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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윤희영의 어른동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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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에서 10년 전 만났던 北 노동자 윤광호씨

글 | 윤희영 조선Pub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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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도하에서 남쪽으로 40㎞떨어진 메사이드 연립주택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채승우기자

중동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지난달 15일 북한 건설 노동자 2명이 보위부원의 감시를 뚫고 현지 경찰서로 탈주(脫走)했다는 사실이 조선일보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이들은 경찰서에서 "착취가 너무 심해 견딜 수 없었다. 2년이 넘도록 폭염(暴炎) 속에서 일했는데, 벌어놓은 돈이 한 푼도 없다"며 평양의 가혹한 상납 지시에 대해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문득 지난 2006년 12월 도하 아시안게임 취재를 갔다가 만났던 한 북한 노동자 생각이 났다. 당시 아시안게임 북한팀 경기가 있는 날 경기장엔 하나같이 검은색 양복을 갖춰 입은 북한인 수백~수천명이 관중석에 몰려왔다. 카타르와 쿠웨이트 등에 송출돼 외화벌이를 하고 있던 북한 노동자들을 실어날라 응원전을 펼치게 했던 것.
 
당시 카타르에만 1000명이 넘는 북한 노동자들이 나와 있었다. 대부분 목수, 철근공 등 건물 골조를 세우는 건설 노동자였다. 쿠웨이트 인력송출업체를 통해 카타르에 건축•도로•조경사업 현장 노동자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는 북한의 조경회사 지사가 있었다. 오전 7시부터 최소 12시간 일하고 한달 250~300달러(약 23만~28만원)를 받는다고 했었다.

카타르 도하에 파견나온 북한 노동자 윤광호씨를 만난 것은 12월12일이었다. 카타르 주재 한국대사관 측에 북한 노동자 관련 취재를 하면서 휴대폰 번호를 남겨놓았는데, 대사관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하 시내 한 병원 응급실에 북한인 한 명이 실려왔다는 긴급 연락이 왔다고 했다. 병원 측에서 북한대사관에 연락해야 할 것을 남•북한 구분을 하지 못해 한국대사관으로 연락을 취했던 것이었다. 도하 시내 하마드병원 응급실이라고 했다.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 타고 하마드 병원으로 향했다. 오후 1시쯤 됐을까. 응급실에 들어서니 검은 머리 한 사내가 머리 부분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었다. 전날 밤 앰뷸런스에 실려왔고, 머리에 중상을 입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있으니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돌아왔다.

서울 말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북한말을 흉내내 말을 해봤다.

“동무, 어떠케 된 겁네까. 여기 살고 있는 공화국 사람입네다.”
 
“나무 심으러 왔시요.”

서른살이라고 했다. 네 형제 중 셋째이고, 중국을 거쳐 카타르에 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조국에서 지성금성합영회사의 노동일을 했다”는 그는 1개월 예정으로 카타르의 조경사업 일을 하러 왔다고 했다. 도착한 지 사흘 됐다고 했다.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한테 떠밀려서…”라고 할 뿐 자신이 어떻게 어디에 떨어져 머리를 다치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응급실 간호사들에 따르면 경찰과 함께 윤씨를 병원 응급실로 옮긴 북한인들은 잠시 후 그의 여권 등 소지품들을 모두 챙겨 몰래 사라졌다.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응급실 환자 차트에는 박장철이라는 엉뚱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특수 임무 수행 중이던 공작원도 아닌 일반 노동자여서 굳이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었는데도, 왜 그랬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얼마가 나올 지 모를 병원비가 겁나서, 죽어버리면 그 시신 뒤치다꺼리 하기가 귀찮아서였을까. 하지만 원유 생산 부국 중 부국인 카타르는 일단 입국하는 순간부터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든 의료비가 공짜인데 그걸 모르고 지레 겁을 먹었던걸까.
 
북한 말투를 흉내내며 이것 저것 계속 물어보는데, 신음을 해가며 하나 둘 대답하던 윤광호씨가 버럭 성질을 냈다. 소변이 마려워 죽겠다는 것이었다. 응급실 간호사에게 어쩌면 좋겠느냐 물었더니 생식기에 배뇨 장치를 이미 끼워놓았으니 그냥 배설하면 된다고 했다. 윤씨에게 그렇게 전해줬다.

그러면서 생리현상을 호소할 정도이니 치료를 받으면 곧 괜찮아지겠구나, 완쾌되면 북한대사관이든 카타르 북한 노동자들에게든 연락이 돼 어쨌든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병원 응급실을 나서면서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 한 켠으로 쓴웃음이 났다. 소변을 참기 힘들다면서 내뱉은 그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생식기에 배뇨 장치를 끼워놓았으니 병상에 누운 상태 그대로 소변을 봐도 괜찮다고 했더니 하는 말,

“X대가리를 묶어놔서리 어디 오줌을 쌀 수가 있어야디.”
 
남북 분단 70년이 돼가면서 남북한 언어에도 많은 괴리가 생겨나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도 아직은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처럼 ‘X대가리’라는 말을 쓰는구나.” 그 속어 한 마디가 아련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 때 그 윤광호씨는 지금 북한 어디에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올해로 40세가 됐겠다.
등록일 : 2016-04-28 15:23   |  수정일 : 2016-04-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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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영 조선Pub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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