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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꿈 많은 80대 차윤의 글로벌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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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나의 8.15 이야기

여기에 기고하는 글은 필자가 존경하는 중학교 선배 김사묵 선생이 미국 남가주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의 부탁으로, “8.15 해방”을 경험하지 못한 후배들을 위하여 7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8.15 이야기” 강연 내용이다.
필자 혼자 감상하기에는 너무나 진솔하고 감격스럽고 절절하고 귀한 내용이기에 본 칼럼을 통해 널리 읽혀지기를 바란다.

글 | 차윤 ㈜CPR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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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 사 묵
 
저는 1930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우리 민족의 격동기이며 수난기인 일제 강점 시대와 6.25전쟁을 겪은 세대로, 아직 생존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오늘은1945년 8월 15일을 전후로 제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7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저는 만 열다섯 살,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꼭 7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 때의 감격, 그 때의 기쁨이 제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감격, 가장 큰 기쁨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45년 6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두달 동안 소위 근로동원에 나가 평택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1주일 간의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8월 8일부터 학교에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당시 부모님께서 ‘학교에 돌아가면 또 근로동원에 나갈텐데, 너는 몸도 약하니 집에서 쉬라’는 말씀에 따라 집에 머물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학생 근로동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일제 말기엔 대부분의 청년들이 전장으로 나가고 많은 장년들이 징용으로 끌려나가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제는 학생을 동원하여 일을 시켰는데 이것을 소위 근로동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근로동원에 나가 잠실에 있던 일본 사람들의 농장에 가서 일하기도 했으며,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일본 신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는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한강에는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인도교가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서른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엔 용산에서 잠실에 가려면 서빙고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당시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때부터 일본 군대를 위해 쓰일 소위 송탄유를 만드는 원료인 송진(resin)이 박힌 소나무 뿌리 또는 가지를 모으는 일, 일본 군의 군마에게 먹일 마초를 베어서 바치는 일들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저는 큰 형님과 함께 집 터밭에서 가을 채소를 심기 위해 풀을 매고 있었습니다. 12시경 되어서 집 앞에 사는 친척 아저씨(7촌숙)가 단파 라디오로 12시 중대 뉴스를 듣고 나오며 “오늘 일본이 항복하였군.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민초(백성들)를 위하여 무조건 항복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엔 실감이 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나서 점심을 먹고 큰 형님과 집에서 약 30리(7.5 마일) 떨어져 있는 미둔리라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길은 부래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미둔리에는 저의 작은아버지가 사셨는데 그 날은 그 동네에서 기형제를 지내는 날이어서 돼지를 잡기에 다같이 식사를 위해 떠난 것이었고, 우리 형제는 저녁 무렵에 미둔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1년에 한번씩 기형제라는 것을 지냈는데, 소를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는 대개 돼지를 잡아놓고, 축문(기도문)을 읽고, 동네 수호신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고기(육류)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기형제 지내는 날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 그 당시 우리나라 한 사람당 1년 평균 육류 소비량은 1근(약 2 파운드)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 달랐겠지만 대체적으로 설날, 추석날, 어른들 생일, 잔치날, 그리고 기형제 정도가 아니었겠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간혹 겨울에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돼지를 잡아 몫을 지어 나누어 가져가 김치찌개에 넣어 먹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물론 부잣집의 경우에는 달랐겠지요. 그리고 당시 보통 사람들은 불고기, 갈비구이와 같은 음식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대개 적은 양의 고기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먹기 위해 국을 만들어 먹었지요.
 
그래서 그 날 저녁에는 우리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촌 형제, 친척들이 모여서 오랫만에 돼지 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 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어디에서부터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국호를 “동진 공화국”으로 한다느니, “고려공화국”으로 한다느니, 총리대신(국무총리의 일본식 직명)은 김구가 되고, 육군대신은 김일성, 농림대신은 강기덕이 된다느니 하면서 그전에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들도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 때 당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루 밤에 몇 백 리를 갈 수 있는 독립군으로 신화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편, 저희 사촌 형 중에 말이 조금 빠른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선사람들 별 수 있겠니. 며칠만 있으면 또 서로 싸울텐데…”라고 하자 저는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가 몹시 미웠어요.
 
