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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조남준 기자의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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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최영, 임경업 장군, 성삼문 등 충신들 배출...충청인 기질론과 충신들

윤희영(尹熙榮) 기자의 <충청도 기질…> 기사를 읽고, 필자가 2001년 12월 월간조선(月刊朝鮮)에 기고한 <충청인 기질론>을 일부 발췌하여 싣는다.

글 | 조남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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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의 옛 지도
 
1. 충청인 기질론

〈…(전략)…사람이란 태어난 지리적 환경과 부모, 친척, 친구를 포함, 성장기 주변의 사람들이나 인문적 영향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간다. 이 같은 여건이 국가를 단위로 할 때는 민족성, 또는 국민성으로 나타나며, 지역으로 좁혀 보면 지방의 특색 있는 기질로 발현(發現)하는 것이다.
 
지역 색을 말할 때의 대전제는 민족성이나 국민성에 비하면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란 점이다. 「대개 그렇다」는 차원이지, 칼로 무 자르듯 명백한 선을 긋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족성이나 국민성도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인데, 황차(況且) 지역 색이겠는가. 하지만 나라나 민족마다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분명히 존재하듯, 지역 색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충청(忠淸)도는 본래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말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삼한(三韓)시대에는 마한(馬韓)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주로 백제(百濟)의 판도에 속했다가 신라(新羅) 진흥(眞興)왕이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후에는 지금의 충북지역이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공주-부여가 백제의 수도가 되면서 충청도는 백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통일신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충주에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돼, 중원이라는 이름의 시발이 됐다. 고려 성종(995년)때, 전국을 10도로 구분하면서 중원도(中原道)라 했고, 예종1년(1106년) 처음으로 충청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후에 양광(楊廣 ․ 양주 광주)로 바뀌었다가 공민왕 5년(1356년) 다시 충청도의 이름을 되찾았으며, 역적이 나왔을 때, 공홍(公洪 ․ 공주 홍주), 공충(公忠 ․ 공주 충주)로 잠시 바뀐 적도 있으나 대체로 충청도라는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
 
1896년 갑오경장 이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나눠졌다. 조선조 태종 때 여흥(여주), 안성, 음죽, 양성, 양지가 경기도에 이속(移屬)되고 경상도에서 옥천, 황간, 영동, 청산, 보은 등을 넘겨받았다. 1963년 금산군이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됐다.
전국이 8도로 나뉜 조선조 이후 만들어져, 민중 사이에 구전돼 내려 온 사자성어(四字成語)는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이 성어는 각 지역 사람들의 성향을 네 자의 한자말로 비유해 놓고 있다. 함경도 이전투우(泥田鬪牛), 평안도 맹호출림(猛虎出林), 황해도 석전경우(石田耕牛), 경기도 경중미인(鏡中美人), 강원도 암하노불(岩下老佛), 경상도 운천고학(雲天孤鶴), 전라도 풍전세류(風前細柳), 충청도 사람을 청풍명월(淸風明月)로 비유했다.
 
조선조 숙종 때 사람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의 인심조(人心條)에서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짙다』고 했다. 또 『산과 강이 평탄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 가까이 있어서 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함께 『서울의 세가(勢家)들이 이곳에다 전답과 집을 두는 등 생활의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풍습이 서울과 가까워서 별로 큰 차이가 없으므로 살 곳을 택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문적 여건을 덧붙이고 있다.
 
헌종 때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敲)」에서 충청도 사람의 특징을 『호서(湖西=충청)는 이익과 권세를 노린다』고 평했다. 이중환과 비슷한 견해다. 이 같은 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누천년을 두고 겪어온 경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 없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충청인의 특징은 특히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는 성어(成語) 속에 잘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청풍명월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언행이 젊잖다. 공손하다. 서두르지 않는다. 날카로운 면이 적다. 모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아무하고나 잘 어울린다. 무덤덤하고 싱겁다. 미온적이고 소극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온건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혹자는 이 지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중립, 무색 성향의 논거를 대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정립(鼎立)시기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친 곳이었다. 예컨대 충북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의 북쪽은 고구려였고 서쪽은 백제, 동쪽은 신라였다. 충남 북부를 포함한 한강 일대의 경우, 백제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고구려 땅,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편임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졌든, 겉으로는 어느 쪽에도 고개를 숙이고 순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순응 잘 하는 기질 때문에 조선조 이후 최근까지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면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실시해보는 곳이 충청도였다.
 
