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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태 교수의 세계 전사적지 답사기

100년이 지나도 전쟁의 상흔은 남아 있었다.

글 | 신종태 육군지상전연구소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2-21 오후 1:38:00

벨기에 플랑드르 평원의 100년 전 전쟁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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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계속 발굴하고 있는 플랑드르 평원의 전쟁잔해

 
상상을 초월하는 1차 세계대전의 피해
 
 1914년 여름 유럽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울린 총성 한발이 기폭제가 되어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1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된다. 전쟁이 4년 이상 지속되면서 인류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이 전쟁은 군대만의 전쟁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긴밀하게 얽혀 있는 최초의 국가 총력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든 참전국들은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섰다. 프랑스 국민들은 참혹한 전쟁 피해로 인해 비관주의와 불안감에 짓눌려 지냈고 전쟁 전 강력한 제국이었던 영국마저 재정이 파탄 나고 말았다. 영국 재무부는 1965년 말까지 미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세수의 1%를 따로 떼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 전쟁 덕분에 미국과 일본은 큰 혜택을 보았고 세계의 강대국으로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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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드르 평원의 개인 전쟁박물관
 
 약 7,000만 명 이상의 쌍방 군인들이 총검, 기관총, 독가스, 전차, 잠수함, 비행기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살상 수단을 가지고 진흙탕 속에서 뒤엉켜 피 터지도록 싸웠다. 그 결과 940만 명이 전사했고, 1,54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종전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정상적인 가족의 삶을 되찾지 못한 가정들이 많았다.
 
 독일에서만 전쟁 미망인이 50만 명을 넘었고, 프랑스의 시골 마을은 평균적으로 청년 다섯 명 중 한 명을 전쟁터에서 잃었다. 한동안 길거리는 실의에 빠진 얼굴(Broken face)"로 뒤덮혔고, 많은 가정들이 파괴된 남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세 명 중 한 명의 군인만이 그나마 멀쩡한 몸으로 귀향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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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 투입을 대기하는 영국군
 
 이프르(Ypres) 플랑드르 평원에서는 아직도 100여년 전의 불발탄과 전쟁잔해들이 수시로 발견된다. 가끔씩 벨기에군 불발탄 처리반이 1차 대전 당시의 포탄과 지뢰를 수거하여 폭파시키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지 수세대가 지났지만 이곳은 아직도 수류탄, 단추, 버클, 단검, 인간의 두개골, 물병, 소총, 때로는 땡크까지 땅 속에서 통째로 발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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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러 지역 근처에서 발견된 1차대전 시의 기관총
 
장교들의 낡은 군사사상이
수백만의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다.
 
 1914년경 독일이나 영국·프랑스군 장교들의 전쟁 개념은 나폴레옹 전쟁과 그 이전 시대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기병이 수행하는 명예로운 돌격을 열망했다. 기술 혁명으로 도래한 상황에 대처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보병과 기병을 숭배했다.
 
 전쟁 기간 내내 많은 장교들이 전쟁 방법이 철저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많은 군사 저술이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이 계속해서 일종의 군사적 정신주의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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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전투방법만 생각했던 영국군 장교들
 
 예들 들면 1893년 아프리카 마타벨레 전쟁(Matabele war)에서 영국군은 최초로 맥심 기관총을 사용한다. 한 차례의 교전에서 영국군 50명이 불과 4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마타벨레 전사 5,000 명을 격퇴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기관총의 가공할 만한 성능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가 단지 흑인의 열등함을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또한 유럽의 장군들은 러일 전쟁과 보어 전쟁의 교훈을 깡그리 잊었다. 두 전쟁 모두 보병 화력의 새로운 발전과 참호 구축의 필요성을 예시해 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낡은 군사사상은 곧 수백만의 병사들을 의미없이 사지로 밀어 넣어 목숨을 잃게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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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소모전에 동원되는 병사들

 191671일 이프르 근처에서 일어났던 전투 상황이다. 영국군 8사단의 2개 연대 전체가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다. 2시간 만에 이 사단은 장교 300명 중 218명을, 사병 8,500명 가운데 5,274명을 잃었다. 독일군은 단지 300명 미만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특히 제10웨스트요크셔와 제7그린하워드의 두 대대 전원이 위치를 잘 잡은 단 한 정의 독일군 기관총 앞에서 거의 완벽하게 몰살당했다. 영국군은 무인지대 수백 미터를 횡단하는 과정에서 710 명이 쓰러졌다.
 
 이 모든 참극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영국군의 공격작전 시 1개 사단 당 3일 동안의 평균 사상자 수는 장교 101명에 사병 3,320명이었다. 19168월에서 11월까지 계속된 이프르 3차 전투 기간에 거듭된 공세에서 영국군은 24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한국문화에 매료된 호텔 종업원
일본기업을 압도하는 한국자동차
 
 이프르 외곽의 전적지 답사를 위해서 많은 여행자들이 자전거를 이용한다. 도시 주변이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며 자전거 전용도로까지 잘 구비되어 있다. 단지 가끔씩 내리는 가랑비가 문제가 된다. 시내 호텔의 자전거 대여점 종업원은 의외로 필리핀 여성이었다.
 
 수년 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한국인에 대해서 대단히 우호적이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며 한국 탈랜트 몇 사람의 이름까지 꿰고 있다. 아버지는 필리핀 공군 조종사 출신이며 현재는 전역하여 연금생활을 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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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자전거 여행이 보편화되어 있다.

  복귀 시간을 약속하고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개인이 운영한다는 이프르 62고지 전쟁유물 전시관을 찾아 도시 외곽으로 나갔다. 도심을 막 벗어나는 순간 자동차 선전 간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명 한국 자동차 회사의 간판이 조그맣게 옆에 메달려 있는 일본회사 광고물을 당당하게 압도한다. 10여 대의 한국 자동차까지 대리점 앞에 나란히 주차해 있다. 이런 유럽 시골도시까지 한국의 국력이 뻗어 나와 일본과 어깨를 겨루고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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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시골의 자랑스러운 한국자동차 전시관

*Tip :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바꾼 맥심 기관총(Maxim Machine gun)
 
 미국의 발명가 하이럼 맥심은 1885년 세계 최초의 자동 송탄식 기관총을 발명하여 영국 육군 앞에서 시현해 보였다. 맥심은 각 탄환의 반동 에너지를 이용해 소비된 탄약을 방출하고 다음 탄약을 집어넣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기관총은 1분에 500발까지 발사할 수 있으며 소총 100정의 화력에 맞먹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영국 육군은 1889년에 맥심 기관총을 채택한다. 다음해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러시아 육군도 맥심 기관총을 구입했다.
 
칼럼니스트 사진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등록일 : 2014-02-21 오후 1:38:00   |  수정일 : 2014-02-2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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