그렇게 8월 15일이 지나가고 다음날인 16일 형님과 전 기차를 타고 고원읍으로 갔습니다. 기차로 두 정거장 거리인데 일제 말기에는 군수 물자 수송 때문에 민간인들에게는 기차 얻어타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미둔리 갈 때는 기차를 타지 못해 걸어서 갔는데 운이 좋게 오는 길에는 일본이 항복하여 군용물자 수송이 필어없어져 기차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고원역에 내려 읍내에 들어가니 읍내 전체가 온통 만세 판이었지요. 모두들 미친듯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껑충 껑충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저도 집에 와서 종일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춤을 추었어요. 펌프 우물에서 펌프질을 하면서도 내내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아버지와 같이 먹을 갈아서 일본 국기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려넣던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저희 아버지가 어떻게 태극기를 그릴 줄 아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물론 몰랐지요. 아! 일본의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넣던 감격은 참으로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8월 16일부터 2~3일 동안은 국민들이 너무도 기뻐서 온통 미치다 싶이 했을 겁니다. 그 때는 “대한독립 만세”라는 말을 “조선독립 만세”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본 사람이 물러나면 우리나라가 바로 독립하는 줄로 알고 있었지요.
 
그 때 들리는 소문엔 서울에서 중학생 이상 학생들로 치안대를 조직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즉시 학교로 돌아가야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2~3일 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갔어요. 그전 같으면 급행 열차로 6시간, 완행으로 8시간 걸리던 거리를 하루 이상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에 기차 기관사들이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물러갔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기차 타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객차, 화물차 꼭대기, 기관차 위, 승강 계단 등 아무데나 매달려서 탔지요. 기차 안에서는 선반 위에도 타고, 바닥에도 앉고, 아무데나 걸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그야말로 무질서 그 자체였어요.
 
서울역에서 내려서 저는 가회동에 있는 제 하숙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 일본이 항복하던 날에 학생들이 치안대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계속 치안을 유지한다고 하더군요. 학교는 당분간 휴교 상태여서 2주일 가까이 그저 하숙집에 머물러 있었지요.
 
서울에 와보니 휘문중학교 교문에는 “한국민주당”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고, 안국동에 있는 지금의 풍문여고 교문에는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더군요. “한국민주당”은 송진우, 김성수 씨가 주동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안재홍 씨가 주동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 때부터 제 사촌 형이 예언한 대로 당파 싸움이 시작되더군요.
 
저는 그 후 38선을 넘어 집으로 왔습니다. 그 때까지는 38선을 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만주 쪽에서 귀국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었어요. 길 옆에서 소고기 장국밥을 파는 곳이 그렇게도 많더군요. 해방이 되었으니 소도 마구 잡아먹었지요.
 
그 때 소련군이 들어와서 일본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 여자들은 머리를 깎기도 하고 한국 사람 집에서 식모로 일하겠다고 한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어요. 우리 동네 가까이에 신작로(국도)가 있었는데 소련 군인들이 트럭(미국 GMC제)을 타고 지나가는데 얼굴이 먼지로 덮여 뽀얗고 코는 크고 빨겋게 보여 모두 똑같아 보였어요.
 
한번은 신작로에 나갔더니 보따리를 지거나 멘 사람들의 긴 행렬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원산 쪽에서 일본 관리들이 줄을 지어 북쪽으로 가는 행렬이었어요. 소련 군인들이 따발총을 메고 앞, 뒤, 중간에서 그들을 몰고 가면서 가끔씩 따발총을 공중에 대고 쏘아 대더군요. 후에 들으니 그것이 소위 “죽음의 행진”으로, 그렇게 소련까지 몰고 갔는데 도중에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패전 국민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군인(로스키)들은 동네의 쌀, 감자, 술 등을 마구 강탈해 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막기 위해 로스키가 나타나면 동네 높은 곳에서 종을 치고, 종 소리가 나면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로스키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로스키들이 마차를 타고 와서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무 밭에서 무를 뽑아 안주로 삼아 소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로스키들은 시계가 귀했는지 시계를 팔에 몇 개씩 차고 다니곤 했고, 어떤 군인들은 때가 쩔어붙은 가죽 군복을 입은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세수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아마 추운 지방 야전에서 겨울에 세수하기 곤란하니까 그렇게 한 모양이예요. 입에 물을 한 모금 물고 그 물을 뱉으면서 손으로 받아 세수를 하곤 했어요.
 