충청인의 기질을 논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어느 시골의 오일장 장터에서 시금치, 고구마 순 몇 다발, 고추 몇 무더기, 옥수수 몇 개를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할머니와 사는 사람 간에 오간다는 대화다.

  『이거 팔거유?』
  『그럼 구경시키러 갖고 나왔겄슈?』(예,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월매래유.』
  『알아서 주세유.』(절대로 얼마라고 먼저 말하지 않는다.)
  『1,000원 드리쥬.』(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만일 값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훽 돌아앉으며)
  『갖다 돼지나 멕일래유.』
 
  이 대화를 보면 팔려고 애쓸 것 없다는 느긋한 태도와 함께 속내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음속에는 계산이 다 돼 있고, 이 계산에 맞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1,000원 받으면 될 것을 1,200원이나 1,300원으로 에누리해서 값을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이 대화는 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에누리를 하면 깎아서 산 사람은 처음엔 싸게 샀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속지 않았나 의심할 수도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런 후유증을 남기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전국의 어느 시장엘 가도 「충청상회」나 「충남상회」라는 상호가 붙은 가게가 많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물건 값을 속여 팔지 않는다는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인상을 노린 것이리라.
 
무덤덤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인의 예화(例話)는 수없이 많다. 조순(趙淳)씨가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했을 때, 선거캠프에 있던 민주당의 이해찬(李海瓚 충남 청양 출신) 의원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그는 서울 관악구에서만 4선을 기록 중이었다.

『관악구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 표만 받으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다. 두 지역 출신 유권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곳에 가서는 「선생님(김대중 대통령을 지칭)을 따라다니는 이해찬입니다」하면 「와-」하는 함성과 함께 「당신 찍어줄 테니 걱정 말라」는 격려의 말이 쏟아진다. 자연히 마음이 느긋해진다. 다음 충청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충남 청양 출신, 이해찬입니다」라고 해봐야 반응이 없이 조용하다. 지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되게 불안해진다. 그런데 개표를 한 후에 분석해 보면 시끌시끌하게 지지한다고 한 지역에서는 과반수 내외의 지지표가 나왔고, 반응이 조용해서 불안하게 생각했던 지역에서는 절대 다수의 지지표가 쏟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충청도 기질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충청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어리숭하게 보이는 점이다. 옛날부터 「서울깍쟁이」가 충청도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있었다. 잘 속아주는 어리숭한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충청도 사람들이 항상 계산하지 않고 밑지는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처음부터 이익을 보려하기보다 몇 번은 손해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한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보다 손해를 보는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미안한 마음도 갖는다.
 
