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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조화유의 영어 그리고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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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 부치는 글··· 옷 한벌 얻어입고 떠나가신 울 엄니

글 |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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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1 돌도 지나지 않은 나를 안고 사진을 찍은 어머니. 2 1980년 미국에 첫번째 오셨을 때의 어머니 모습
옷 한벌 얻어입고 떠나가신 울 엄니
 
끝내 어머니의 죽음에 임종하지 못했다. 14년 앞서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나는 임종을 못했었다. 그때가 1979년 초, 유신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소위 반정부 신문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에 임종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면서도 그때는 그런대로 궁색하나마 핑계는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기실 때 임종을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방심 때문이었다.
 
서울의 형님으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도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을 못하고 여행 준비를 하는 데 이틀을 허비했다. 그때 서울로부터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빨리 귀국하는 게 좋겠다는 형님의 말씀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심상치 않구나 싶어 급히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김포공항에 도착,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근교 B시에 있는 형님댁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경, 그때 이미 아파트 입구에 조화가 세워져있었다.
 
허망한 심정으로 어머니 시신을 안치한 관이 병풍으로 가려져 있는 방에 들어서니 나의 형님 두 분과 조카들이 앉아 있었다. 큰형님이 시키는 대로 분향 재배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머니는 그날 자정이 조금 지난 0시 20분경에 운명하셨다고 작은형이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여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 곁에 간 것이었다. 계산을 해보니 어머니가 운명하신 시각은 내가 L.A.국제공항을 향해 집을 떠날 때쯤이었다.
 
하루만 빨리 서둘러 왔더라면 어머니의 임종을 보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고 있는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큰형님이 "임종에 맞추어 도착했더라도 어머니는 네가 온 줄을 모르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며칠째 의식이 거의 없으셨으니까"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향년 91세로 돌아가셨으니 천수는 다하셨다는 생각도 생각이려니와, 임종 직전 며칠 동안 어머니의 배설물을 받아내야 했던 큰형님 내외를 더 고생시키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 솔직히 다행스럽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울음을 터뜨린 것은 이튿날 아침, 입관 때였다. 입관은 아침 8시에 시작되었는데, 의사같이 흰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 두 명의 장의사 직원이 알코올 묻힌 솜으로 어머니의 팔다리를 대충 닦고 수의를 입혔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산다는 건 좋은 거죠.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란 유행가 구절을 생각했다. 어머니는 정녕 알몸으로 태어난 지 91년 만에 흰 속옷 한 벌과 그 위에 걸친 연두색 치마저고리 한 벌, 그리고 흰 버선 한 켤레를 얻어가지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의사 사람은 둘째 형님을 시켜 어머니 입 속에 쌀 세 숟가락을 넣어 드리게 했다. 쌀 숟가락이 처음 들어갈 때 장의사 사람은 "천 석이요"라고 말했다. 두 번째 숟가락이 들어갈 때는 "이천 석이요"라고 말했고, 세 번째는 "삼천 석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저승에 가셔서 배를 곯지 마시라고 미리 "삼천 석"의 쌀을 입에 넣어 드리는 뜻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6?5전쟁 중 어머니가 양식 동냥을 한 번 나갔던 일을 기억해내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이 나던 1950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아홉 살이었으므로 그때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자 우리 식구는 곧 서울을 떠나 고향을 향해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었는데, 패물과 옷가지, 값 나가는 식기 등을 식량과 바꾸어 먹으면서 대전까지 내려가자 이제는 더 바꾸어 먹을 물건이 없어졌다. 그래서 어느날 어머니는 마침내 구걸을 하러 나선 것이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신 어머니의 하얀 자루에는 쌀은 없었고 약간의 보리쌀, 수수, 그리고 감자 등이 들어 있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생전 처음 동냥을 다니신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목이 메고 눈물이 글썽거린다. 미국서 가난을 모르고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용(?)으로 그 얘기를 했을 때도 나는 목이 메어 듣고 있던 아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었다.
 
