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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조남준 기자의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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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의 주인은?

百濟의 大王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王이나 侯로 책봉

글 | 조남준 언론인
필자의 다른 기사

 
2014년 10월24일자 조선일보(朝鮮日報) A2면에 백제(百濟)와 관련된 기사가 전면을 장식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금동신발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신발이 전남 나주시 다시(多侍)면 복암(伏岩)리 부근 정촌 고분에서 출토됐다. 지난해부터 정촌 고분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올해 이곳 돌방무덤 3기에 대한 내부 발굴 조사에서 백제 금동신발을 비롯해 금제 귀걸이와 금제 장신구, 마구(馬具),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석침(石枕=돌베개)과 각종 토기류가 쏟아져 나왔다며 10월 23일 유물을 공개했다. 백제 금동신발로는 17번째 출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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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의 크기로, 발등 끝 부분에 용머리 장식이 올려졌는데, 이런 장식의 신발 출토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신라를 통틀어 처음이다. 용머리 장식은 대롱처럼 연결돼 탈 ․ 부착할 수 있게 했는데, 한 짝은 용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 짝엔 온전히 남아 있다.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를 부착했고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23개를 붙였다. 바닥 한복판에는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한 연꽃무늬가 있고 연꽃 중앙에는 꽃술을 새겼다. 연꽃의 앞뒤에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용 얼굴 2개가 정면으로 묘사돼 있는데 용의 머리에 난 뿔과 귀, 코, 이빨까지 보인다.
무덤 주인공은 당시 영산강 유역의 유력한 지방세력이었던 걸로 보인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백제 중앙에서 제작해 내려준 장례 하사품으로 보인다"며 "용머리 등 화려한 장식을 보면 소유자의 특별한 지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 11월3일자 신문은 선생님란 뉴스 속의 한국사 편에 다시 소개되고 있다.
왕이나 신을 수 있었던 금동신발을 신은 나주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공주, 부여가 아닌 곳에서 발굴된 무덤의 주인이 왕이었다는 얘기인가. 조선일보는 지방의 세력가가 죽었을 때, 중앙의 임금이 장례용품으로 하사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위한 길을 떠나 보자.
백제는 나당(羅唐)연합군에 패전하면서 철저히 파괴돼 오늘날 남은 문화유산이 거의 없고 역사서마저 망실(亡失)돼 오늘날 그 진면목을 알기가 힘들다. 겨우 신라사 중심으로 쓰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각자 자기들 입장에서 쓴 중국이나 일본의 일부 사서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대단한 나라였다는 증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를(武寧王陵)이다. 무령왕릉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경주 인근, 그리고 옛 고구려 땅에서 수많은 왕릉급 고분(古墳)이 발굴됐지만, 정확히 누구의 무덤이라고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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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내부 모습. <조선일보 DB>