저는 가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학교에 다니다가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38선에서 경계를 서 있는 미국 군인들이 38선을 넘으려는 우리를 발견하고 “가쪼, 가쪼”라고 하더군요. 38 북쪽에서는 소련 군인들이 “까라, 까라”하면서 38선을 못 넘도록 하더군요. 어린 소년 가슴 속에 ‘왜 우리 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못 다니게 하는가’ 하는 울분이 일어나더군요.
 
‘언제쯤 우리 마음대로 이곳을 넘어 다닐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내 나이 또래의 길손을 만나 같이 38선을 넘어 눈이 덮인 철원 평야를 달 밝은 밤에 서벅 서벅 새 눈을 밟으면서 걸어가던 생각이 납니다.
 
우리 세대는 참으로 격변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보통학교”라고 부르다가, 그 후 “심상소학교”라고 부르더니, 졸업할 무렵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지요.
 
제가 태어난 다음해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고, 보통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졸업할 무렵에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고, 1945년 8월 6일과 9일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지요.
 
그 때까지 소련과 일본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으니까 스탈린은 부랴부랴 대일전쟁에 참여하여 소련 비행기가 집 상공을 지나 원산을 폭격했고, 소련의 육군은 한소 국경 도시 웅기를 점령했으며, 8월 12일에는 나진, 청진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대한민국 안 다섯 나라 국기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장기, 해방 직후 북한에 있을 때는 붉은 소련기, 남한 미 군정 하에서는 미국 성조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태극기, 6.25 때는 인공기 아래 살았지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기 저의 계산으로는 화폐 가치가 대략 천만분지 일로 절하되었어요. 다시말해 물가가 제 생애 동안에 천만배 이상 올랐다는 것이지요.
 
국민학교 때는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사용했었어요. 소위 창씨개명을 하였었지요. 일제 시대엔 학교에서 일본말만 사용하고 조선말은 쓰지 못하게 했었어요. 지금 용인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집, 흙을 이겨서 만든 벽으로 된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중학교 다닐 때 우리는 지금의 중학생들이 먹는 양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항상 배고픔으로 살았어요. 일제 시대 도시에서의 하루 1인당 곡류 배급량은 2홉3작(약 184g, 6.5온스)였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조금 더 지급되었는데, 아마 하루에 1인당 200g(7온스)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일본군에게는 하루에 1인당 6홉(480g)을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한창 먹을 때인 학생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6.25 때는 죽기 전에 흰밥 실컷 배불리 먹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1년에 고기 한 근을 못 먹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해방 전에는 서울에 사범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 실업학교, 농업학교, 중학교를 포함하여 중등 학교가 30개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합격자 명단이 일간 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답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서 남한의 교육 정도를 조사했더니 중등학교(4, 5년제) 이상 교육을 받은 사람이 남한 전체에 약 5만 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방 전에는 우리 나라에 종합대학이 “경성제국대학”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것도 일본 사람을 위한 대학이었기에 조선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전문학교(초급대학)가 아마 십 여개 되었을 것입니다. 연희전문(연세대학 전신), 보성전문(고려대학 전신), 혜화전문(동국대학 전신), 숭실전문, 세브란스 의전, 경선의전, 평양의전 그리고 법학전문학교, 약학 전문학교, 치과 전문학교, 고등상업학교 등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에 4년제 대학교가 205개, 전문 대학이 137개가 있으며, 천안시에만 대학교가 9개, 전문대학이 2개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인구대비 대학생 수가 가장 많은 나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통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해방 전 우리나라 1인당 GNP는 지금돈으로 $50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수년 전에 우리나라는 인구 5,000만명 이상, 국민소득 $20,000 이상 되는 7개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주택의 대부분은 초가집이었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골에 가도 초가집은 거의 볼 수 없지요. 일제 시대에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포장 도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신작로라고 하여 국도가 자갈로 덮여 있었어요. 국도 제1호 경부 국도도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지금은 시골에 가도 대부분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요.
 
