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신종태 교수의 세계 전사적지 답사기

프랑스의 굴욕, 꽁삐에뉴 숲을 가다

글 | 신종태 육군지상전연구소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1-27 오전 10:10:00

전쟁보다 휴식 시간이
더 중요한 우체국 전화교환원
 
19405, 프랑스가 기습적으로 독일군 공격을 받아 혼란 상황에 빠져 있을 때의 이해 못할 실제 상황 이야기. 당시 프랑스군 전선 사령부 유선통신은 지역 우체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전화교환원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전통적인 프랑스의 관습은 점심식사 후 항상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휴식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교환원들은 빗발치는 군부대의 전화 요청에 자신들의 오후 티타임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교환원 대표는 부대를 방문하여 12:00-14:00 까지의 점심시간을 지켜 줄 것을 부대장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결국 그 시간 동안 프랑스군 사령부는 예하부대에 작전지시를 할 수 없었다. 전쟁보다도 교환원들은 자신들의 티타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즈 지음)
 
 
본문이미지
피란가는 프랑스인들
본문이미지
독일군에게 처형되는 레지스탕스
 
194064일 비극적인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끝나면서 전선지역에서 많은 프랑스군들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프랑스 수도 파리는 평화로왔다. 몇 차례 독일 공군기들이 파리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가했지만 낙천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그다지 현실적인 문제로 느끼지 않았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주요 시설에 피해가 발생해도 이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일종의 비현실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상젤리제 호텔 로비에는 프랑스 위기를 화제로 우국충정을 늘어놓는 선남선녀들은 많아도 국가를 위해 실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단지 전쟁의 문제를 자기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610일에는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프랑스는 파리를 비무장 도시로 선포한다. 무능한 프랑스 정치인들이 독일에 대항하는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것이라곤 바로 이 정책 하나 뿐 이었다. 1940614일 독일군은 파리를 총성 한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당하게 상젤리제 개선문으로 행진하면서 점령했다. 거대한 만() 형태의 독일 깃발이 개선문과 에펠탑 정상에 게양되었다.
 
본문이미지
파리로 진격하는 강인한 모습의 독일병사
본문이미지
파리 에펠탑 앞의 히틀러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1944825일 연합군이 또다시 파리를 해방시킬 때까지 비참한 패전국 국민의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프랑스군 공식문서에는 120만 명이 독일군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40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기간 중 독일 육군의 피해는 겨우 21천여 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1차 대전 독일이 항복했던
꽁삐에뉴 침대 기차칸을 의도적으로 선정
 
1940622, 프랑스 항복 대표단은 전날부터 독일군에 의해 약 30시간 이곳 저곳으로 끌려 다녔다. 녹초가 된 그들을 히틀러가 데리고 간 곳은 프랑스 꽁삐에뉴 숲속 빈 공터였다. 이 장소는 1918년 프랑스 포쉬 원수가 독일로부터 1차 대전의 항복문서를 받았던 바로 그 현장. 극적 효과를 즐기는 히틀러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독일이 22년 전 굴욕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바로 그 열차는 특별 박물관 안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박물관 벽이 헐리고 그 침대차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꽁삐에뉴 숲에 세워진 거대한 프랑스의 1차 대전 승전 기념탑은 독일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며 산산 조각이 났다.
 
본문이미지
꽁삐에뉴 숲속에 있는 항복조인 기념관

본문이미지
기념관 내부에 침대기차는 보관되어 있다
 
 
히틀러가 프랑스 대표에게 요구한 항복조건은 가혹했다. 첫째, 프랑스 영토의 절반은 독일이 직접 통치하며 나머지는 비씨 괴뢰정권이 관할한다. 둘째, 프랑스가 보호하는 반나찌 망명자들을 독일로 전원 강제송환토록 한다. 셋째, 프랑스 함대는 독일·이탈리아군 감시하에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패전국 프랑스는 승전국 요구에 오로지 순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항복조건으로 인하여 어제의 동맹국 영국과도 프랑스는 해군함정 처리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일부 프랑스 함정은 해외로 탈출하기도 했지만 대형함 4척은 정박지에서 영국 해군의 포격으로 격침당하며 1,267명의 프랑스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본문이미지
프랑스 항복을 받으려 가는 독일군 대표단
본문이미지
박물관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기념동판
 