하지만 무령왕릉에서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은 백제의 사마(斯麻)王(死後 廟號는 武寧王 ․ 재위 501~523년)이 묻혔다고 정확하게 기록된 묘지(墓誌)석이 나왔다. 지석에는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 壬辰 崩,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 甲申 安曆登冠大墓(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연62세 계묘년5월병술삭7일 임신 붕, 도을사년 8월계유삭12일 갑신 안력등관대묘〉라는 명문(銘文)이 구어서 만든 네모난 도기(陶器)판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7일 붕어하셨다.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이르러 (3년상을 마치고) 안장되었다〉는 뜻이다. 영동대장군이라는 직함은 중국 남조(南朝) 가운데 하나인 양(梁)나라(502~557년)의 역사책 《梁書》에 梁나라 창업자 무제(武帝)가 여융(餘隆 ․ 무령왕을 중국에서 부른 이름)에게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무령왕릉은 한반도를 포함, 과거 동이(東夷)족의 나라였던 곳에서 발굴된 왕릉가운데 유일하게 왕명(王名)이 밝혀진 예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묘지석에서 나온 「붕(崩)」이라는 표현이다.
공자(孔子)가 지은 《禮記》에는 죽음에 대한 호칭이 신분에 따라 명기되어 있다. 〈天子曰 崩 諸侯曰 薨 大夫曰 卒 士曰 不祿 庶人曰 死(천자왈 붕 제후왈 훙 대부왈 졸 사왈 불록 서인왈 사)〉다.
'붕'은 천자가 죽었을 때만 쓸 수 있었고, 봉토를 가진 공, 후, 백, 자, 남작은 훙, 벼슬아치는 졸, 선비는 불록, 평민은 사라고 했다. 이는 상대 율령(律令)사회에서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엄격한 규율이었다.
그런데 무령왕의 죽음을 「崩」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시 百濟에는 중앙인 사비(泗沘)에서 전국을 통치하는 통치자 이외에 지역별로 여러 명의 왕과 후가 있었다는 얘기다.
일본 사카모토 오시타네(坂元義種) 교수의 논문 「5세기의 百濟大王과 그 王侯」라는 논문에는 『옛날 百濟에는 불사후(弗斯侯), 팔중후(八中侯),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려왕(邁廬王), 피중왕(避中王) 등 지명을 곁들인 왕후가 있었다』고 했다.
《남제서(南齊書)》라는 중국 역사책의 〈百濟國傳〉에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무제(武帝) 영명(永明) 8년(490년)에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신하들의 논공행상을 한 내용의 표를 올려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영삭장군(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에,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려왕(邁廬王)에,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건위장군(建威將軍) 불사후(弗斯侯)에 임명했다』고 했고, 495년에는 침략한 (선비족의) 위군(魏軍)을 무찌른 공로로,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노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에,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 피중왕(辟中王)에, 해례곤(解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에, 목간나(木干那)는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임명했다』고 썼다.
여기 나오는 王은 면중왕, 도한왕, 아착왕, 매려왕, 매라왕, 벽중왕, 侯는 팔중후, 불사후, 불중후, 면중후다. 백제의 최고 통치자가 왕과 후를 임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百濟는 한반도 서남부 뿐 아니라, 중국의 동부 해안, 왜(倭)등을 통치하는 대양제국이었다는 중국 남조(南朝)시대의 기록 등을 살펴볼 때, 百濟는 大王 또는 황제가 다스린 나라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108종 2,900여점에 이르며, 왕과 왕비의 금관 및 금제 관(冠) 장식, 금제 귀걸이, 목걸이, 청동거울, 배게, 족침 등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이나 된다. 벽돌을 구어서 만든 전(塼)돌 무덤은 신라(新羅)나 일본이 기술자 파견을 요청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부합할 만큼 百濟시대의 높은 건축 수준, 예술적 감각을 생생하게 웅변하고 있다.
