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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윤희영의 어른동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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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쿠바에서 만났던 세 여성에 대한 기억

글 | 윤희영 조선Pub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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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를 방문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5일(현지시간)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장관과 만나 양국 수교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국과 쿠바 외교장관 회담은 1959년 단교 이래 처음이다. 수도 아바나의 팔코호텔 인근 컨벤션궁에서 75분간 진행된 회담에서 윤 장관은 쿠바 측에 우리 정부의 수교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쿠바 난민 ‘보트 피플’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미국 플로리다로 배를 띄우고 있던 1994년 8월, 취재 차 쿠바를 방문했을 때 기억이 되살아났다. 벌써 22년 전이니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아바나에서 만났던 세 여성에 대한 기억은 오롯이 남아있다. 애인이 있는 20대 아가씨, 딸 하나를 두고 있다던 30대 초반 유부녀, 중학생쯤 되보이던 10대 소녀들이었다.
 
- 아바나 시내 국제프레스센터에서 만난 그녀
 
쿠바 방문을 위해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소재 여행사에서 비자를 받았다. 40달러를 냈던 것 같다. 조그마한 영수증 같은 종이 쪽지를 여권에 끼워줬다. 그게 비자였다. 여권에는 쿠바 입국•출국 도장도 찍지 않는다. 쿠바 여행을 제한받고 있던 미국인들도 그렇게 쿠바 관광을 위해 드나들었다.
 
아바나의 관문인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곧장 국제프레스센터로 향했다. 1990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해빙 무드를 타고 있던 터여서 정면 돌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관광 비자로 혼자 취재를 다녀봐야 길거리 스케치 정도밖에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 국제프레스센터 로비 대기실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스페인이나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 쿠바 취재를 온 여기자인 걸로 생각했다.
 
도움을 받아볼까 싶어 말을 걸었다. 그런데 기자가 아니라고 했다. 국립 아바나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유전생명공학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쿠바 현지 여성 과학도였다. 이름은 마리아 델 카르멘. 나중에 알게 된 나이는 29세. 국제프레스센터에는 볼 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마음도 착해 보이고 친절했다. 그녀에게 솔직히 얘기했다. 한국에서 보트피플 사태와 관련 쿠바 취재를 왔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머나먼 타지에 홀로 날아와 허둥대는 동양 남자가 측은해보였던 모양이다.
 
그 길로 그녀와 함께 프레스센터를 나섰다. 북한의 최우방이자 한국의 적성국인 쿠바의 국가기관이 한국 기자의 취재를 적극 도와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섣불리 기자 신분을 노출했다가 감시 요원이 따라붙고 취재 동선만 제한당하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동 수단이 문제였다. 어디서 차량을 빌릴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낡은 승용차를 가진 친척 아저씨가 있는데 부탁해보겠다고 했다. 하루에 50달러를 줄 테니 종일 기사 역할을 해줄 수 있느냐고 전했다. 득달같이 달려왔다. 50대 후반쯤 돼보였다. 그런데 조수석에 젊은 남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입국 때부터 요주의 감시 대상으로 분류돼 요원이 따라붙었나 했다. 아니었다. 그 아저씨의 사위였다. 국립 아바나 대학 의과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50달러에 하루 종일 운전(연료비 포함)과 가이드 맡기는 것도 미안한데, 왜 사위까지 데려와 부담을 주나 싶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당시 미화 50달러는 그들에게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국립유전생명공학센터 연구원으로 특별대우를 받는 그녀 마리아의 한 달 월급 350페소가 암거래시장에선 5달러 가치도 안된다고 했으니, 단 하루 만에 마리아 월급의 10개월치를 버는 셈이었다. 그렇게 나흘을 다녔으니 200달러, 마리아의 3년 4개월치 월급을 그 장인과 사위에게 준 셈이었다.
 
장인은 그지없이 착한 사람이었다. 매일 저녁 50달러를 건네주면 감지덕지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 신봉자인 사위는 어떻게든 달러를 더 뜯어내려고 안달이었다. 장인은 이것 저것 그냥 해주려고 하는데, 사위는 왜 그러느냐고 장인을 나무라고 훈계했다.
 