이로 인해 비씨 정권수반 페텡은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끊었다. 어제까지 피로 맺은 영·불 동맹이 이제는 원수지간으로 변한 것이다. 페텡 원수는 오래전 프랑스 육사에서 드골 생도를 교육시켰으나 바로 그 드골은 전쟁 중 영국에서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된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난 후 드골은 자신의 스승 페텡을 재판정에 세워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치욕의 항복문서 주고받았던 침대차는
부끄러운 심경으로 창고 안에 숨어있다
 
독일과 프랑스 간 역사적으로 얽히고 설켜 복잡한 사연을 지닌 꽁삐에뉴숲은 파리에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야한다. 도착역에서 꽁삐에뉴까지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다. 울창한 숲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넓은 공원형태의 광장이 나온다. 얼마나 택시기사를 기다리게 해야 할지 막연하다. 30분 정도의 대기시간을 약속하고 목표물을 찾아 뜀박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로를 따라 숲속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차 대전의 프랑스 전쟁영웅 포쉬 원수의 동상이다. 19181111,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던 포쉬 장군은 프랑스 국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분노의 눈빛으로 2차 대전 시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했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문이미지
울창한 꽁삐에뉴 숲속길

본문이미지
1차대전 프랑스의 영웅 포쉬장군 동상
 
그러나 광장 끄트머리의 침대차 보관 기념관은 굳게 문이 잠겨 있다. 겨울철 여행 비수기로 방문객은 아무도 없다. 관리하는 직원조차 보이지 않는다. 흡사 프랑스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가 서린 그 자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듯 항복조인 열차는 깊숙한 창고 속에 숨어 있었다. 까치발로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기념표지석의 설명문만 읽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본문이미지
꽁삐에뉴 시내에서 만난 프랑스 여군 대위

본문이미지
꽁삐에뉴 시골역 전경

칼럼니스트 사진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등록일 : 2014-01-27 오전 10:10:00   |  수정일 : 2014-01-28 15:53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건
  • SNS 로그인
  • 페이스북 로그인
  • 카톡 로그인
  • 조선미디어 통합회원 로그인
  • pub 로그인
댓글을 입력해주세요.
김준영  ( 2014-01-27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28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신종태  ( 2014-01-28 )  답글보이기 찬성 : 25 반대 : 27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격언은 불변의 진리.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조차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

특히 북한,중국,일본에 포위된 우리 민족의 경우 최소한의 자위력을 위해서 항상 전쟁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안타깝게도 우리 국민들이 가장 관심이 없는 분야가 바로 국방 문제입니다.

단적인 예로, 해마다 수많은 한국 대학생들이 해외 배낭여행을 나가지만 외국 전쟁유적지나 군사박물관에 관심을 가지고 답사하는 젊은이들을 저는 현장에서 만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운좋게도 약 30여개국을 수차례에 걸쳐 유적지 현장 혹은 전쟁관련 박물관을 반복 답사할 기회가 있었음).

그러나 일본, 중국인들은 그곳에서 가끔씩 만나기도 했습니다. 전혀 그들의 전쟁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강대국 국민들과 평화와 예술을 사랑하며 전쟁은 부도덕하다고만 자위하는 약소국 국민들과의 차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한국군인들조차도 군사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이나 이름난 유명 박물관 견학만을 선호하는 실태이니...)

120년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 10년 후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우리 선조들은 지게를 지고 채찍으로 얻어 맞아가며 일본군 탄약.식량을 압록강변까지 운반하며 고스란히 전쟁의 피해를 우리들이 덮어쓰기도 했죠.
(무식한 조선인들이라고 노무자 얼굴에 색갈페인트로 탄약상자, 식량상자 등을 표기하기도 했다.빨강색 탄약, 노란색 식량 등)

아쉅게도 조금 더 국가예산을 투자하여 자주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아무리 호소해도 정치인들은 콧방귀만 뀔 뿐. 오히려 기편성된 국방예산마저도 싹둑 싹둑 짤라 지역구 예산으로 전환하는 실정이니.

아무튼 과거 전쟁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강대국의 발굽에 짓밟힐 수 밖에 없을 것인데.....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