또 하나, 다른 국보를 압도하는 백제 유물은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다. 1993년 12월 충남 부여의 나성밖 능산리 고분군 유적지에서 공방(工房)터를 발굴하던 부여박물관 신광섭(申光燮)관장(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수조(水曹) 웅덩이에 겹겹이 쌓인 기와조각 더미 밑에서 향로 하나를 발견했다. 엄청난 보물임을 직감한 申 관장은 향로를 품에 안고 부여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보고를 받은 정양모(鄭良謨) 당시 국립박물관장 등 전문가들이 즉시 부여에 내려왔다. 향로를 확인한 이들은 한결같이 『생김새는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행한 박산(博山)향로와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기술과 예술성에서 전형적인 백제의 작품이며, 크기나 제작기법에 있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국보 중 국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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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정양모 국립박물관장은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고고학이 거둔 최대의 성과로 우리나라 고대사의 연구는 물론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연구에 획기적 자료』라고 찬탄했다. 일부 인사들은 百濟와 문화교류가 많았던 중국 梁 나라 수입품일 것이라고 폄훼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 학계에서조차 이 향로는 중국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보통의 향로는 높이가 20cm 내외인데 비해, 이 향로는 60cm가 넘는 대형인데다, 향로의 뚜껑에는 동이(東夷)의 상징 새인 봉황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고, 74개의 산봉우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새겨져 있으며, 말을 타고 사냥하는 등의 인물 16명이 조각되어 있다. 봉황 외에도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종의 동물들, 6개의 나무, 12개의 바위, 시냇물, 폭포, 호수 등 사람과 동물, 자연이 어우러진 신비한 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몸통에는 연꽃잎이 3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고, 그 사이에는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는 중국의 상징인 용이 조각되어 깔려 있다. 우리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이 향로는 밀가루나 진흙을 손으로 반죽하듯 만든, 정말 뛰어난 걸작이다.
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가격을 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으나 간접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수치로 보험 산정액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국보가 움직일 때 보험료가 매겨지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 국보는 보험 산정액이 100억~2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향로는 450억~500억 원이나 된다는 것이 국립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보통 국보보다 보험료를 5배 이상 내야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향로는 시가(始價)가 500억 원 정도일 것이며, 종가(終價)가 얼마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가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이 향로의 뚜껑에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 봉황에 대해서는 별도의 소론(所論)이 필요다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취임 초의 일이다.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장(紋章)이 너무 화려하다며 봉황을 없앤다는 말을 듣고 李 대통령의 측근에게 봉황의 역사적 유래를 알려주며 존치여부를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이 충고가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그 뒤로는 봉황을 없앤다는 말이 쑥 들어갔다.
 
