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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학수의 이야기 이야기

영화 <우먼 인 골드>에서 보는 클림트의 ‘슬픔’

빈에서 공부할 때 벨베데레 궁전에서 보았던 클림트의 그림이 뉴욕의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 <우먼 인 골드>는 그 배경을 토대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그림에 있는 실제 인물 ‘아델레’와 클림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글 |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대 독어교육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5-07-2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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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먼 인 골드>의 한장면.

아내에게서
<우먼 인 골드>라는 영화를 보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전혀 다른 스토리를 상상했다. 우리가 대구의 중앙로에 위치한 어떤 영화관에 들어서 자리를 더듬거리면서 찾을 때 친숙한 언어가 화면에서 들려왔다. 독일어였다. 너무 반가웠다. 물론 대부분의 언어는 영어로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한참을 보니 영화는 원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라는 이름이 붙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실제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도 서양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의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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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이 영화는 나치에 의해 몰수되어 오스트리아 국가에 귀속된 그림의 소유주에게 이 그림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에 따라, 소유주인 알트만이라는 여성이 법적 투쟁을 통해 그림을 돌려받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 스토리 정도라면 이 영화의 소재가 이와 비슷한 다른 어떤 그림을 다루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영화가 내게 특별한 것은 영화의 주인공이 언급하고 있듯이, 그림의 주인공 아델레의 얼굴이 슬프다는 것과 관련된 부수적인 것이다. 아델레는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보통 구스타브 클림트 하면 가장 빨리 떠오르는 그림이 키스 (Der Kuss)일 것이다. 이 그림은 혹자에 의해서는 외설스런 작품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키스하는 두 남자를 감싸고 있는 황금빛 테두리가 성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인다면 이는 육체의 심상을 말한다.
 독일의 중세 신비주의 수사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심상(이미지)3단계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가 육체의 심상이고, 두 번째 단계가 심상의 심상, 그리고 마지막이 심상 없이 사고하는 단계라고 하였다. 이 마지막 단계는 종교적 계시 같은 것이니 예술에 관해서라면 앞의 두 단계로 족할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생각에 따르면, 키스하는 두 남자를 감싸고 있는 배광 같은 테두리가 성기처럼 보인다는 경해는 육체의 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델레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면, 또는 우울하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육체의 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 금빛 그림은 무엇인가? 그저 장식일 뿐인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우리는 클림트의 세계 내 공간, 그의 내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심상의 심상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아델레얼굴은 전체 그림의 1/12정도만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장식적이고 유려한 조형적 금빛 색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우선 그림을 반으로 나누면 오른쪽은 아델레의 얼굴이 그려져 있지만 왼쪽은 텅빈 공간이다. 이 부분은 아마도 아델레의 내적 공간을 암시할 것이다. 그녀의 삶의 공간이자 동시에 클림트와의 관계를 말하는 이 공간은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비어있다. 이 공간을 우리는 클림트의 시대, 즉 아델레의 슬픔의 세계라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의 아랫부분은 옷자락을 그리고 있는데, 클림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구체적인 공간을 포기하고 상상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니 그림은 그저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베개나 침대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림만 보면 이 여인이 서있는지, 앉아 있는지, 침대 쿠션을 베고 누워있는지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머리만 동그마니 튀어나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새까만 올림머리와 비율상 유난히 큰 입술은 아주 하얀, 창백한, 거의 푸르다고 말할 만큼의 얼굴과 대비해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아델레는 두 손을 모으고 그림을 보는 관찰자(혹은 그림을 그리는 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몸은 가냘프지만 그녀가 입은 외투는 화려한 금빛 무늬를 머금은 채 옆으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심상의 심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얼굴이라는 육체를 넘어선 그녀의, 그녀에 대한 환상, 육체적 감성, 떨림, 순도 높은 사랑이 무한함과 신적인 영광을 상징하는 황금빛에 감싸여 있다. 말하자면 아델레의 슬픔은 이 황금빛 아우라와 교묘히 대조를 이루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치 지금의 이 슬픔은 곧 지나가리라는 믿음을 보여주려는 듯, 그림은 완벽한 대립 속에서도 변증법적으로 삶을 초월하고 있다. 슬픔의 이미지는 곧 황금빛 영원성을 통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축은 빈 Wien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축을 담당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프로이트, 호프만스탈, 말러, 크라우스, 쇤베르크, 슈니츨러, 비트겐슈타인 등 숫자로 다 셀 수 없는 천재들이 모두 유대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가 말한 아리안족의 우수성 같은 유대인들의 천재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이전시대에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공민권의 박탈 같은 것들이 희박해지면서 제일 먼저 유대인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영역이 예술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18세기 영국에서 여류 작가들이 많이 탄생하고 프랑스에서 보헤미안에게 문학 살롱이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런 박탈과 슬픔의 역사보다는 쇤베르크의 손자가 뛰어난변호사라는 것과 조상에 대한 뜨거운피 같은 것을 나타내려는 듯 보인다. 그 손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만 크게 관객에게 어필하지 못한다. 어쨌든 쇤베르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따른 12음 기법 또한 유대인 박해와 예술적 평등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 자막은 12음 기법을 이상한 엉터리 말로 번역하여 영화의 맥락을 끊었다.) 하지만 영화의 인물은 조부가 겪은 시대에 대한 아픔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자유, 정의, 이런 것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뉴욕 맨하탄의 현대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아델레는 그의 슬픈 과거에서 벗어나 황금빛 시대를 맞게 될 것인가? 나치로부터 박해받았던 유대인 여성이 나치의 수장인 히틀러의 집에 머물렀을 때는 어땠을까? 이제 질녀인 알트만의 노력으로 1500억이란 사상 초유의 경매가를 자취로 남기고 맨하탄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화의 끝에서 그림을 오스트리아에 머물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던 오스트리아 관리의 눈빛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그림의 주인공들이 살아있다면 정의와 조국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했을까? 구스타브 클림트와 아델레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게 하는 그림이다.
 