(중략)
 
숙소는 아바나 시내 미라마르구 3가70번지 넵투노 호텔이었다. 별 4개짜리 지상 23층 호텔이지만, 겉만 그럴싸할 뿐 객실 시설은 여관 수준이었다. 여행가방을 열자 청바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취재를 도와주는 현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남대문시장에서 대여섯 벌 사온 것이었다. 이튿날, 마리아와 장인에게 주기 위해 두 벌을 들고 나왔다. 사위 것은 챙기지 않았다. 야박하게 구는 녀석이 얄미워 내키지 않았다.
 
마리아는 나흘 간 매일 퇴근을 한 후 곧바로 달려와 뭐든지 도와주려 애를 썼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 그렇게 성심성의껏 도와주려 했던 그녀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달러라도 좀 쥐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례일 것 같았다. 아무 조건없이 선의로 도와주려는 그녀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히려 뮤지컬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청바지를 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쿠바에서 서민들이 큰 부담없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몇몇 있는데, 안경 처방과 치아 보철은 무료이고, 아이스크림 값과 뮤지컬 관람 요금은 거의 껌값이라고 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이 일반 대중의 불만을 사그라뜨리는 수단이었다.
 
뮤지컬 공연 시간은 저녁이었다. 마리아에게 퇴근 후 호텔로 오라고 했다. 평상복 차림의 그녀 손에 종이 가방 하나가 들려있었다. 공연장에 갈 때 갈아입고 갈 드레스였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밖에 있을 테니 방에 들어가 갈아입고 나오라고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직원들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호텔 투숙객 외에 외부 여성은 객실에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옷만 갈아입고 나오게 하겠다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 쿠바 호텔들 직원들은 모두 정보기관 요원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호텔 직원들이 전원 국정원 요원들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마리아는 호텔 지하 화장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나는 호텔방에 잠시 올라갔다 왔다. 그런데 그녀가 1층 로비 밖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서럽게 울어댔다. 진정시키는 데 한참이 걸렸다. 호텔 남자 직원이 옷 갈아입는 화장실까지 뒤쫓아와 “Eres puta, no?”라며 다그쳤다고 했다. “너 매춘부 아니냐?”고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공부만 해왔던 여성 과학도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겨우 진정을 시킨 후에야 공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애써 미소를 되찾은 마리아가 아이스크림도 사줬다. 쿠바 일반 대중의 몇 안되는 호사여서인지 길거리 아이스크림 행상들 앞에는 모두 길게 줄이 서있었다. 공연 내용은 그저 그랬던 것 같다.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그녀가 산다는 아파트로 갔다.
 
 그녀의 애인이자 같은 국립유전생명공학센터 연구원도 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과학 연구인력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특별히 제공해준 아파트로, 크기는 매우 작았다. 엘리베이터도 있기는 했는데, 세 사람이 타면 꽉 찰 정도로 좁디 좁고, 오르내릴 때 덜컹거려 불안했다. 그마저도 수시로 정전이 돼 걸어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미남이었다. 썩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경계하는 눈치였다.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지도 않았다.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온 사람이라 그랬는지, 자기 여자친구가 한 눈을 팔까봐 경계심을 품어서 그랬는지, 몹시 냉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철저한 Fidelista였다. 피델 카스트로를 우상처럼 신봉하는 피델리스타였다. 마리아도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쿠바의 잠재력과 카스트로에 대한 찬사만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밤 그 아파트에서 마리아와 작별을 했다. 쿠바를 떠나 다시 멕시코시티를 거쳐 귀국하기 전날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남자 친구는 너무 냉정한 성격인 것 같아 떠나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귀국 후 한 두 차례 쿠바에서 운전과 가이드를 해준 그 ‘장인’ 집으로 전화를 해 마리아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잊었다가 몇 년 전 다시 전화를 걸어봤는데,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제 50세를 넘겼을 마리아와 그의 남자 친구는 아마 지금쯤 쿠바 과학단체나 정부 기관의 요직에 올라있을테다.
 
- 말레콘 길거리에서 만난 30대 유부녀
 
말레콘은 아바나 시내 해안가 방파제를 따라 나있는 큰 길거리다. 말레콘 바로 앞바다에서 미국 플로리다를 향해 배를 띄우는 ‘보트 피플’도 있었다. 말레콘은 많은 아바나 시민들이 산책을 나와 휴식을 취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하는 명소다. 그런데 이 곳은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여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차를 잠시 세우고 손짓을 하면 올라탄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코카콜라 1캔만 사줘도 따라간다. 1달러만 줘도 몸을 판다고 했다.
 
