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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소설가 이경희 '을의 연애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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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연애는 갑인가요?

글 | 이경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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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기 좋은 계절이다. 살결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에도 마냥 기분이 좋으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요즘같은 때의 늦은 저녁, 어스름한 불빛 아래, 열렬히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가끔 발견한다. 그럴때면 공연히 나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게도 분명 그런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헤어지기는 싫고, 그래서 1분 1초가 살을 깎아 먹는 것처럼 아프게 흘러갈 때가 있었다. 같이 있고 싶은데 밤은 깊었고, 하늘에는 둥그렇게 엄마 얼굴이 떠 있다.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몽롱해지는 그런 순간이다.
 
나는 요즘도 그 시절 꿈을 꾼다. 꿈속의 나는 이른 새벽, 집 대문 앞에 서 있다. 분명 초췌한 모습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이 나인데, 또 그 모습을 내가 관찰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만 꿈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불안하다. 대문 앞의 나는 겨우 심호흡을 마치고 벨을 누르기 위해 앞으로 손을 뻗는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큰 소리를 내며 내 등짝에 불덩이를 꽂는다.

“야! 너 오늘 학교 안가?”
역시, 언니다. 언제나 악역은 언니다. 나와 여섯 살 터울인 언니는 내 여고시절 결혼을 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나의 대학시절 스토리에 등장해 내 등짝을 스메싱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내 꿈속의 악역은 단 한 사람, 언니로 캐스팅된 까닭에, 얄미운 일에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수시로 그녀가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겪었듯 그러한, 그저 좋아서 못 견디는 연애에도 갑과 을이 존재할까? 물론이다. 그런 연애에도 갑과 을은 존재한다.
다만 사랑이 깊어지면서 서로의 마음이 함께 묶여 갑이 을의 방향으로, 을이 갑의 방향으로 좌표이동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이동하는 좌표는 때때로 가속도가 붙어 접점을 놓치고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처음엔 이랬던 그가, 처음엔 그랬던 그녀가, 마음이 변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당신은 이미 을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애의 출발점이 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을의 좌표라는 것.
 
‘벌거벗은 내 마음’이라는 산문집에서 보들레르가 말했다.
‘서로에게 홀딱 반한 두 연인이 욕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라도, 그들 중 한 사람은 더 침착하고 덜 몰두해 있는 법이다. 그 사람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수술 집도의 또는 사형집행인의 역할이고 나머지 사람이 환자이며 희생자가 된다.’
 
을이 되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컨트롤할 수 있고 내 판단으로 모든 일이 결정되는 갑이 되고 싶다. 더구나 연애에 있어선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좋아해 주는 일, 그건 누구나 꿈꾸는 연애 유토피아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니 위치는 갑의 좌표다.
하지만 나는 재미없고 슬픈 ‘을’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우리 누구나 내 속에 몇 개의 기억들이 있다. 내가 을이었을 때의 이야기. 갑인 경우의 기억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을의 경우 흘러가지 못하고 세 번째 갈비뼈 쯤이나 췌장 정도에 걸려 이유 없이 한 번씩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등록일 : 2018-05-24 13:22   |  수정일 : 2018-05-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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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소설가

2016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국회의장단 기획관을 지냈으며, 일간지 문화부 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예술치유 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JTBC드라마 원작소설 '품위있는그녀 1,2' 를 출간했고 현재 에브리북에 소설 '엘리자베스 캐츠아이'를 연재 중이다.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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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사랑내사랑  ( 2018-05-24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0
재미있어요! 조선일보 둘러보다가 발견했는데... 이런 칼럼도 있군요. 재밌어요!
hue  ( 2018-05-24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
미투로 시끄러운 현실이지만 작가님의 글은 영혼 맑은 우리들의 한쪽을 끄집어내는 매력이 있군요
이기심에 집중해 찌들어 있는 우리를 정화시켜주는 듯한 글로 인해 오랫만에 나를 찾은 느낌이라 한글 던지고 지나갑니다
yoon  ( 2018-05-24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0
벌거벗은 내마음 저는 좀 힘들게 읽었는데 다시 보니 기억이 납니다. 보들레르도 을이었군요. 우리 모두가 때론 을이었고 때론 갑이었다는 사실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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