상대방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쯤 해서 기회를 보아가며 이쪽의 실속도 차린다. 그것도 큰 이익을 본다. 작은 손해를 여러 번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큰 이익을 봄으로써 전의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중환(李重煥)이나 이규경(李圭景) 같은 옛 사람이 평한 기질이 나오는 것이다. 「속도 창자도 없다」고 얕보다가 뒤통수를 맞는 셈이다. 충청도 사람을 겪어보고는 「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었다」고 할 정도로 혀를 내두르는 외지인도 많다. 하지만 대체로 상대방은 손해 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종전에 속아 준 것을 감안해서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잘 속아주는 기질 때문인지 충청도를 가리켜 흔히 「멍청도」라고 한다. 타칭(他稱)일 뿐 아니라 자칭도 「멍청도」다. 하지만 「멍청도」소리를 하면서, 그리고 들으면서 결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멍청한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법이지만, 멍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이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양쪽 다 진짜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잘 따지는 것도 이 지역의 뚜렷한 특징이다. 이익을 전혀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명분과 이익이 부딪칠 때는 명분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명분을 따지다 보면 대체로 실속을 차리기 힘들다. 당장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실속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도 「멍청한」 기질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 됨됨이가 돼먹지 않았다는 의미의 「못된 놈」이라는 욕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자존심과 자부심을 훼손하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도는 백제 때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를 품에 안고 있고, 조선조 후반기엔 권력을 독점했던 기호(畿湖)세력의 축을 이룬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젊은이를 야단칠 때, 「주리 틀 놈」, 「우라질 놈」이라는 욕을 자주 쓴다. 주뢰(周牢)는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개의 막대기를 끼워 넣고 비트는 형벌이다. 오라는 죄인을 묶는 붉고 굵은 줄을 말한다. 모두 상민들을 붙잡아다 사형(私刑)을 가했던 양반시대의 잔재 같은 단어다. 그런 만큼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2, 충청도 출신 충신들

율곡 이이(李珥)로부터 시작된 조선조 중기 주자학의 학맥은 율곡의 제자이자 조선 예학(禮學)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사계 김장생(金長生 충남 논산)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金集)으로 이어졌다. 사계와 신독재의 제자가 조선 후반기를 지배한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 충남 연기)이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우암의 추종자와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서인의 후신, 노론이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수 백 년 간 대를 이어 권력을 독점했다. 충청인들이 대의명분을 잘 따지는 것은 정권을 담당했던 양반, 즉 선비로서 근왕(勤王=임금을 받드는 행위)정신이 강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왕이 곧 국가였으니까, 지금 말로 하면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조용한 것 같지만 국가가 위태롭거나 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허다한 충신, 열사, 의인들이 배출된 것도 명분을 더 앞세우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 때문이다.

역사적인 충청인을 꼽아보자. 백제말기의 부여성충(扶餘成忠), 윤충(允忠) 형제, 흥수(興首), 계백(階伯 이상 부여) 등을 필두로, 간난신고끝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충북 진천), 충주성 항몽(抗蒙)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김윤후(金允侯) 장군(충북 충주), 쓰러져가는 고려를 지탱해보려다 이성계(李成桂)에게 죽임을 당한 「붉은 무덤」의 최영(崔塋) 장군(충남 홍성),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실천한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 충남 서천),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충남 홍성), 박팽년(朴彭年 대전)과 사육신에 버금가는 김문기(金文起 충북 영동),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李舜臣 충남 아산), 진주대첩의 주인공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충북 괴산), 병자호란 때 유일하게 청에 대항한 임경업(林慶業 충북 충주) 장군 등이 역사상 이름난 충청인이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50여 년 간,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어난 의병운동 초기, 일본군과 싸우다 홍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충남 청양), 을사보호조약에 반대, 73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적국(敵國)의 식량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斷食)끝에 순국한 면암 최익현(崔益鉉 충남 청양), 일본의 침탈에 항의하다 부자(父子)가 나란히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수당 이남규(李南珪 충남 서천),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李相卨 충북 진천),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한 유학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충북 제천) 등은 비교적 근왕의식이 강했던 독립투사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사단을 무찌른 무장 독립운동사의 금자탑 김좌진(金佐鎭 충남 홍성), 김좌진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이룩한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충남 천안), 3ㆍ1만세운동의 꽃 유관순(柳寬順 충남 천안), 3ㆍ1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손병희(孫秉熙 충북 청주),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3ㆍ1 독립선언 민족대표 한용운(韓龍雲 충남 홍성),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가와(白川) 대장 등을 폭살함으로써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으로부터 『중국군 몇 개 사단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칭송을 들은 윤봉길(尹奉吉 충남 예산),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초대 회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이상재(李商在 충남 서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李東寧 충남 천안),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민족주의 사학(史學)을 정립한 申采浩(충북 청주), 상해임정의 국무총리 대리를 지내다 임정 내에 내분이 생기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신규식(申圭植 충북 청주) 등 꼽자면 한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해방 전까지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박헌영(朴憲永)과 洪命熹(홍명희)도 각각 충남 예산, 충북 괴산 출신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충청인의 투쟁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후략)》 
 
