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정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내가 고통스러워도 논문을 쓰는 이유는?

글 | 정채관 박사(교육학)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7-06-14 09:24

본문이미지
영국에서 구멍 날 때까지 신은 신발/정채관


  내 생애 첫 논문은 영국 버밍엄대 공과대학에서 쓴 학사 논문이다. 지도교수는 참고문헌까지 100장 정도는 써야 한다고 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논문작성법 책을 참고해가며 혼자 1년 동안 논문을 썼다. 그동안 각종 과제보고서를 써봤으니 쓰는 건 어느 정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논문은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양만 늘어난 게 아니라 전체적인 논리의 흐름과 질적 수준이 달랐다. 나쁜 머리를 탓하며 밤을 지새웠고, 그렇게 학사 논문을 제출했다. 죽는 줄 알았다.

  두 번째 논문은 영국 워릭대 공과대학에서 쓴 석사 논문이다. 논문을 한 번 써봤으니 그리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나도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 요구되는 양적 분량은 비슷했지만, 석사 학위 수준에서 요구하는 질적 요구는 달랐다. 눈이 많이 내렸던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남들은 다 집에 갔지만 혼자 기숙사에 남아 토 나올 때까지 논문을 썼다. 역량 부족을 절감하며 지도교수를 찾아갔더니, 자기도 그때 그랬다며 그저 블랙커피나 더 마시란다.

  영국 워릭대 공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시작한 지 1년 후부터 대학원에서 공식적으로 석사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했다. 영국에서 학부를 했고, 사회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해는 4명을 배정 받았고, 둘째 해에는 2명을 배정 받았다. 표절이 심각했던 중국인 학생 1명을 제외하고, 5명 모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내 논문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내 박사 논문은 끝내지 못했다. 이런 상태의 논문을 제출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동안 들인 시간, 노력, 비용이 아까웠지만, 깨끗하게 그만뒀다.

  후회는 없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고, 배운 것을 써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찜찜했다. 결국,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 워릭대 사회과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시작했다. 박사 재수생으로서 이번만큼은 박사 학위를 받아야 했다. 학·석사 논문도 써봤고, 공대였지만 박사 논문도 어느 정도 써봤고, 논문지도도 해봤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뭔가 잘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불안했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비우고 1주일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나보다 박사 학위 과정을 1년 먼저 끝낸 누이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하나 더 한단다. 덕분에 큰 공원이 있는 옥스퍼드에 같이 살면서 박사 논문을 썼다. 도 닦는 심정으로 박사 논문을 썼다. 그런데 박사 논문을 쓰며 활용한 연구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박사 학위 삼수를 해야 하는 건지, 그만둘 건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신발에 구멍 뚫릴 때까지 하루 4시간 이상씩 옥스퍼드 대학 공원을 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논문을 다시 썼다. 무식하게. 그리고 끝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2011년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난 후, 지금까지 국제학술지 논문을 포함 19편의 전문 학술지 논문을 썼고, 3편의 전문 학술서를 출간했다. 혼자서도 써봤고, 여러 명과 함께도 써봤다. 한국인하고 만도 써봤고, 외국인(영국, 호주, 캐나다 등)하고 만도 써봤다. 한글로도 써봤고, 영어로도 써봤다. 지금도 논문과 책을 쓴다. 대학과 달리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논문을 쓴다고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 돈으로 부족한 논문 심사비와 게재료를 낸다. 승진이나 보직과도 거리가 멀다.

  논문을 한 편 쓰고 나면, 애를 하나 낳은 것 같다. 논문이 한 편 나오기까지 많게는 100번이 넘는 퇴고를 한다. 밤새 퇴고를 하다 보면 눈이 흐려지고 구토가 나올려고 한다. 나쁜 머리를 탓하며 어느 수준이 될 때까지 뇌를 짜고 또 짠다. 나중에는 뇌 속에 피도 안 돌고, 그냥 머리가 멍해진다.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렇게 논문을 쓴다.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고통스러운데 뭐하러 논문을 쓰냐고 묻는다. 배운 사람으로서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서다. 그게 배운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학위 논문 표절 때문에 장관 후보자에서 쫓겨나는 일을 본다. 엄밀히 얘기하면, 학위 논문은 미출간물이다. 즉, 학위 논문은 전문 학술지에서 추천한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출간되는 학술 논문이 아니라, 학생이 특정 주제를 연구하여 제출한 조금 긴 보고서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국뿐 아니라 대다수 국가에서 학위 논문은 그것이 석사 학위 논문이든, 박사 학위 논문이든 미출간물로 취급한다. 학위 논문은 전문 학술 논문을 쓰기 위한 연습 정도에 불과하다는 시각 때문이다.