장의사 사람들은 이윽고 어머니의 작은 몸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관에 넣었다. 그들이 관 뚜껑을 닫기 전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오래 응시했다. 주름이 지고, 검은 반점투성이인 저 얼굴의 주인공도 한때는 꽃봉오리같이 아름다운 처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라곤 딱 한 장, 그것도 3분의 1은 찢어져 나간, 누렇게 색이 바랜 흑백사진밖에 없다. 그 사진은 내가 태어나던 해, 고추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놓은 나를 어머니가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찍은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이미 마흔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젊은 어머니의 얼굴을 본 일이 없고, 오직 중년 이후의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사진으로 미루어보아, 어머니는 젊은 시절,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에 예속되기 시작할 무렵인 1903년 시골 부유한 농가의 맏딸로 태어났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여자에게 공부를 시키면 사람을 버려놓는다고 생각하는 아주 고지식한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평생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으로 사셨다. 글을 모르시는데도 어머니는 당신의 목적지로 가는 시내버스는 용케도 찾아서 타셨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 때 이웃마을 총각과 결혼했다. 우리 아버지가 된 그 총각은 한때 부농이었으나 이제는 망해가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 당시 우리 고향은 너무 벽촌이었기 때문에 학교도 없고 서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그것이 아버지 학력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결혼 후 순사가 되었다. 나중에 일가친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는 일본 경찰의 악질적인 앞잡이가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정말로 존경받는 순사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기 관할구역을 순찰하다가 버려진 아이가 있으면 주워와 씻기고 우리 어머니의 젖을 먹게 해서 얼마간 기르다가 입양을 원하는 집에 그 아기를 주곤 했다. 아버지는 또 일가친척 중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아이들이 있으면 집으로 데려다 길러서 나이가 차면 독립을 시켰다. 이렇게 인정 많은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자기 자식도 두서넛 있는데, 남의 자식까지 데려다 기르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게 인정이 많은 분이라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다 한다.
 
입관이 끝난 후, 어머니의 관은 다시 병풍으로 가려졌다.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포터블 스테레오에서는 스님의 염불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스님을 불러다가 염불을 부탁하면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녹음 테이프로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 편이 오히려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의 죽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을 중을 돈 주고 데려와서 염불을 시키는 것보다는 아무 감정이 없는 녹음 테이프가 차라리 마음 편했다.
 
우리 상제들은 삼베로 만든 상복도 입지 않고, 검은 양복에 삼베로 만든 모자와 완장, 그리고 각반만 착용했다. 장의예법도 많이 간소화, 현대화되었구나 싶었다. 아니, 요즘은 더 간소화되어 삼베 모자와 각반까지 생략하고 검은 양복에 삼베 완장만 착용하는 상제도 많다고 한다.
 
아침나절부터 문상객이 하나둘씩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문상객들을 맞이하는 동안 옆방에서 간간히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없을 때 나는 옆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방 침대에는 백일이나 지났을까말까한 아기가 누워 있고 나의 막내 조카며느리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한쪽 방엔 90여 년을 살다 가신 증조할머니가 누워 있고, 그 옆방엔 이제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새 생명이 누워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한 생명이 가면 그 손실을 메울 또 다른 한 생명이 태어나 인간 생명의 고리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구나…….
 
