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시리즈 | 박미정의 세상물정 인문학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을 통해 본 ‘악(惡)’의 평범성

글 | 박미정 여성조선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본문이미지
유태인 수용소의 주인 없는 신발들.

 
인간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전락할 수 있을까.
평소엔 절대 알 수 없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 심연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가.
 
이 물음에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통찰을 보여주는 책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몇 권을 소개하자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이안 부루마의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다. 모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군상들을 통해 인간의 심연,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다른 존재 가능성에 대해 성찰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좀비가 된 사람들
 
본문이미지
프리모 레비.
사랑했던 사람뿐 아니라, 집, 옷 등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존재를 상상해보라. 과거와 철저히 단절되고 미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육체의 고통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 대부분이 이곳은 어떤 곳인지 알기도 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수인번호가 곧 그들의 새로운 이름이 된다.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매일 이유를 알 수 없이 얻어맞고 굴욕을 당한다. 발가벗겨진 채 점호를 기다리고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일터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이들은 수용소의 짜인 리듬에 따라 나갔다 들어왔으며 일하고 자고 아팠다가 아무렇지 않게 죽어갔다.
 
규칙적인 선발을 통해 유약한 사람들이 가스실로 향한다. 수용소 포로들은 그런 동료를 무력하게 쳐다볼 뿐이다. 마지막 인사도 유언도 없다. 가스실의 잔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고 재를 꺼내 없애는 일도 유대인의 몫이다. 남은 자는 계속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혹한 고통 앞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보통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만성적인 허기, 치료 불가능한 상처로 곪아 있는 발등, 육체는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아우슈비츠라는 가공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빨치산 부대에서 활동하다 파시스트 군에 체포되어 임시수용소로 이송되던 1943년 12월부터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1945년 1월까지의 일들이 담겨 있다.

수용소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실험장이었다.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영장류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히 보여준다.
 
이곳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 없다. 개인은 철저히 혼자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제3의 가능성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애초 수용되었던 15만 명 중 단지 수백 명만 생존할 수 있었던 수치만 봐도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사나 재봉사, 구두수선공 같은 기술자들이나 수용소 관리자의 친구였다. 혹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이거나 영리한 조직력으로 수용소 권력자들로부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이들은 매일 전투를 벌이고 허기와 추위,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 적에게 저항해야 하고 경쟁자를 동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곳에선 양심과 성찰을 벗어던진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결함들 덕분에 살아남았다.
 
본문이미지
수용소 사람들.

이들을 제외한 평범한 수용자들은 선발을 통해, 혹은 극도의 피로로 죽어갔다. 그들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 비인간들이다.
 
프리모 레비는 책에서 “이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읽을 수 없다.
 
프리모 레비는 극적으로 살아남은 운 좋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극심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렸다.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최악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레비가 보기에 수용소의 진짜 증인들은 이런 생존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란 죄책감에 시달렸고 끝내 198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사적 비극을 증언하고 있듯이, 프리모 레비는 전 생에 걸쳐 인간성의 파괴라는 문제에 천착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인간이 극한의 폭력에 노출됐을 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문학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이미지
생체실험중인 이시이 이로.

해방 콤플렉스, 기아와 보복, 성적 해방
 
해방 직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안 부루마의 『0년』은 1945년 종전 직후 잔해 속의 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증언한다.
 
1945년 4월 12일 베르겐‐벨젠이 해방되고 영국군이 도착해 본 광경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당시 수용소는 시체 더미와 배설물, 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영국군 중위가 차량 위의 확성기를 통해 “이제 자유”임을 알렸다. 하지만 상당수가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기아로 죽어갔다. 식량과 의약품 등의 물품이 도착했지만 이들의 주위를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수용소에 오기 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호 물품 하나가 도착한다. 상당량의 립스틱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굶주리고 쇠약해진 이들에게 웬 립스틱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해방이라는 소식에도 꿈쩍도 않던 그녀들이 하나둘 주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기 시작한 것이다. 립스틱은 당시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든 수용자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립스틱이야말로 그들에게 인간성을 돌려준 신의 물품이었다.
 
구호 물품으로 제공된 음식도 이들에겐 과분했다.
1945년 5월 영국 공군과 미국 폭격기가 네덜란드 상공에서 음식을 떨어뜨렸지만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된 포로들이 급작스럽게 죽는 일이 속출했다. 기아 상태에서 섭취한 기름진 음식을 소화시키기엔 이들의 위는 너무 쪼그라들어 있었다. 캐나다 군인들이 건넨 쿠키조차 때론 치명적이었다. 소화되지 않은 쿠키 조각이 부풀어 오르면서 위를 터트리며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은 탓에 2,000여 명이 숨졌다.
 
한편 생존자들은 생존을 넘어 생산력도 살아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무분별한 성행위에 집착했다. 섹스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멸종에 맞서는 저항 행위였다. 1945년에는  1939년보다 다섯 배 이상의 여성이 성병으로 입원했고 1946년 네덜란드에서는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39년에 비해 세 배인 7,000명에 달했다.
 
정의는 실현되었는가
 
섹스나 음식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복수에 대한 열망도 컸다. 복수는 위험한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데 대한 죄책감을 덮는 일종의 방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의 복수는 히틀러 제국의 책임자가 아닌, 주요 피해자를 향해 가해졌다. 가족과 친구를 잃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채로 고향에 돌아온 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 위협받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1945년과 46년 사이 폴란드에서는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반면 악명 높은 나치 동조자들이나 전쟁에 실질적인 책임이 기득권층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봤다. 가령 1938년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의 부대는 화학 무기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을 살해했다. 1942년에는 삼광작전으로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한국에서 납치에 일본군 성노예로 삼았는데 이도 오카무라가 제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1966년 자신의 집 침대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도쿄 재판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처벌을 받지 않고 도조 히데키만 처벌 받았듯이 너무 많은 범죄가가 무죄 방면되었다. 죄가 훨씬 가벼운 사람들이 희생양으로 처벌되었을 뿐 오히려 이들은 이후 화려한 경력을 쌓아갔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최악의 일본 전범인 이시이 이로 의사는 1959년 도쿄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본문이미지
전범 재판의 아돌프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전대미문의 광기와 폭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사악한 한 마리 괴물이 아닌, 평범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의 집합적 힘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책은 1961~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 책임을 맡은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는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라들의 명령에 따랐을 뿐,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한 나치 친위대 중간관리자에 불과했다.
 
당시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그는 명령받는 일을 이행하는 걸 의무라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의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는 것을 오히려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심지어 “상부의 명령을 잘 지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의 주장은 당시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문이미지
한나 아렌트.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장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이히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각 없음, 즉 무(無)사유에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제아무리 사회적 환경에 적합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찰하지 못하는, 즉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아이히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아이히만이 악하다면 바로 그것은 사유의 불능성이었다. 이런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도 언제든 그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악령은 바로 이런 무사유, 성찰 없는 맹목성에서 기인한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는지, 서로 죽고 죽이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지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등록일 : 2018-03-06 15:13   |  수정일 : 2018-03-06 15:14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사진

박미정 여성조선 기자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