1948년 세계2차대전 후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동메달 2개를 따서 종합 순위 32위였는데, 2012년 런던올립픽에서는 금메달 13개로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에 이어 금메달 순 종합순위 5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제가 직접 경험한 일제 시대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조선어 시간이 1주일에 한번 있었는데, 그것도 저희 때까지만 있었고 그 후엔 조선어가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아예 없어졌습니다. 제가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수신(도덕)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저희 반에 들어왔어요. 그 때 우리 학교에는 교장 선생만 일본 사람이었는데 그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너희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그 때 우리 반에서 좀 활발한 아이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이”하고 손을 들더니 “조선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은 “그래, 본슈(일본)에서 난 사람은 본슈인, 규슈에서 난 사람은 규슈인이라고 하고, 조선에서 난 사람은 조선이라고 하지만 모두 대일본제국의 신민(신민이라는 것은 천왕의 신하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때 속으로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몰라요. 우리가 조선사람인데 왜 일본사람이라고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2학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저희 고향에는 중학교가 없어, 제 작은 아버지께서 사는 서울에 올라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가 중학교 다닐 때는 까만 교모가 아닌 국방색 전투모를 쓰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허리에는 군대식 요대를 띠고, 다리에는 각반(게도루; gaiter)를 감고, 돼지 가죽 구두를 신고 등교했습니다.
 
 교복 깃에는 학교 뱃지와 학년 숫자 –1학년이면 1, 2학년이면 2– 를 붙이고 다녔지요. 그리고 하급생은 상급생을 보면 먼저 거수 경례를 해야합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하급생이 상급생에게 경례를 하지 않으면 얼차려를 주거나 때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상급생이 하급생을 불러다가 보자기 같은 것을 씌워놓고 집단적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본말로 “후꾸로 다다끼”(보자기 때리기 - 뭇매질)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저희 학교(중앙중학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1학년에 입학하니 5학년 선배가 저에게 경어를 쓰더군요. 같은 하숙방을 쓰던 2년 선배도 저에게 경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3학년 학생들이 2학년 학생을 불러다가 뭇매질을 하다가 정학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저희 학교에서는 처벌을 하더군요.
 
그당시 학교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한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를 서고, 조회 시에는 일본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소위 “궁성 요배”를 하고, “황국신민 서사”를 해야했습니다. 저도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매일 아침 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교장선생님의 훈시, 훈육주임의 주의 사항 등이 있었고, 그후에 도수 체조(라디오 체조라고 불렀음)를 했습니다.
 
겨울에도 조회 시간에는 외투를 입지 못했고, 장갑도 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은 단체로 신사참배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에 가서 한달에 한번씩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이를 거절하다가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순교를 하셨지요.
 
지난 좌파 정권 때 소위 “친일 인명 사전”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안에는 민족에게 해를 기친 나쁜 친일파들도 있었지만, 백낙준, 김활란, 김성수, 현상윤 선생 같은 민족의 지도자급 인사도 포함되었어요.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로서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제 시대 당시엔 해외에 나가 있지 않고 국내에 있으면서 공직에 있던 사람으로 이들의 기준에 의한 친일 행위를 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이 됩니다만, 하루는 연희전문학교 교수 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제 사촌 형의 행방을 아느냐고 묻더군요. 제 사촌 형이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병에 나가지 않기 위해 숨어 있었어요. 이 연희 전문학교 교수들이 제 사촌형의 행방을 말하리라고 기대하고 왔겠어요?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거니와 알아도 제가 그것을 말하겠어요? 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은 엄밀히 말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지요. 그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도 생각됩니다.
 
하물며 학교의 교장이나 책임자로서 그 정도의 “친일 행위”를 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안하면 학교 문을 닫아야했을 테니까요.
 
3학년 때 근로동원 나갔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평택에 가서 평택비행장을 건설하는 현장에 두 달 동안 동원되었어요. 비행장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갈이 필요한데 평택 지역은 평야 지대여서 자갈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데서 기차로 자갈을 운반하여 평택역에 뿌리면 우리가 소위 “도록고”(소형 궤도 위에서 물건을 운반하는데 쓰이는 수레 – rail cart)에 자갈을 실고 그것을 밀어서 평택역에서 평택비행장 활주로 만들 자리에 갖다 붓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 때 서울의 2개 학교가 그 곳에서 작업을 했는데, 아침 5시에 나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연병장에 모여 조회를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와 조반을 먹고 행군하여 '도록고'가 있는 곳에 가서 도록고를 밀고 평택역에 가 자갈을 싣고 그것을 밀어 평택비행장에 갖다 붓고 도록고를 제자리에 갖다놓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먹고 풀밭에 누워 쉬다가 내무반으로 이동하여 점호를 취하고 취침하는 일과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중·고등학교 생활을 통털어서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같이 풀밭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쉬던 것이 유일하게 즐거운 추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 달 동안 모자를 쓰고, 윗통을 벗고, 팬티만 입고 맨발로 철로에서 “도록고”를 밀면서 지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학생 근로동원을 위해 큰 막사를 몇 채 짓고, 학교 별로 한 막사씩 들어가 있게 했어요. 막사는 칸막이가 없는 큰 마루방이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근로동원 기간 중 식사는 주로 조밥 또는 강냉이 밥, 대두박(콩에서 기름을 빼고난 찌꺼기) 밥이었지요. 쌀은 조금 밖에 섞여 있지 않고 대부분이 잡곡이었습니다. 반찬은 그 근처 농민들이 야산에서 뜯은 넙적넙적한 풀에 된장 조금 넣은 소금국이었지요. 그나마 조금 밖에 주지 않아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지요.
 