이튿날 새벽 나는 빈소를 지키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미국으로부터의 비행기 여행, 그리고 서울에서의 첫 밤을 거의 새다시피한 것 등으로 해서 내 몸은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옛날 부산에서 내가 도내 고교생 학력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여 받아온 은컵(실은 은도금을 한 컵이지만)을 어머니가 고물장사에게 팔아 그 돈으로 쌀 한 됫박을 산 일이 꿈에서 재현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혀 관심이 없다 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제가 알아서 공부 잘하고, 상장과 상패, 상배(컵) 받아오고, 가끔 장학금 도 받아 학비에 보태 쓰는 아들에게 우리 어머니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다니는 학교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치맛바람이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물론 날보고 "공부 좀 해라"라는 말 한번 하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공부 좀 그만하고 불 끄고 자라"는 말은 자주 하셨는데,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남폿불에 들어갈 석유 값 많이 든다고 빨리 자라 하셨고, 전기가 들어온 후에는 전기세 많이 나오니 빨리 불 끄고 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오직 식구들─무직자인 아버지와 나─먹여 살리는 일에만 온갖 신경을 썼다. 결혼하여 분가한 두 형들이 생활비를 보태주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어머니는 온갖 일을 다했다. 여름에는 시장에 나가 과일장사를 했고, 겨울에는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서 팔았다. 팔다 남은 고구마는 식어버린 채 종종 우리집 저녁식사가 되곤 했는데, 그때 어찌나 식은 고구마를 많이 먹었는지, 나는 지금도 고구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은 미국서 자란 우리집 세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저희 아버지 세대가 한국에서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통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언젠가 막내 녀석이 반찬투정을 하기에 또 그 얘기를 했더니 녀석은 "Not that sweet potato story again, please!"(그 고구마 얘기는 제발 그만 하세요)라고 해서 허허 웃고 말았었다.
 
빈소에서 꿈을 꾸다가 나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을 깼다. 새벽 다섯 시경이었다. 둘째 형이 "장의차가 왔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캄캄한 새벽하늘 아래 아파트 앞에서 발인식을 거행했다. 어머니의 관을 장의차 앞에 놓고 우리는 절을 하고 곡을 했다. 식이 끝날 무렵 장의차 운전기사가 "자, 할머니께서 저승 가실 때 노자가 필요하실 테니 노잣돈 좀 든든히 드리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형이 먼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관 위에 놓았다. 그 돈을 힐끗 바라본 운전기사는 돈 액수에 불만이었던지, "저승 가는 길에는 문이 열두 개가 있습니다. 그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돈을 내야 들여보냅니다"고 한다. 그는 "있다고 합니다"라거나 "들여보낸다고 합니다" 식의 간접화법이 아니라 "있습니다", "들여보냅니다" 식으로 단정해서 말했다. 마치 자기가 저승길을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둘째 형이 또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놓고 나도 두어 장 꺼내 놓았다. 그제서야 운전기사는 "자, 이제 떠납시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먼저 장의차에 오르게 한 뒤, 관 위에 놓인 돈을 자기가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새벽길 운전에 수고할 운전기사와 그의 조수에게 이런 식으로 팁이 주어지는구나 하고 나는 이해를 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입맛이 좀 씁쓸했다.
어머니의 관이 장의차에 실리고 요동이 없도록 단단히 매여지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 여섯 시 전의 고속도로에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계속 이런 도로 사정이라면 부산 북방 양산군에 있는 공원묘지까지 가는 데는 다섯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큰형이 말했다. 나는 장의차를 타고 가면서 아까 운전기사가 하던 말을 되씹어 보았다. 그는 저승 가는 길엔 열두 개의 문이 있다고 했다. 정말 저승이란 것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정말 저승으로 가셨을까? 저승이 있다면 그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전통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사후관은 분명치 못했다. 우리 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막연히 저승으로 간다고 생각했을 뿐, 기독교인들처럼 천당과 지옥으로 갈려져 간다고 믿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사후관에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죽으면 다 저승으로 간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서양으로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지옥의 공포를 사람들에게 불어넣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구제책을 제시했다. 그래서 중국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은 기독교를 "병 주고 약 주는 종교"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일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조선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대한 공포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부산 피란시절, 중학교 일학년 때 나는 동네 어른들을 따라 우연히 심령부흥회를 열고 있는 교회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전쟁 직후라 유달리 부흥회가 많은 시기였다. 그 부흥회에서 나는 유황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이야기를 처음 듣고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는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열심히 교회에 나갔고 나중에는 울면서 기도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외경스러워 보이던 목사가 교회 증축공사를 독려하다가 블록담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어이없이 깔려 죽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 대학교 1학년 때 버트랜드 러셀의 『왜 나는 기독교도가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져갔다.
 