 다음은 필자가 봉황의 유래에 대해 조선일보 전직 사원들이 만드는 《조우회보(朝友會報)》에 쓴 글이다. 이번 글과 관련이 있어 잠시 전재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문장(紋章)은 봉황이다. 봉황 한 쌍과 무궁화가 대통령의 문장으로 채택된 것은 1967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재선되던 해다. 무궁화는 1963년 국가 문장으로 제정된 것이고, 여기에 봉황을 더해 대통령의 문장으로 만든 것이다. 봉황을 대통령의 상징으로 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봉황은 용과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새로서, 고대 동이족들이 일찍부터 숭배해온 신조(神鳥)이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찾아가보자. 고대사 연구가인 문정창(文定昌, 1899~1980년)씨는 1969년에 발간한 「漢民族 形成에 관한 硏究」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 민족인 서하(西夏)족이 시조로 꼽고 있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씨는 동이족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씨와 신농씨의 뒤를 이어 동이족의 수장이 된 치우(蚩尤)를 물리친 후, 동이족을 끌어안는 화합정책을 취해 부락연맹을 결성했다. 동이족의 대표는 봉황을 토템으로 삼은 소호(少皥) 김천(金天)씨요, 서하족의 대표는 용을 토템으로 하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씨였다. 양 부족은 봉과 용을 한 폭에 마주보게 그려낸 기치를 만들었으니, 중국 고대사 연구가인 대만의 徐亮之 교수는 그의 저서 《中國史前史話》에서 이를 용봉 도등(圖騰=토템)이라 했다.
徐亮之 교수의 《中國史前史話》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黃帝時代(황제시대) 乃一南北戰爭結束(내일남북전쟁결속) 東西聯盟開始的時代(동서연맹개시적시대), 聯盟的主體(연맹적주체) 東方是鳳騰的東夷(동방시봉등적동이), 西方是龍圖騰的西夏(서방시용도등적서하), 東夷以掌握最高圖騰氏的少皥爲代表(동이이장악최고도등씨적소호위대표), 西夏以掌握最高圖謄黃龍氏的黃帝爲代表(서하이장악최고도등황룡씨적황제위대표) ․
黃帝시대는 (서하족과 동이족 사이의)남북전쟁 이후 마침내 하나로 결속하여 동서연맹의 시대를 열었다. 연맹의 주체는 동방은 봉황을 토템으로 하는 동이요, 서방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서하다. 동이에서는 최고 도등(토템=봉황)을 장악한 소호 김천씨가 대표가 되었고, 서하에서는 최고 도등(=황룡)을 장악한 황제가 대표가 되었다.
중국 사람조차 봉황이 동이족의 상징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봉황은 특히 9개의 동이족가운데 한 갈래인 풍이(風夷)족의 상징이었다. 봉황은 바람의 새, 혹은 음악과 가무의 새로 불렸다. 갑골문의 봉새 「鳳」자와 바람 「風」자는 같은 글자였다. 풍이족은 봉황을 하늘의 사자인 신조로 받들어 숭상했다. 그 때문에 중국 책 《說文》에도 「봉은 신조인데 동방의 군자(=東方君子之國=東國)의 나라에서만 나온다」고 했다. 봉의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모계사회였던 풍이족은 수령의 이름을 凰에서 几(궤)를 벗겨낸 皇으로 일컬었다. 훗날 황이 황제라는 단어에서 보듯 君長의 호칭이 된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새는 新이고, 鳥이자, 해(日)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東쪽을 의미한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의 시조들은 새 알(=해의 알)과 관련돼 있다. 우리를 동이족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새족」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太陽)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새라고 발음했다. 고려의 가곡 〈청산별곡〉에 「가는 새 본다. 가는 새 본다. 물아래 가는 새 본다」는 지는 해를 본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해를 숭상하고 스스로 해의 자손이라고 여긴 고대 동이족들은 해가 뜨기 전에 우는 수탉을 일종의 태양 새로 여겨 숭배했다. 태양 새로서 봉황의 관념은 고대 동이족의 태양 숭배와 새(鳥)토템 사상이 융합되어 발전된 결과로 보인다.
봉황은 우리 역사에서 한순간도 단절됨 없이 지속적으로 표현돼 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삼족오(三足烏), 백제 금동대향로의 뚜껑에 떡하니 버티고 선 봉황, 신라 서봉총 출토 금관의 새 무늬 장식, 고려의 봉황문 동경(銅鏡)과 석관 상부에 표현된 봉황, 조선 궁궐의 정전(正殿) 앞 층단 중앙 답도(踏道)의 봉황문과 정전 천장에 장식된 봉황 등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오늘날에는 대통령의 문장 및 국새 장식의 봉황 등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동이족이 세운 殷(=商)나라의 갑골문에는 봉황이 上帝(=하느님)의 사자임을 나타내는 복사(卜辭)가 있다. 『상제께서 봉황을 내려 보내셨다(帝史鳳)』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史는 使와 같은 글자다. 봉황이 나타나면 세상이 크게 평안해진다는 전승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말이다. 봉이라는 단어는 중국 사람들조차 동이족의 책으로 인정하는 《山海經》에 처음 나온다. 이 책은 조선, 숙신, 맥국, 개국(蓋國) 등 고대 한(韓)민족의 나라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서다.
한국의 상고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할 때, 중국인의 상징인 용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봉황 같은 상징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봉황을 대통령의 문장으로 삼은 것은 아무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