관련기사 : 尹熙榮 기자의 기사 <충청도 사람들 기질이 도대체 어떻길래...>
등록일 : 2015-02-27 09:56   |  수정일 : 2018-03-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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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 2015-02-28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14
혹시 아베?
멍청도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31 반대 : 21
충청도인이 가장 음흉하다. 멍청한 척 하면서 교활하게 자기 실리를 최고로 찾이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충청도인들이다. 말그대로 백주에 코 베어갈 사람들이다.
UMC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8
청주에서 천안가는 길목에 병천,목천라인, 이 동네들은 한집 건너 한집이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ㅎㅎ 왜 독립기념관이 목천에 있는지 가보시면 이유를 아시게 될것이오.
이병곤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7
선생님의 의견을 읽고나니, 선생님의 의견 별 볼일 없다는 생각만 듭니다. 역사상 충청도 인물을 말씀하면서 성충, 윤충, 계백등등을 말씀하셨지만, 이들이 충청도 출신인지 아닌지는 you dont know, I dont know. Nobody knows 상황입니다. 김유신 역시 충북진천 출신 맞지만, 아버지 소현이 잠시 그곳 만노군 태수?던가로 부임했을 때 태어났고, 김유신이 자라고 성장한 곳은 신라왕경 즉 경주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진흥왕이 가야금을 만든 우륵을 충청도에서 만나는데, 우륵 역시 충청도 사람이겠군요.
      답글보이기  정기철  ( 2015-03-08 )  찬성 : 7 반대 : 2
이자는 지가 틀리게 알고 있는 주제에 우겨대는데 달인 이구만.김유신 애비는 소현이 아니라 서현,김서현 이며,김유신은 충청도에서 태어난 이후에 성장한후,화랑도에 들어가면서 크게 되는 인물이었다.또한 태수는 중국의 관직명 이었다.뭘 안다고 꽤나 아는척 하네.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3-15 )  찬성 : 5 반대 : 0
지적은 감사한데, 틀린구석이 더 많군요. 옛글 기록은 김서현인지 김소연인지 잘 모르겠다였는데... 김소현으로 기억하고 있었군요. (나의 틀렸음을 인정합니다.) 태수는 중국의 관직명이었습니다. 한데 신라의 관직명이기도 했고요.. 내가 틀린 부분은 인정하겠는데 그렇다고 선생님과 뭘 더 의론할 수 있을 것 같아 의견 보태는 것은 아닙니다.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3-15 )  찬성 : 3 반대 : 0
또한 화랑이 되었던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왕족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100%에 가깝습니다. 화랑도에 들어가면서 크게 되는 인물이라고요? 헐...
      답글보이기  정기철  ( 2015-03-21 )  찬성 : 3 반대 : 1
화랑도가 왕족이면 뽑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임명하면 끝이지. 증거도 없이 추정만 하는건 말장난일 뿐이다.
정기철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5
다른 인물들을 예로 들은 것은 잘했지만 김유신 만은 잘못됐다.왜냐면 김유신은 원래 신라에게 멸망후 충북진천으로 이주당한 가야왕족 후손이었다.가야부흥운동은 커녕 신라에 붙어 김춘추가 백제,고구려를 멸망 시킬때 중국한족을 식민지배한 선비족 당나라를 끌어들일때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하여 김춘추 생전에는 백제멸망,김춘추 사망후에는 문무왕인 아들 김법민과 고구려 멸망에도 가담 했으니 영웅이 아니며 통일신라 라는 기록도,유적도,문헌도 없다.이는 일본이 지어낸 헛소리로,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은 만주를 상실한 반도국가로 날조하기 위함 이었으므로 김유신이 영웅이요,발해멸망 후에도 1909년까지 지배한 간도(현 요하동쪽과 송화강 이남)를 뺀 대동강 이남만 통일한 신라는 있을수 없는 것이다.간도와 한반도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장맥산맥 인것만 봐도 한민족은 반도민족이 절대 아니다.한민족은 반도민족도 아니요,대륙민족도 아니므로 해륙민족,반륙민족으로 칭하는게 맞다.고로,한민족은 역사관을 논하고,역사를 서술할때,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와 대륙을 합친 해륙사관,또는 반도사관과 대륙사관을 합친 반륙사관 으로 칭하는게 옳다.어쨋든 충청도인들이 다시는 종북정권 등장 때처럼 종북세력을 밀어주는 짓은 하면 안되고,간도를 수복하는데에 앞장서거나 그런 인물들을 밀어줘야 하는 것이다.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2-27 )  찬성 : 6 반대 : 1