기독교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기본 교리 즉, 아담과 이브의 실락원(失樂園), 노아의 홍수,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이야기들이 나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철학과 비교종교학, 그리고 천문학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주에 관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기독교가 말하는 그런 인간적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죽었다가 되살아나서 사후의 세계가 어떻더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으므로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주만물은 왜 존재하는지, 우주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종교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절에도, 교회에도 나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행히 죽음에 대한 공포감 없이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종교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밭을 간직한 채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육신은 썩어 원소상태로 분해되어 흙 속에 섞일 것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믿지 않는다. 사람의 정신이란 육체가 살아 있을 때만 나타나는 일종의 뇌파현상일 뿐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함께 없어진다고 믿는다. 많은 종교가 가르치듯이 사람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는 가설을 나 자신은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가설이 완전히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나는 궁극적인 진리는 우리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자인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어떤 종교든 간에 그 종교 특유의 세계관이 있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 종교의 세계관만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아담, 이브의 원죄를 물려받아가지고 태어난 죄인이므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는, 모든 생은 괴로운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괴로운 생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 즉 해탈이 목표다. 기독교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불교를 믿으면 극락에 간다고 단순히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희망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종교란 결국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나는 예수를─또는 부처님을─믿었으므로 죽은 뒤에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라고 믿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내 친구 하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백 퍼센트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통사고에 대비해서 우리가 보험에 들 듯이 진짜로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서 보험을 드는 기분으로 기독교를 믿는다. 죽은 뒤에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교회에 나간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요즘 인기 TV 전도사로 잘나가는 어떤 목사도 내 친구 같이 “신앙은 보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일이 있다. 나는 그 목사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에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다. 반대는커녕, 오히려 권유하고 싶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는 종교를 믿었으므로 죽은 뒤에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다. 솔직히 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내가 이런 상념들에 빠져 있는 동안 영구차는 어느덧 대전 가까이에 이르러 어느 휴게소에 들어가 멎었다. 우리들은 식당으로 들어가 따끈한 우동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비록 약식이지만 상제임을 표시한 우리들의 복장을 보고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예사로운 일이란 듯이…….
 
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야 영구차는 양산군 내에 있는 공원묘지에 도착했다. 그 곳은 아주 좋은 명당이었다. 멀리 푸른 동해바다가 보이는 산허리에 자리잡은 이 공원묘지는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었기 때문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묘지에는 어머니보다 14년 앞서 돌아가신 아버님이 묻혀 계신 곳이다. 아버지 묘 옆에 어머니가 묻힐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그 곳에 와서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부산지역 일가친척들 중 나의 5촌 당숙모 되는 분이 "영감님 인자(이제) 할마씨 만내(만나) 외롭지 않겠구마"라고 말했다.
 
영구차 옆구리 문이 열리자 어머니의 관이 보였다. 우리는 그 앞에서 또 간단히 식을 올렸다. 이번에도 영구차 기사는 "자, 마지막 기회이니 할머니께 노잣돈 좀 듬뿍 드리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운전기사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말한마디 못하고 또 만 원짜리 몇 장을 관 위에 올려 놓았다. 운전기사는 돈의 액수가 양에 차지 않았던지 "노잣돈이 충분해야 저승가실 때 고생 안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꾸욱 참았다. 이윽고 기사는 더 돈이 나올 것 같지 않자 체념한 듯 지폐를 주섬주섬 주워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 상제들은 이리 와서 관을 들고 저 위로 운반합시다" 했다.
 
나도 관의 한 모퉁이를 들었다. 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입관 할 때 본 어머니의 시신은 너무도 작고 가냘폈는데 관은 왜 이렇게 무거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섯 명이 들었는데도 좁은 비탈길로 40여미터를 운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침내 하관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묘혈을 묻을 인부들이 또 어머니에게 노잣돈을 드리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돈밖에 모르는 그들의 소행이 너무도 괘씸해서 나는 마침내 입을 열고 한마디 했다.
 
"이미 노잣돈은 충분히 드렸으니 걱정 마시고 빨리 일이나 끝냅시다."
 