 “도록고”로 자갈을 운반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식사 당번이 가지고 온 것을 먹고는 풀밭에 누워 잠시 쉬곤했었습니다. 그 때 잠깐 눈을 붙이고 잠을 잤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정말 꿀맛이었어요.
 
그리고 기상 나팔을 불면 일어나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든지… 학생들이 점심 먹는 곳 주변에는 동네 사람들이 찐 감자나 찐 찹쌀, 떡 같은 것을 들고 나와 팔려고 해서 그걸 막으려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기도 했지요.
 
 
근로동원 기간 중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었어요. 그럴 때는 모여서 노래자랑이라든지 우스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마루에 누워 뒹굴기도 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대나무로 포크를 만들기도 하고, 영어사전을 가지고 어떤 단어를 빨리 찾는지 내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취침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취사반에서 일하는 친한 친구가 저와 다른친구를 보자고 부르더니 어두컴컴한 중에 무언가를 쥐어주었습니다. 물렁물렁했습니다. 쌀밥을 뭉친 것이었어요. 잡곡밥만 먹다가 쌀밥 뭉치를 입에 넣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 전에 그렇게 맛있는 쌀밥을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막사는 바닥이 마루였고, 그 위에서 쭉 줄을 지어 자는데 벼룩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은 너무 가려워서 덮고 자던 홋이불을 움켜 안고 불 밑으로 갔더니 벼룩이 몇 마리가 그 속에서 이리저리 튀고 있는 게 보였어요.
 
평택 비행장에 자갈을 나르면서 저는 이 비행장이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비행장이 되리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낮 12시 정오가 되면 약 1분간 싸이렌이 울렸는데, 그러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몰 장병과 일본군을 위한 묵념을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당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때었기 때문에 기도할 줄은 모르고 막연히 우리 아버지 오래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중학교에는 교련 선생이 있었는데, 우리학교에는 예비역 군조(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었고, 교련 시간은 1주일에 1~2번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에서 제식훈련을 비롯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 외에 배속 장교라는 사람이 있어서 1주일에 한두번씩 와서 상급반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그는 현역 장교로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말을 타고 다녔어요. 한번은 그가 말을 운동장 옆에 있는 나무에 매어놓았는데 3학년 학생이 그것을 풀어 타고 운동장을 돌았어요.
 
교련 선생한테 들켜서 얼마나 두둘겨 맞고 발로 채였는지 몰라요. “군마는 무기인데 네가 그 무기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저 학생이 일본인이라면 저렇게 때리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제 말기에는 중학교에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는 없었고 유일하게 총검술이 스포츠를 대신했었어요. 그래서 대게 대항 총검술 시합이 있었어요. 유도나 검도는 학과의 일부로 필수적으로 가르쳤지요. 유도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고, 검도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유도를 가르쳤어요.
 
해방 후에는 이것을 일본 것이라고 해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해방 후엔 상당 기간 일본말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였고, 부끄럽게 생각했어요. 1960년에 저는 미국 병기학교에서 병기 장교 교육을 받았는데, 제 옆에 일본 장교가 앉아 있었어요. 그는 영어가 서툴렀고 저는 그때만해도 일본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일본말로 거의 대화하지 않고 영어로만 얘기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루는 배속장교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장시간에 걸쳐 소년병으로 지원하라는 열변을 토하더군요. 항공소년병(진주만 공격한 소년병과 같은), 소년 전차병, 소년 잠수함병 등에 지원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장시간 열변을 토하고도 지원자가 없자 일본도를 쾅쾅 구르면서 나라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고 하며 몹시 화를 내더군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에겐 대개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주로 선생님의 별명을 불렀지요. 우리들에게 1학년 영어를 가르친 분은 유경화 선생님이었는데 그의 별명은 “무턱”이었어요. 목과 턱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였거든요.
 