선생님은 뭔 글을 읽고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김유신이 충북진천에서 출생한 것 맞습니다. 가야왕족후손 맞습니다. 그런데 진천으로 이주당한 가야왕족 후손이요?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2-27 )  찬성 : 5 반대 : 1
또한 이주당한 가야왕족이 왕의 동생의 딸이던가요?를 꼬셔서 김유신을 낳았는데, 글쎄요.. 갈수록 이해가 안되는 말이고.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2-27 )  찬성 : 1 반대 : 1
또한 어디서 글은 읽으셨는데, 문무왕인 아들 김법민? 문무왕의 아들 김법민?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십시오. 문무왕이 김법민입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 어디서 진실관계를 왜곡하고 맘대로 창조해낸 쓰레기 글을 보셨습니다. 그 뒤의 글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글이었습니다.
      답글보이기  정기철  ( 2015-03-08 )  찬성 : 3 반대 : 0
김춘추 아들이 문무왕 김법민 인데,어디 김유신 아들이라고 썼누? 또한 누가 그대보고 대답해달라 요구한적도 없다.사실대로 쓴 댓글을 지맘대로 왜곡한다고 지껄이고 자빠젔네.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5-03-15 )  찬성 : 7 반대 : 1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인데, 어머님은 누구셨던가요? 김법민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셨던가요? 혹시 생각은 해보셨나요?
      답글보이기  정기철  ( 2015-03-21 )  찬성 : 2 반대 : 0
김법민의 엄마는 김유신 여동생이고,할머니는 가야왕족 후손인 김서현과 혼인한 만명이라는 여자로,신라왕족 이었다.얘는 김법민이 김춘추 아들이라는데도 뭘 따지는겨? 댓글내용은 보지도않고 지말만 맞다고 우겨대네.
우승우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10
그럼...이완구 총리는 충정도 사람이어서 그 따구 편법으로 병역면제 하고, 부당산 투기하고, 언론협박했나....참..이완구 띄우기도 도가 지나치면..불편한법..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가보다. 공무원으로 어떤 삶을 살았나가 중요한것을..허∼∼
DAVIDBAE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1
충무공께서는 서울 인현동 출생 이지만
본가 가 아산이기에 충청출신입니다
신경억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9 반대 : 0
충청 출신이어서 무난합니다,,,
정규용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0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충남 천안 입니다
이인수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8 반대 : 14
잘 읽었습니다. 다만 몇가지 다른 사실이 있는듯 하여 몇자 적어봅니다.
본디 이 순신 장군은 서울 출생이며 아산에 선영을 두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불사이군의 실천을 보이신 목은 이색의 출신지는 경북이며 충남 서천에 선영이 있습니다. 선영이 있는곳을 출신지라고 해도 되는지요?
김종수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23 반대 : 6
ㅎㅎ 잘 읽었습니다. 감상 한마디. 이해찬이는 못된놈이고 주리를 틀놈이네요.
조상현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28 반대 : 3
어쩐지 그런역사가 있엇군요.충청도분들이 그래서 현명하군요^^
장진영  ( 2015-02-27 )  답글보이기 찬성 : 13 반대 : 10
글쓴이 개인견해에 적극동의∼ 이순신장군은 서울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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