장인이 운전하고 사위가 가이드 역할을 하는 차를 타고 가다 말레콘에서 한 여자를 태웠다. 쿠바 경제 실상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늘씬하고 글래머러스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검은색 계통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었던 듯 하다. 쿠바 여성들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옷이 터질 듯 팽팽한 몸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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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근처로 갔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공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코카콜라 1캔을 사주고 호텔 옆 잔디밭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어린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남편과는 헤어져 생계 해결을 위해 달러를 벌러 가끔 길거리로 나선다고 했다. 외국인 관광들을 상대하는데, 호텔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 외부에서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일반 주택가에 그런 관계 장소 용도로 빌려주는 방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방들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방 빌리는 돈이 아까워 그런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나가 야외에서 한다고 했다. 돈은 주는대로 받는다고 했다. 국가 기관 연구원 월급도 암거래 시장에서 5달러 가치 밖에 안된다고 했으니, 달러로 받는 매춘 수입은 상당히 많은 것이었다. 이런 저런 것들을 더 물어보고 헤어지면서 10달러짜리를 쥐어줬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고마워 어쩔줄 몰라했다.
 
이튿날 호텔 방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녀였다. 방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운전을 해준 장인•사위에게 물어본 듯 했다. 전날과 달리 목소리가 매우 끈적끈적했다. “Estoy loca por ti.” “나 당신한테 미쳐있어요”라는 말이었다. 달러를 더 긁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노골적으로 나왔다. 취재에 필요한 얘기는 거의 다 들었으니 다시 만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녀는 직업적인 거리의 여자가 돼 있었다. 지금은 50대 중반을 넘겼겠다.
 
- 중국 음식점 앞에서 만난 10대 소녀들
 
당시 쿠바에는 쿠바 국적의 한국인 1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로 이주했다가 쿠바로 옮겨 온 한국인 1세들의 후손이다. 한때는 200명이 넘었으나 이민1세 들이 모두 사망해 100여 명으로 줄었다. 1980년대 중반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이민1세 한 분이 사망해 이제 본토박이 한국인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아바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식당이나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세 한 사람이라고는 환 홍이라는 당시 현역 쿠바혁명군 대령과 이미 은퇴한 에리 베토 이라는 전 공군 중령을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아바나시 구아바나구 메르카데레 거리에 있는 중국식당 ‘라 토레 데 마르필(La Torre de Marfil) . 한자로 상아탑 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이 식당에서 일하는 이씨 3형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맏형인 이항복씨(67)와 셋째인 윤복씨(57)는 종업원으로, 둘째인 상복씨(63)는 지배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7남3녀 10형제 중 동생 하나는 죽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했다. 이들 3형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가 1909~1910년쯤 한반도에서 멕시코로 이주했다가 1920년 다시 쿠바로 건너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들의 아버지는 1948년에, 어머니는 1967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지만 "하나 둘 셋 ", "이리 와", "밥 먹어" 등 간단한 표현 몇 개를 기억하고 있는 둘째 상복씨는 아버지의 고향이 평양, 어머니 고향이 서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쿠바 현지 소녀 2명을 만난 것은 그 중국 음식점 근처 노천 카페에서였다. 목을 축이며 쿠바 한인 후손들의 기구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 기껏해야 10대 중반도 되지 않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한 명은 뒤에 서있고, 다른 한 명이 곁으로 다가와 “Que hora es?”라고 물었다. “몇 시냐”고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아, 10대 어린 소녀들까지 이렇게 달러를 벌러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안쓰럽다는 생각과 함께 생존에 대한 비애감마저 느껴졌다. 그 앳된 모습이 너무 처연해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냥 시간만 알려줬다. 그로써 그 소녀들은 단지 시간을 물어봤을 뿐인 것으로 서둘러 치워버렸다. 그 소녀들이 지금은 30대 후반의 여인들이 돼있겠다. 시집들은 갔는지, 지금은 사는 형편이 좀 나아졌을런지…
등록일 : 2016-06-11 07:12   |  수정일 : 2016-06-1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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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영 조선Pub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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