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시리즈 | 꿈 많은 80대 차윤의 글로벌 마인드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故 함병춘 박사와 나의 경우

글 | 차윤 ㈜CPR 회장
필자의 다른 기사

故 함병춘 박사와 나의 경우
 
본문이미지
그림. 1983년 6월 동경 외신 클럽 강연에 앞서
외신 기자들과 인사하는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가운데 필자)
 
1983년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외신 담당 공보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동경에 주재하고 있는 수백 명에 달하는 외신기자들과 항시 접촉하면서 그들이 본국에 보내는 한국에 관한 기사가 우리에게 부정적이거나 불리한 기사가 되지 않도록 필요한 자료를 때에 맞추어 제공한다던지, 수시로 만나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다던지, 그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미디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라도 각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임무였다.
 
그때만 해도 청와대나 정부의 외신들의 한국 보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외신기자들의 눈에는 70:30 정도로 유리하게 쓴 기사라 할지라도 우리 정부로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불리하게 쓴 기사로 분류하여 해당 기자의 방한(訪韓)취재를 불허하거나 공보관으로 하여금 해당기자로부터 해명 또는 사과서한을 받아내도록 하는 어처구니 없는 대외신 과민반응 때문에 직무수행이 불가능함(Mission Impossible)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점에서 1983년은 다른 어느 해보다도 불리한 이슈가 많이 발생하였고, 따라서 반한 기사들이 들끓게 되자 정부도 대책을 강구하고 건의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확신을 갖고 건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개인의 힘과 성의만 갖고는 도무지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일본 정부 각료 및 언론을 포함한 세계 주요 외신들 ‘약 600명’의 동경 외신 클럽 회원들 앞에서, 정부의 새정책과 미래의 비전(Vision)을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인사를 동경에 보내주도록 건의하였다. 누가 좋은가고 물어왔기에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경원 고려대 교수,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이 세사람 중에서 누구던지 와주면 좋겠다고 답했다.
 
함병춘 실장과 김경원 박사는 내가 통일원에서 ‘정치외교정책 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통일문제 연구관’으로 있으면서 1970년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통일원 주최의 ‘한국 통일 문제에 관한 세계 학술대회’를 주관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인격과 능력을 충분히 감지한 바 있고, 김재익 수석은 당시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국보적인 존재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시가 내려오기를 함병춘 비서실장이 가게 될 터이니 행사 잘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준비과정은 예상외로 힘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외로 성공적이었다. 함병춘 실장의 유연하고 믿음이 가는 인품과 설득력있는 화법과 특별히 그의 출중하고 흠잡을 데 없는 고급영어실력에 압도당한 듯 모두가 “감동적이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본질적으로 까다롭기 짝이 없는 청중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내가 처음 겪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그들의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런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는 한 한국의 장래는 기대해 볼 만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었다.
 
행사를 잘 마치고 귀국하는 전날 저녁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함실장이 느닷없이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 “여기 일도 중요하지만, 청와대에 와서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이 힘들어서도 그렇지만 9년째 들어가는 해외생활, 이제는 그만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고 한편, 공무원이 된 이 마당에 청와대에 가서 내가 가진 능력 한번 제대로 발휘하고 끝내고 싶은 잠재 욕구도 있었던지라 “제가 도움이 되신다면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귀국하자마자 곧 발령을 내도록 하겠으니 미세스 차(Mrs. Cha)더러 짐을 싸기 시작하시라고 하시지요.”라고 까지 하셨다.
 
집에 가서 그대로 전했더니 와이프가 오랜만에 얼굴이 환해진다. 묵은 살림을 싸려면 많은 신문지가 필요하다기에 사무실에 쌓여있는 ‘구문지’, ‘신문지’할 것 없이 왕창 차에 싣고 가서 넓지 않는 방바닥에 쏟아 놓았다.
 
밥그릇, 냄비, 여기저기서 사놓은 물건들, 적고 큰 가구들, 내버리기는 아까운 잡동사니들, 집사람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싸는데 보통 때 같으면 벌써 지쳐 쓰러졌어 야할 사람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짐은 큰 덩어리만 놔두고 거의 다 싸놓았는데 놓아 둘 곳이 마땅치 않고 보니 집 식구들의 출입이 불편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는 식구는 없었다. 2주일이 지났다. 소식이 없다. 전화를 해볼까 했지만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묻는다. 어떻게 됐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함 실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나쁜 소식이었다. 함실장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분에 넘치게 미안해하는 힘실장에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어서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도리어 위로의 말을 건냈다. 내 표정을 보고 짐작을 했는지 집사람은 대답을 못하는 내 앞에서 종이처럼 쓰러졌다.
 
군대생활, 공무원 생활을 겪으면서 비슷한 일들이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심적 회복은 의외로 빨랐다. 그러나 집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얻은 병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캐나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재관 공관이 동부인하여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귀국일에 인사차 들렀다고 하면서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죄송하다’는 말을 골백번 더 하는게 아닌가. 사유인 즉, 청와대에 내가 갈 자리에 자기가 뜻 밖에 발령을 받고 가게 돼서 죄송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재관 공보관은 평소 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후배 공보관으로써 품격이나 실력이 뛰어나 언젠가는 같이 근무하기를 원했었다. 점심을 같이 하면서 진정으로 축하하고 나에게 죄송해 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거듭 강조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필이면 존경하는 선배님과 경합이 되어 죄스럽기 짝이 없다”는 말만 거듭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한달 반이 지났다. 나는 집사람의 도움 없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짐을 다시 풀고 밤낮을 가릴 수 없이 바쁜 업무 덕분에 “청와대 꿈”은 다 잊은 채 맡은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8분 (한국시간 낮 12시 58분)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군 경찰국 특공대 소속의 3명의 특공대원이 감행한 폭파사건으로 우리나라의 고귀한 인재 17명이 한꺼번에 순직하는 대형 참사에 대한 보도를 접하게 된 것이다.
 
순직한 수행원 중에는 나를 청와대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려고 애쓴 존경하던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내 대신 청와대에 가게 되어 죄송하다고 머리를 들지 못하던 내가 무척 좋아했던 이재관 공보비서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함병춘 실장이 청와대에서 나를 필요로 했던 배경에는 대통령의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을 위한 사전 준비 업무를 염두 해 두고 한 말이었고 결국 나대신 이재관 비서관이 그 일을 맡아 수행한 것이 분명해졌다.
 
지금도 10월이 오고 아웅산 사건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이 두 분이 나로 인해서 나를 대신해서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끼곤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록일 : 2013-12-09 오후 1:54:00   |  수정일 : 2013-12-09 17:52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사진

차윤 ㈜CPR 회장

차윤 ㈜ CPR 회장

● 해군사관학교 / 플로리다 대학/ 위싱턴(시애틀) 대학 졸업
● 해군사관학교 / 해군 대학 / 메릴랜드 대학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 통일원 / 홍보협회 / 문화공보부 / 해외공보관 (이집트, 일본) 근무
● 해외개발공사 / ㈜연합광고 / 미국영화수출협회 / ㈜ CPR 회장 (현재)

국제 정치, 지정학, 국제감각 등 분야에 걸쳐 약 50편의 학술 또는 비학술 논문을 국내외 미디어에 게재하였으며, 최근에는 「조선 Pub」에 약 200회에 걸쳐 온라인 칼럼을 게재한 바 있음.

1건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손우현  ( 2014-02-14 )  답글보이기 찬성 : 25 반대 : 24
잘 읽었습니다. 참 인생이란게 알 수 없는 거군요.
맨위로
자유지성광장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