 깨고 MBC 청룡을 4승 1무로 아웃시키고 패권을 잡았다. 프로 데뷔 첫해에 우승을 일군 것이다.
 
  “2002년 삼성 우승도 빼놓을 수 없어. 그날 경기를 끝내고 파티를 하는데 당시 삼성 구단 현명관 단장이 ‘김 감독 욕 참 많이 했다’고 해. ‘아니, 이승엽이 그렇게 못 치는 데 끝까지 시합에 내보내데. 어떻게 칠 줄 알고 계속 기용했지요?’ 그래요. ‘아니, 나도 몰랐다’고 했어. ‘승엽이 대신에 시합할 놈이 있었어야지. 그래서 계속 내보냈다’고 말했어.”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에 패한 팀은 LG트윈스였고 당시 감독은 김성근이었다.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하니까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내 후임으로 선동열 감독이 팀을 잘 만들어놔서… 몇 년 전 어떤 자리에서 누가 묻더라고. 삼성의 연패(連覇)가 몇 년을 더 가겠느냐고. ‘전성시대가 4~5년은 갈 거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4연패 했잖아요.”
 
  삼성 라이온즈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페넌트레이스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이뤄냈다. 4연패의 위업(偉業)은 김 감독도 못 일군 대업이다.
 
  ―삼성 류중일 감독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내가 삼성 가서 보니까 1, 2군 다 합쳐서 류중일 코치가 제일 잘하는데 2군에 있더라고. ‘왜 2군에 있어?’ 그러니까 ‘불러줘야 가지요’ 그래. 선수생활도 제일 잘했는데 2군에만 있더라고. 그래서 ‘오늘부터 1군에 있으라’고 했지. (다른 코치보다) 제일 열심히 하고… 삼성 출신 코치들이 신사야. 선수들에게 ‘인마, 전마’ 욕 한마디 못해. 점잖아. 류 감독은 주인의식을 갖고 진짜 열심히 해. 어떤 선수가 류 감독한테 얻어맞아서 도망치고 그랬어. 내가 그 선수를 불러 ‘너, 처음 맞았느냐’ ‘아닙니다’ ‘고교 때도 맞았지? 처음 맞은 것도 아닌데 왜 도망가’ 하고 나무랐어요. 내가 떠나고 선동열 감독 후임으로 류중일이 감독에 발탁됐다고 하기에 ‘감독 하나만큼은 누가 야구를 알고 잘 시켰구나’ 했어. 잘하잖아.”
 
  뉴욕 양키즈의 요기 베라는 ‘야구란 마인드 게임이다. 90% 이상이 마인드고, 나머지 10%가 실력과 체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구를 인생에 비유한다면?
 
  “야구? 인생사와 똑같은 것 아냐?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고, 스포츠가 인생살이와 같지. 고비도 있고 찬스도 있고… 인생에 3번의 찬스가 있다고 하잖아. 야구도 그래. 3번 찬스 중에서 한 번이라도 찬스를 살리면 이기고, 못 살리면 지고.”
 
  ―감독님은 고비고비를 잘 이겨냈지요?
 
  “잘 이겨냈잖아. 야구판에서 오래 살아남았으니. 나처럼 40년 이상 감독을 어떻게 해?”
 
  ―한화 감독 2년은요?
 
  “아이고, 나는 야구 끝났어. 야구 잊고, 딴 곳에 몰두하니 편안해. 요즘 내 곁에서 야구 얘기하면 두들겨 맞아. 하하하.”
 
  ―신생구단 KT위즈가 요즘 맥을 못 추던데 덕담 좀 해주세요.
 
  “아니야. 잘하고 있어. 왜냐면 모(母)기업의 지원이 없었잖아. 역대 창단팀 중 그런 팀이 없었어.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안 하는 것이 낫지. 공기업이 그래서 야구가 힘들어. 그 정도로 지원해서 강팀 되기 힘들죠. 미국 MLB 뉴욕 양키즈가 잘하는 이유는 돈이 많기 때문이야.”
 
  ―농사짓는 것도 좋지만 야구 발전을 위해 무언가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뭐, 지금 얘기하면 안 되지. (어디로) 옮기고 나서 말해야지. 사회생활 하는 게 진짜 힘들어. 마음대로 안 돼. 지금은 쉬는 게 최상이야. 잠시 잊어버리는 게 편안해. 항상 긴장하며 살았잖아. 안 돼.”
 
  ―야구팬들에게 한화 2년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한화는 잊어버리고 싶다고….”
 
  ―한화 대전팬들이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잠시 생각을 가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써주세요. 성적이 그렇게 나쁜데도 열렬히 응원해 줘서 잊지 않겠다고. 좀 좋게 써주세요. 섭섭하지 않게. 아, 나이가 먹어서 진짜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힘들어, 힘들어. 그런데 한 5년은 해야 하지 않을까. 감독 2년은 너무 짧아. 삼성 가니까 5년 계약에 팀 개조를 전적으로 맡기더라고. 그러면서 ‘우승하라고 해태에서 데려온 것 아니다. 야구 스타일이 좋아서 데려왔다. 그대로만 해달라’고 부탁해요. 그래서 삼성에서 감독 야구를 할 수 있었어. 손발 다 묶어놓고 감독 하라고 하면 어렵지. 문화가 다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기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등록일 : 2015-06-19 12:49   |  수정일 : 2015-06-1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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