百濟의 걸작 가운데, 마지막으로 2009년 1월 하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발굴 현장에서 찾아낸 505점의 유물들을 들 수 있다. 금판(金版)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금제 사리호(舍利壺), 은제 사리합(舍利盒), 은제 관식(冠飾) 등은 무령왕릉, 금동대향로에 이은 백제 문화의 정수로서, 절정에 이른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 수준을 가늠할 척도가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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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석탑 심주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호 등 유물.

문화재청이 공개한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 장엄구(莊嚴俱 ․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는 금제 사리 호(壺=항아리)의 공예 수준이 높고, 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 창건 내력이 처음 밝혀졌다는 점에서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 발견에 필적할 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이건무(李健茂) 박사는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 또한 『국보 중의 국보』라고 평가했다.
사리공 중앙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금제 사리호 내부에는 X선 촬영 결과, 또 다른 내합(內盒)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 사리호는 보주(寶珠) 형태의 뚜껑을 덮었으며 몸체를 위아래로 따로 제작한 이중구조였다. 필자도 현지에 가서 직접 보았지만, 사리합은 크기는 자그마하나 겉의 문양이나, 함의 형체 등이 너무 귀엽고 아름다워 찬탄이 절로 나온다.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은 『세밀하고 정교한 당초무늬가 백제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639년 창건 당시의 내역을 밝힌 금판 사리봉안기는 의미가 크다. 탑신이 있는 1층 심주석(心柱石)에서 나온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한자로 적힌 194자의 봉안기는 《三國史記》에도 기록이 없는 백제 최대의 석탑, 미륵사탑의 모든 미스터리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열쇠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순금(순도 95%)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朱漆)을 했다. 앞면과 뒷면에 창건 내력을 기록했다. 이곳에 새겨진 창건 연대(639년)는 百濟 武王(재위 600∼641) 때 미륵사(彌勒寺)가 창건됐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薯童=百濟 武王)은 밤마다 선화공주가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서동요’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결혼했다고 되어 있다. 《三國遺事》의 미륵사 창건 설화는 무왕(武王)이 왕후와 함께 용화(龍華=彌勒)산 못가를 걷고 있을 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에서 나타나자, 왕후가 큰 사찰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을 武王이 들어줬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금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미륵사를 창건한 百濟 武王의 왕후는 百濟 8대 성씨 중 하나로 유력 귀족 가문인 沙宅씨(沙씨에서 分化한 씨족) 출신으로 드러났다. 노중국(盧重國) 계명대 교수(백제사 전공)는 『沙宅씨는 聖王이 웅진(=공주)에서 사비(= 부여)로 천도할 때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었다』며 『武王이 사택적덕의 딸 외에 여러 명과 혼인했을 가능성도 있어 (선화공주에 대한) 《三國遺事》의 기록이 잘못됐는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武王을 「大王」으로, 존칭을 중국 황제에게나 쓰는 「폐하(陛下)」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무왕의 부인도 왕비(王妃)가 아니라 왕후(王后)라고 표기했다. 무령왕릉에서 대왕이 「붕(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百濟가 지방호족을 왕으로 임명할 수 있는 대왕국(大王國) 체제를 유지했으며 武王의 왕권이 매우 강력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리봉안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竊(절) 以法王出世(이법왕출세) 隨機赴感應(수기부감응) 物現身(물현신) 如水中月是(여수중월시) 以託生王宮(이탁생왕궁) 示滅雙樹(시멸쌍수) 遺形八斛(유형팔곡) 利益三千(이익삼천) 遂使光曜(수사광요) 五色行遶七遍(오색행요칠편) 神通變化不可思議(신통변화불가사의) 我百濟王后(아백제왕후) 佐平沙宅積德女(좌평사택적덕여) 種善因於曠劫(종선인어광겁) 受勝報於今生(수승보어금생) 撫育萬民(무육만민) 棟梁三寶(동량삼보) 故能謹捨淨財(고능근사정재) 造立伽藍(조립가람) 以己亥(이기해)
(후면)
年(년) 正月二十九日(정월이십구일) 奉迎舍利(봉영사리) 願(원) 使世世供養(사세세공양) 劫劫無盡(겁겁무진) 用此善根(용차선근) 仰資(앙자)‘大王陛下(대왕폐하)’ 年壽如山岳(연수여산악) 齊固寶曆(제고보력) 共天地同久(공천지동구) 上弘正法(상홍정법) 下化蒼生(하화창생) 又願(우원) ‘王后’卽身心(왕후즉신심) 同水鏡照法界(동수경조법계) 而恒明身(이항명신) 若金剛等(약금강등) 虛空而不滅(허공이불멸) 七世久遠(칠세구원) 竝蒙福利(병몽복리) 凡是有心(범시유심) 俱成佛道(구성불도)〉

〈자세히 살펴보건대, 법왕(=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비치는 달과 같도다. (석가모니께서는) 왕궁에서 태어나셔서 (사라)쌍수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여덟 말의 사리를 남겨 삼천 대천세계를 이롭게 하시고 영광되게 하셨다.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일곱 번 요잡(遶迊 ․ 오른쪽으로 일곱 번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응보(=勝報)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이 되셨기에 삼가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절)을 세우면서 기해년(639년)정월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을 자량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굳건하고 치세(=보력)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이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의 오랜 이후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과 함께 성불하게 하소서.〉

결론은 이번의 전남 나주를 비롯하여 과거 충남 서산, 전북 익산, 전북 고창 등지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은 기사에서처럼 중앙에 군림하는 百濟의 대왕이 하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왕이 임명한 지방의 王(또는 侯)이 직접 만들어 신던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등록일 : 2014-11-04 오후 1:44:00   |  수정일 : 2014-11-0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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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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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 2014-12-09 )  답글보이기 찬성 : 21 반대 : 16
그런데 어째 백제 왕릉이 하나뿐인가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은 현 산동성 곡부시라고 추정합니다. 하남 위례성은 현 산동성 제남시로 추정합니다.
박형숙  ( 2014-11-07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16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좋은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상징이 용이라니요 저 신발의 주인공은 그럼 중국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우리 고조선 것인 홍산 요하 문명에 가장 오래된 용이 있고 저 신발에서 보듯 우리도 용을 숭상해왔으니 중국의 상징이라고 부르면 안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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