  물론 학위 논문이라고 해서 연구 윤리 규정을 어겨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학생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연구 윤리 규정을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연구 윤리 위반으로 수여한 학위를 취소할지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해당 학위를 수여한 해당 대학에서 할 몫이다. 그래서 대학은 '그때는 관행이었다'는 변명보다는, 100년 뒤에도 후회 안 할 결정을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 학교 동문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런 측면에서 2016년 4월 서울고법이 국회의원 A씨가 B대학을 상대로 "박사학위 취소가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13 June 2017
정채관 박사(교육학)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
BEng(Hons) Birmingham MSc Warwick EdD Warwick Cert Oxford
Email: ckjung@gmail.com

⊙ 정채관 박사. 현역만기제대. 영국 버밍엄대(공학학사), 영국 워릭대(이학석사), 워릭대(교육학박사). 버밍엄대 한인학생회 부회장, 워릭대 한인학생회장, 영국 코벤트리 한인회장. 月刊朝鮮 영국통신원·전문가칼럼니스트. 서울대 CTL 선임연구원, 연세대 영어영문과·교육대학원 시간강사, 인하대 영어교육과 강의교수, 버밍엄대 영어과 외부교수. ⊙ 현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육과정·교과서본부 부연구위원. 영국 English Today(Cambridge University Press, SSCI) 편집위원, 한국영어학회 부편집위원장 겸 연구상임이사, 한국영어교육학회 연구이사. 조선뉴스프레스 칼럼니스트 [정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저서 「한 눈에 들어오는 이공계 영어기술글쓰기(2007)」, 「코퍼스 언어학 입문(2012)」, 「2020 한국초중등교육의 향방과 과제: 교육과정, 교수학습, 교육평가(2013)」, 「김정은 시대 북한의 교육정책, 교육과정, 교과서(2015)」, 「원자력 영어: 핵심 용어 및 실제 용례(2016)」, 「코퍼스 언어학 연구(2017.8 예정)」.

[정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이제는 수능이 살어져야 할 시간
[정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문재인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키우겠다고?
◆ [정
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문재인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칼럼니스트 사진

정채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

정채관 박사

⊙ 정채관 박사(교육학). 현역만기제대. 영국 버밍엄대(공학학사), 영국 워릭대(이학석사), 워릭대(교육학박사). 버밍엄대 한인학생회 부회장, 워릭대 한인학생회장, 영국 코벤트리 한인회장. 月刊朝鮮 영국통신원·전문가칼럼니스트.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선임연구원, 연세대 영어영문과·교육대학원 시간강사, 인하대 영어교육과 강의교수, 버밍엄대 영어과 외부교수.

⊙ 현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육과정·교과서본부 부연구위원. 영국 English Today(Cambridge University Press, SSCI) 편집위원, 한국영어학회 부편집위원장 겸 연구상임이사, 한국영어교육학회 연구이사. 조선뉴스프레스 교육칼럼니스트 [정채관 박사의 영국 & 영어 이야기]. 저서 「한 눈에 들어오는 이공계 영어기술글쓰기(2007)」, 「코퍼스 언어학 입문(2012)」, 「2020 한국초중등교육의 향방과 과제: 교육과정, 교수학습, 교육평가(2013)」, 「김정은 시대 북한의 교육정책, 교육과정, 교과서(2015)」, 「원자력 영어: 핵심 용어 및 실제 용례(2016)」, 「코퍼스 언어학 연구(2017.8 예정)」.

등록일 : 2017-06-14 09:24   |  수정일 : 2018-02-14 11:04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