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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 기자의 컬쳐쇼크

영화 <미 비포 유>가 '헬조선'에 묻는다

* 이 글에는 영화 '미 비포 유'의 주요 내용 일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글 | 이원우 대중문화평론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6-06-15 14:32

▲ 영화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의 남자 주인공 윌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곳은 희망적인 사회일지 모른다.

촉망 받던 젊은 미남 사업가였던 윌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목 위쪽만 통제할 수 있는 전신마비 환자가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윌은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풍요의 한가운데 있다. 평생 써도 모자랄 돈이 있고, 성(城) 한 채가 고스란히 자기 몫이며, 부모와 친구들도 전부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허나 그는 스스로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택한다. 모든 풍요와 여유를 뒤로 하고 존엄사라는 마지막을, 럭셔리한 형태의 자살을 택한 것이다. 윌의 인생 말미에 나타난 또 다른 주인공 루이자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깨워주지만, 그런 루이자 역시 존엄사라는 윌의 결심까지 철회시키지는 못한다.

대체 왜?

이 작품의 결말은 관객들을 일종의 무력감에 빠뜨린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많은 것을 가졌고 이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루이자)까지 얻게 된 윌은 왜 끝내 존엄사라는 결정을 관철하는가?

이유는 '희망'의 부재다. 사고로 척수가 손상된 윌이 예전과 같은 건강한 행복을 되찾을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전신마비가 되기 전의 윌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었고, 경험했었고, 또 그런 자신의 삶을 맹렬히 사랑했었다는 점이다.

밤마다 꿈속에서 그 강렬한 행복의 체험을, 펄떡펄떡 약동하는 과거의 영광을 재생하는 윌에게 전신마비라는 육체적 제약 - 그의 새로운 현실은 정도가 지나친 불행이다. 새로운 사랑조차 그에겐 고통이다. 부활의 노래처럼 '사랑할수록' 아픔이 커지는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까닭이다.

인간이 육체와 정신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고 할 때 '정신적 윌'은 이미 사고와 함께 사망해 버렸다. 여기까지 이해하면 비로소 그의 결정도 납득할 만한 것이 된다. 그의 존엄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육체와 정신의 불균형을 조정해 주는 아주 당연한 후속작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 내부에서도 논쟁은 존재한다. 특히 루이자의 어머니는 윌의 결정이 "명백한 살인"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그녀는 21세기에 와서는 위력을 상실한 전통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돼선 안 된다'고 역설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윌의 결정을 일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루이자의 어머니가 주장하는 전통적 가치가 이미 우리 시대에 퇴색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세의 인간이 아무리 커다란 불행을 당했더라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다. 자연권적 가치, 종교의 힘이 작동하는 시대에는 '사후세계의 행복'도 어엿한 고려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십자가 목걸이는 그저 액세서리일 뿐이다.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 권선징악과 정의구현 또한 하나의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 윌의 눈을 보며 인간의 존엄성이나 천부인권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우리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신의 은총, 그러니까 '불멸의 희망' 또한 죽고 없어졌다는 뜻이다.

윌이 아닌 루이자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결말로 작품은 끝나지만 '미 비포 유'의 여운은 극장 밖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희망의 부재는 특히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테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표현하는 걸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이토록 많건만 대체 왜 이곳을 '지옥'으로 묘사하느냐는 불만에는 일면 타당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다시 한 번 '희망'이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헬'로 묘사하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 거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윌의 결정을 비난할 수 없다면 헬조선론(論)도 비난하기 힘들어진다. 언뜻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쓰고 있는 이 영화의 공감대는 씁쓸한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죽음보다 더욱 슬픈 건 그를 붙잡을 명분이 사라진 우리 시대의 공허(空虛)다.
이원우 대중문화평론가
전 시사주간 미래한국 편집장, 현 미디어펜 기자

등록일 : 2016-06-15 14:32   |  수정일 : 2016-06-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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