그는 영어를 가르치는데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기로 유명했어요. 회상을 하자면, 1학년 첫 시간에 교실에 들어올 때 굵은 막대기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영어 알파벳을 쓰는 4선지를 한 권씩 주고 알파벳을 써오라는 숙제를 줍니다. 대문자, 소문자, 인쇄체 대문자, 인쇄체 소문자를 써오는 숙제를 내어 주면 그것을 다음 시간에 써 가야 하는데 만약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그 굵은 막대기로 종아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선생님의 영어 숙제는 안하고는 못 배깁니다. 만약 숙제를 했는데 집에다 놓고 왔다고 하면 집에 가서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선생님은 영어 문법책을 본인이 만들어 가르쳤는데, 동사의 12시형을 포함한 영어 기초문법을 철저히 가르쳤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무척 사랑하셨지요 그러한 무턱이 선생님을 졸업생들은 제일 존경했고, 제일 먼저 찾아갔다고 합니다.
 

해방되던 해, 저는 겨울 방학을 고향 집에서 보내고 이듬해인 1946년 2월 하순 부모님께 학생 모자를 벗고 간단히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렸어요.
 
사촌 형과 같이 걸어서 서울을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 집에서 백리 떨어져 있는 원산역에 도달했을 때 원산역에 몇개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약소민족의 해방자 위대한 스탈린 원수 만세”, “세계 노동자 농민의 조국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 만세”, “모든 영광은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에게”라고 쓴 현수막이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훗날인 1953년 3월 제가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을 때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통쾌했던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38선을 넘어 서울에 올 때 당시 돈 800원이 있었는데, 한달 하숙비가 600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다보니 돈은 다 떨어지고 38선은 점점 굳어져서 부모님과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살 길이 막막했는데 그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이북 학생을 위해 유도장을 비워 기숙사를 제공했었지요.
 
 해방 전에는 우리 학교를 포함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는 팔도 강산에서 모여든 지방 학생들로 상당했었습니다. 그 당시 군 단위에는 중학교가 거의 없고 간혹 농업학교만 있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땅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해방된 후에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고 지방으로 간 학생들도 있었고, 서울에 남아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있었어요. 저는 학교 유도장 기숙사에 들어가 있으면서 도매로 책을 사서 서울시 내 주택가를 누비며 팔아 몇 안되는 돈을 벌어가며 생활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6월에 우리학교에서 동맹 휴학이 일어났습니다. 이유는 학교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은데 별로 인기가 없었던 심형필이라는 선생님이 교장이 되었으니 훌륭한 선생들이 모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일제 시대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이 취직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학교 선생이 되었었지요. 우리 학교에만 보아도 교장 선생은 후에 고려대학교 총장(현상윤 선생)이 되었고, 영어 선생은 외무장관(변영태 선생)이 되었어요.
 
 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된 김상기 선생도 우리 학교에 계셨는데, 그들은 대부분 해방 후 대부분 대학 교수나 다른 학교 교장으로 가셨답니다. 후에 알고보니 우리 학교 교주가 김성수 씨였는데, 그가 임명한 교장을 쫓아내기 위해 좌익 세력들이 배후에서 동맹 휴학을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동맹 휴학을 하던날, 우리는 비가 철철 오는데 교내 야외 스탠드에 앉아 교장 선생님이 나갈 것을 결정한 후, 스크랩을 짜고 학교 운동장을 돌다가 한 사람씩 교장실로 들어가서 “선생님 나가주십시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요구가 받아드려지지 않으니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렇게 약 1주일이 지나니 학교에서는 조기에 여름방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고, 자연스럽게 지방 학생들은 집으로 내려가고 이북 학생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이북으로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우리 선배 졸업생 한 사람과 저만 학교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중학교는 졸업하고 싶었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조선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제가 경험하거나 들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고 말하면서 조선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강제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를 하게하고 한달에 한번씩은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고, 학교에서 조선말을 일체 못 쓰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얼핏 하면 “조선인 주제에”라는 말을 사용했고, 그래서 조선인이란 말에는 멸시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 40년 간이나 조선에 살면서도 조선 사람들이 먹는 김치와 마늘은 냄새 난다고 깔보며 거의 안 먹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김치나 마늘을 좋아합니까?
 
