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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강위석의 생각을 따라 말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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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게, 고양이 그리고 공자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저세(低稅)는 피치자(被治者)의 이데올로기였다. 치자(治者)에 대한 항거의 일환이었다. 공자의 저세(低稅)주의는 예치(禮治)라는 치자(治者)의 이데올로기다. 예(禮)는 넓게 말하면 미풍(美風), 양속(良俗), 규범, 선례(先例)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禮)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예크가 말하는 ‘행동규칙(rule of conduct)'에 유사하다

글 | 강위석 시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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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공자>의 한 장면.

정치의
목적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공자가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이 시리즈의 1.에서 했다. 그렇다면 공자가 생각했던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생각했던 부민(富民) 수단은 백성에게 부과되는 조세와 노역(勞役)을 줄이는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조세는 주례(周禮)가 정한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10%로 묶고 노역은 농한기에 한해서 동원하여야 한다고 그가 말한 것이 논어에 보인다.
 
봉건 농업 경제에서 조세는 나라와 백성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다. 쌀 열 말을 생산했는데 한 말을 조세로 내 주고나면 그 집은 정확히 그 만큼 가난해진다. 그 조세를 받는 권력 쪽은 그만큼 넉넉해진다.
 
그러니 감세는 틀림없는 부민의 방법이다.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자급자족적이던 고대 농업 경제에서는 아마도 유일한 부민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저세(低稅)주의’는 그 환경이 오늘날 공급중시 경제학(supply side economics)이 주장하는 감세 정책과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의 감세정책은 저축과 투자에 인센티브를 주어 경제성장률을 높이자는 거시경제 상의 한 가지 방책이다.
 
17,8세기 서양 계몽철학자들의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도 저세율(低稅率)을 주장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조세를 반대하였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재산에 관한 권리는 개인에게 있으므로 조세는 도덕에 합치하지 않고 법률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하였다.’(위키피디어)
 
공자의 저세주의와 유럽 고전적 자유주의의 그것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양(洋)의 동서가 다르고 세월의 격차가 2천년이 넘는 이 두 저세주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저세(低稅)는 피치자(被治者)의 이데올로기였다. 치자(治者)에 대한 항거의 일환이었다. 공자의 저세(低稅)주의는 예치(禮治)라는 치자(治者)의 이데올로기다. 예(禮)는 넓게 말하면 미풍(美風), 양속(良俗), 규범, 선례(先例)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禮)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예크가 말하는 ‘행동규칙(rule of conduct)'에 유사하다. 주례(周禮)는 공자가 존경해 마 않던 성군(聖君)인 주공(周公)이 편찬한 예(禮)의 묶음이다. 예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하나의 관습법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저세주의는 주례가 정한 세율을 준수하자는는 법치주의이기도 하다. 예는 군왕도 지켜야 하는 법도이고 군왕이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다. 공자는 예의 수호자로서의 치자의 자격을 군자라고 불렀다. 유교가 예교(禮敎)라고도 불린 이유는 이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자의 감세(減稅)와 감역(減役)을 통한 부민(富民) 기획은 당시 중원 각국이 경쟁적으로 강화해 가던 국가주의와 부국강병 정책 앞에서 출발부터 먹혀들지 않았다. 제후 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공자의 기대를 저버렸다.
 
공자의 고국이자 주공(周公)의 나라였던 노나라를 비롯하여 어떤 제후국에서도 저세(低稅)는 채택되지 못 했다. 당시 노나라의 최고 실권자는 계강자(季康子)였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冉求)는 탁월한 행정능력 덕분에 계강자에게 발탁되어 가신 가운데서도 최고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염구가 한술 더 떠 계강자를 위하여 백성으로부터 거두는 세금을 인상하려하자 스승인 공자는 강력하게 말렸다. 염구는 공자의 조언을 묵살하고 세율 인상을 단행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을 모아 염구를 파문함을 선언하고 북을 치면서 그를 성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공자 사후 염구는 공자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즉 십철(十哲)에 배향(配享)된다.
 
공자가 제자인 염구의 행정 능력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는 이야기는 논어에 여러 번 나온다. 공자는 염구의 행정력을 빌려서 자신의 저세(低稅)주의를 관철할 기회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직접 가르친 제자조차 배신한 것이다. 공자의 실패의 제1장이다.
 
기원전 1세기 한(漢) 무제는 처음에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선포했다가 그 후 국교(國敎)로 삼았다. 이후 2천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유교는 20세기 초까지‘군자(君子) 독재에 의한 선정(善政)’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걸고 국학(國學) 또는 국교(國敎)로서 군림해 왔다.
지금은 동아시아에 유교를 국시로 내 건 나라가 없다. 유교를 강령으로 내건 유력한 정당 조차 없다. 기독교 xx당, xx 이슬람당 등이 유럽과 중동에 흔히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공자의 실패의 마지막 장이다.
 
공자가 그렇게도 끔찍하게 여겼던 ‘군자(君子)’는 결코 생선 가게를 맡길 수 없는 고양이는 아니었던가. 더구나 생선의 전단계 존재인 물고기를 잘 살게 하는 것이 고양이가 맡은 정치의 목적이라고 말한다면 이건 넌센스 따먹기 말장난일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국가(정부)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민의 생명, 재산, 자유, 이 세 가지를 보호하는데 있고, 이 이유 때문이 아니면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국가를 의심부터 했던 것도 국가를 생선 가게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고양이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군자(국가)가 의(義)를 추구하는 것은 소인(인민)이 이(利)를 추구하는 것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언표(言表)를 재구성하면 공자의 이상과 18세기 서양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그것이 합동(合同)에 이를 것 같다. 실제로 공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의(義)와 이(利)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공자의 실패’는 공자에게는 억울한 누명(陋名)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실패가 아니라 동아시아적 전제군주제와 관료제도의 실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등록일 : 2014-02-01 17:46   |  수정일 : 2014-02-0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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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강위석 시인, 언론인

-193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고등학교, 연세대 (수학과,학사)
-미국 하바드대학교 케네디 스쿨(경제학 전공, 석사)
-현대문학지 시부문 추천완료
-한국은행, 국제상사(주) 근무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문화일보 논설실장, 중앙일보 논설고문 , 월간 에머지 발행인 겸 편집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논설을 써 왔음
-시집 <알지 못 할 것의 그림자>, 칼럼집 <천하를 덮는 모자>, <향기나는 사람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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