이 영화는 정의라는 키워드로 클림트 작품의 아우라가 영화의 스토리와 맺는 아무런 매듭 없이, 그야말로 평면적인 구성으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를 유럽 사람들이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히려 평면으로 구성된 클림트의 그림에서 기하학적 의미가 창출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림 속의 인물 아델레가 살아나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을까? 정의와 시적 정의 poetic justice, 해피엔딩, 그런 아크플롯으로 이골이 난 현대 영화감상자에게, 예술과 삶, 정의와 조국, 아델레의 슬픔과 화려함 사이의 긴장과 아이러니를 그려낸 미니플롯의 영화, ‘심상의 심상이 현실로 걸어 나오는 영화가 만들어졌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칼럼니스트 사진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대 독어교육학과 교수

경북 문경 출생.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으로 석사학위(M.A.)를 받았다.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의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교에서 1993년 문학박사(Dr.phil.)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문학평론가로서 활동했고, 계간지 <시와반시>기획위원이며, <다층>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문학치료에 관심을 두어 2004년 경북대학교에 학과 간 협동과정으로 문학치료학과를 창설하였고, 독일 프리츠 펄스 연구소에서 문학치료사 훈련가 자격을 얻었다.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과 한국통합문학치료학회 회장, 한국아데나워학술교류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세이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을의 언어』(박문사, 2014), 평론집 『잘못보기』(유로서적, 2003), 『토르소』(글누림출판사, 2014)가 있으며, 『문학적 기억의 탄생』(열린책들, 2008), 『내면의 수사학』(경북대학교 출판부 2008), 『프로이트 프리즘』(책세상, 2004), 『문학치료』(학지사, 2007), 『통합적 문학치료』(학지사, 2006), 『문화로 읽는 영화의 즐거움』 (경북대출판부 2004), Hermeneutische und ästhetische Erfahrung des Fremden(독일어 iudicium, 1994) 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니체의 문체』(책세상, 2013), 『신들의 모국어』(경북대출판부, 2014)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글항아리, 2008) 『시와 인식』(문학과지성사, 1993), 『기억의 공간』(그린비, 2005), 『보리스를 위한 파티』(성균관대출판부), 『독일문학은 없다』(열린책들), 『릴케-헌시·시작노트』(책세상) 등이 있다.