일본 순사(순경)들은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면 저기 순사 온다고 하면 무서워서 그칠 정도로 순사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러한 일본 순사가 시골 주재소까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샅샅이 꿰뚫고 있었지요.
 
일제 시대 말기에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쳤는데, 이것을 '공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공출을 어기고 몰래 남겨두었다가 본인들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쌀 조사'가 가끔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관리들이 가정 집에 나와서 쌀독은 물론 여기 저기 쌀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 소위 '쌀 조사'를 했답니다.
 
기차를 탈 때는 쌀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군용으로 쓰기 위하여 일반 가정에서 쓰는 놋 그릇(유기)를 전부 바치게 했습니다. 1938년부터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고, 1942년 이훙ㄴ 징병 제도가 실시되어 조선 청년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 갔습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넘은 조선사람은 100만명 이상이 징용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을 “보국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탄광과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했으며, 요새 말썽이 되고 있는 정신대(위안부)로 수 많은 처녀들을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한 분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보수(월급)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었고, 채용에 있어서도 차별을 하였지요. 제가 기아자동차에 있을 때 우리나라 공업계의 원로 한 분이 강연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 고등공업학교(초급 공과대학 - 그당시에는 상당히 높은 학력)을 졸업하고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렇게 큰 회사에 정사원의 조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전부 임시직 공원이었으며, 고등공업학교를 나온 본인도 공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증언하더군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일제시대에 15세까지 살면서 겪은 저의 지극히 제한된 경험을 나누어 적어본 것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선조들이 서로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겨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가’ 하고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까지도 남북 관계는 물론, 남한 내에서도 서로 싸우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해방 후의 혼란은 참으로 심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삼일절이나 광복절 때면 우익 사람들은 서울 운동장에 모이고, 좌익 사람들은 남산에 모였다가 서로 시내에서 만나 싸우고 때려 부수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 북한 인민군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 남침을 감행하여 수 백만명의 사람이 죽고 수 많은 이산가족, 고아, 상이군인을 남기게 됐지요. 우리 국군 약 14만명이 전사, 40여 만명은 부상, 유엔군은 약 4만명이 전사, 15만명이 부상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16개국의 청년들을 불러 공산군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인을 사랑하시어 이승만 박사와 같은 훌륭한 크리스찬 지도자를 내어서 대한민국을 세우도록 하시고 6.25의 공산침략을 물리치고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가 있게 하신 줄 믿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제헌국회에서 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국회의원 중의 한 사람인 이윤영 목사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하여 국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기독교인 의원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기도에 참여하였으며 거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취임식에서 헌법 위에 성경을 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을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공산침략에서 지켜주셨으며, 한국 교회를 세우시고 세계 선교의 일익을 담당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우리들의 사명이 막중함을 새삼 느낍니다.

 
- 김사묵 (金思默) 약력 -
1930   함경남도 고원 출생
1943   중앙중학교 입학
1949   중앙중학교 (6년) 졸업
1964   동아대학교 (화학과) 졸업
1953   육군 중위 (통역 장교) 임관
1977   육군 중령 예편
1977   기아 산업 (아시아 자동차) 입사
1993   기아 자동차 퇴사
2008   미국으로 이민
등록일 : 2015-08-28 09:46   |  수정일 : 2015-08-2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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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차윤 ㈜CPR 회장

차윤 ㈜ CPR 회장

● 해군사관학교 / 플로리다 대학/ 위싱턴(시애틀) 대학 졸업
● 해군사관학교 / 해군 대학 / 메릴랜드 대학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 통일원 / 홍보협회 / 문화공보부 / 해외공보관 (이집트, 일본) 근무
● 해외개발공사 / ㈜연합광고 / 미국영화수출협회 / ㈜ CPR 회장 (현재)

국제 정치, 지정학, 국제감각 등 분야에 걸쳐 약 50편의 학술 또는 비학술 논문을 국내외 미디어에 게재하였으며, 최근에는 「조선 Pub」에 약 200회에 걸쳐 온라인 칼럼을 게재한 바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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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 2015-08-28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19
다 좋은데.. 이승만과 기독교는 동의를 못하겠습니다..!!!!

확 공감이 사라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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