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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

장군과 대위

글 | 엄상익 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2-14 10:00

교대역의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앞에 키가 큰 팔십대 쯤의 노인이 무심히 서 있었다. 눈 주위에 피곤을 알리는 붉그스름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노인의 약간 각이진 넓은 턱과 얇은 입술을 보는 순간 어딘가 눈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의 오랜 저쪽에서 분명히 맞닥뜨린 사람인 것 같았다. 노인도 나를 모르는 듯 엘리베이터의 유리창 밖으로 망연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기억의 서랍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청록색 안개로 덮여진 듯한 광막한 세월 저쪽에 있던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십년 철원의 산비탈에 있던 사단사령부의 건물이 꿈같이 나타났다. 별이 두 개 그려져 있는 붉은 장군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그곳 사단장 앞에서 전입신고를 하고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던 장군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경례를 부치고 있었다. 그때 보았던 턱과 입술의 모습그대로였다. 엘리베이터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앞에선 노인을 살폈다.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십대 젊은시절 만났던 그 장군의 눈은 인자함이 흘러나오는 쌍거풀 진 큰 눈이었다. 앞에 있는 노인의 눈은 눈꺼풀이 쳐지고 작은 눈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 시절의 장면들이 슬라이드 영상같이 뇌리 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내게는 절망스럽고 스산한 눈 덮인 겨울이었다. 고시낭인생활을 하다가 인생의 궤도수정을 했다. 장교 시험을 쳐서 군인이 되어 전방으로 배치된 때였다. 뜻대로 이루어진 게 없었다. 부모를 잘 만난 친구들은 군대 면제를 받거나 군에 가도 서울지역에 남았다.

나같이 속칭 빽이 없는 서민의 자식들이 밀려서 가는 게 철책선이 있는 최전방 부대였다. 냉전으로 남북이 증오로 얼어붙었던 시대였다. 북에서 내려와 우리쪽 군인들의 목을 잘라 가기도 하고 또 이쪽에서 철책선을 넘어 올라가 인민군 막사에 수류탄을 까 넣고 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하얀 눈이 끝없이 덮인 철원 벌판은 영하 이십도 밑으로 수은주가 내려가곤 했다. 전방 사단의 장군이었던 그는 의외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부하들에게 인자하고 남들에게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군대와 사회가 별개의 세계가 아니고 인간이 사는 곳은 결국 같다고 가르쳤다. 군대사회의 구조를 잘 관찰했다가 사회로 나가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었다. 마음속이 얼어붙었던 그 시절 그는 내게 따뜻한 봄볕같이 느껴졌다. 마음의 처마에 달렸던 고드름들이 그가 뿜는 봄볕에 녹으면서 나는 그 속에서 영롱한 위로의 무지개를 느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앞에 있는 키가 큰 노인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순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노인을 뒤따라갔다. 코트를 입은 노인의 뒷모습은 살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따라가 며 물었다.
 
“저 혹시 6사단장을 하시던 한 장군님 아니신가요?”
 
“네, 맞아요”
 
그가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때 법무장교였던 엄대위입니다.”
 
“아 맞아, 기억나요. 막 결혼하고 젊은 아내와 관사에 있었죠. 얼마 전에도 집사람하고 그때 얘기를 했었어요.”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십대의 젊은이가 육십대 말의 노인으로 변한 내 모습만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시절 따뜻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아내와 함께 찾아뵙고 저녁식사라도 대접했으면 합니다.”
 
“좋죠 그럽시다.”
 
장군과 대위는 40년 인생의 물줄기를 흘러내리면서 모두 노인이 되어 버렸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런 중에서도 따뜻했던 사람들은 잊혀 지지가 않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지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주변에 한줌의 온기를 내뿜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뜨거운 심장에서 나오는 온기는 수 십 년 아니 그 이상 영원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 같다.
 
 

 
칼럼니스트 사진

엄상익 변호사


등록일 : 2019-02-14 10:00   |  수정일 : 2019-02-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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