등록일 : 2015-07-27 08:26   |  수정일 : 2015-07-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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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  ( 2015-07-27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34
그림 속 아델라의 표정이 슬프다고 전제하다 보니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 키스에 대해서도 키스하는 두 남자라고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남녀 연인간으로 보이는데 동성애인지 믿을 수 없다. 클림트와 아델레의 관계는 모른다만 적어도 영화 속의 아델레는 별로 슬프지도 않았고 그림 속의 아델레도 슬프다기보단 허영기와 백치미있는 여자로 보인다.
한심한  ( 2015-07-31 )  답글보이기 찬성 : 29 반대 : 14
이런 영화 감상문이 왜 조선일보에 실릴까? 조선일보 기자들의 수준과 딱 맞을까? 조선일보 기자들은 독자의 수준은 생각지 않는 것일까?

내 아내와 영화를 봤다. 영화는 이런 것이고, 영화를 보고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교수가 말하는 내용의 전부가 아닐까?

짧은 글 하나에 물음표는 또 이렇게 많이 쓸까? 이 교수와 같은 방식으로 물음표로 글쓰기를 해볼까?
느낌표는 수준 낮은 감상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썼을까?

이 글은 어려운 단어를 쓴 것을 제외하고는 딱 중고등학생 영화 감상문 수준이 아닐까?
이 교수는 자기 글에 덧글이 1개밖에 없다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이 글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알까?
이 교수가 잘난척 쓴 다른 글에 붙는 비판적인 많은 덧글을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이 형편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안 들까? 그것을 알면서도 글을 쓸까? 자신의 글과 덧글을 읽는 제자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들까?
이런 교수는 자기가 아주 편협한 한 분야의 죽은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까? 일반적인 식견은 보통의 독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까? 자신의 글과 생각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기나 할까?
아무 상관없는 단편적인 지식을 억지로 꿰맨 글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까? 자신의 글이 억지라는 것을 알까? 자신이 지식인이랍시고 쓰는 글이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알까?
자신의 생각은 학생들 앞에서나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까? 얄팍한 죽은 지식으로 지식인 척하는 것보다 독자의 식견이 높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까?
이런 중고등학생 수준의 영화 감상문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까? 이런 글은 영화 감상 동호인 수필집에나 실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그냥 감독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 허구를 보면서 무슨 진리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연구하고 빠져드는 시기는 중고등학생 때까지가 아닐까?

이 교수는 학생들 앞에서나 글을 쓸 일이지 조선일보에 글을 그만 실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교수가 식자층에 속했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교수보다 더 식견이 높지 않을까?
이 교수 글 서너 편을 읽어보니 특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김영선  ( 2015-08-03 )  답글보이기 찬성 : 24 반대 : 16
이 영화는 나치에게 강탈당한 크림트의 명화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투쟁한 한 여인의 굿굿한 투지를 부각시키고 정의를 세상에 증명해보이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작품에 나타난 여인이 슬퍼게 보이는 표정을 통해 질녀가 숙모에게 더욱 절절한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모티브이고∼, 작품에 대한 지나치게 깊이 분석 진단은 테마와 별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근데 위 본 글 중 크림트의 키스하는 두 남자를 감싸고 있는∼ 글에서 키스라는 작품에 나타난 두 사람은 두 남녀가 아닌가요? 남성이 여성을 감싸고 보호하는 듯한 몸짓이 다르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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