그러자 우락부락하게 생긴 한 인부가, "참 되게 빡빡하네" 하고 투덜댔다. 나는 "당신 지금 뭐라고 했소?"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어머니 관 앞에서 싸울 수가 없어서 가까스로 참았다. 인부들도 그들의 정당한 노임 이외의 이른바 막걸리값을 챙길 희망이 없어 보이자 곧 일을 시작했다.
 
얼마 후 어머니의 관을 덮은 흙을 발로 다지면서 나는 어머니가 몇 년 전 미국 우리집에 다니러 오셨을 때 뒤뜰에 채소씨를 뿌리고 흙을 발로 가볍게 다지시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모두 세 번 미국을 다녀가셨다. 팔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멀미 한번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오실 때마다 부쩍부쩍 더 늙어가시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세 번째 오셨을 때는 두 번째 미국에 다녀가신 것을 기억하지 못하실 정도로 기억력이 감퇴해 있었다. 치매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다녀가신 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 이웃집에 사는 백인 할머니가 "Hi, so nice to see you again!"이라고 인사를 해도 어머니는 "저 코 큰 할마씨가 누고?" 하고 못 알아보셨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조금씩 노망기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어머니는 우리집 고양이의 수염을 가위로 싹독 잘랐다.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수염이 없는 고양이 얼굴은 참 가관이었다. 머리털이 사람의 얼굴 모습을 좌우하듯이 고양이 면상은 수염의 유무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으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은 왜 고양이 수염을 잘랐느냐고 할머니에게 야단이었다. 할머니는 "너거도 머리가 길만(길면) 머리 안 깎나. 괘이(고양이)도 시염(수염)이 길만 깎아주야 안 되나" 하셨다. 나는 아이들에게 "고양이 수염은 곧 자라난다. 걱정마라"고 타이르면서도 속으론 어머니가 정말 노망이나 하시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욕실에 들어가셔도 전기를 켜지 않고 문을 열어놓고 일을 보셨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욕실에 들어갔다가 할머니가 계신 것을 발견하고 집사람과 아이들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욕실에서 불을 켜지 않는 것은 옛날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전기를 아끼느라고 낮에는 불을 켜지 않던 습관이 몸에 배어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욕실에서 어머니가 불을 켜지 않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거울에서 보기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어머니는 목욕도 하기 싫어하셨는데, 그것도 쇠락해가는 자신의 육신을 보기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흙 밑에 누워 계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어머니는 다행히 크게 노망기를 보이지 않으시고, 또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음으로써 자식들을 고생시키는 그런 일은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운명하시기 며칠 전부터 의식이 없으셨다니까 먼 타국에 있는 막내아들이 보고싶어 애타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 바로 옆에 누워 계신다. 두 분의 영혼이 있어 서로 만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두 분이 전망 좋고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누워 계신다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흐뭇하다.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고 공원묘지를 내려오면서 나는 또 그 유행가 구절을 떠올렸다.
 
산다는 건 좋은 거죠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등록일 : 2018-05-02 09:27   |  수정일 : 2018-05-0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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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조화유 (曺和裕 / W.Y. JOH)

경남 거창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Western Michigan University 대학원에서 韓美관계사를 연구한 뒤 미국에 정착했다.

도미 전 응시한 TOEFL에서 어휘 및 작문 부문 세계 최고점수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흉일”이 당선, 문단에 데뷔했다. 1998년 문학작품집 “이것이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글들이다”를 냈고, 2010년엔 두 번째 작품집 “전쟁과 사랑”을 출간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 “다대포에서 생긴 일”은 한국비평문학회가 “2003년의 문제소설”로 선정하였고, 이 소설을 직접 영어로 다시 쓴 Heaven Knows What Happened at Dadaepo는 amazon.com에서 eBook으로도 나왔다.

미주동포들을 위해 쓴 “미국생활영어” 전10권은 1990년대 조선일보사가 “이것이 미국영어다” 전10권으로 재출간, 국내에서만 100만부 이상 보급되었고, 중국, 대만, 일본에서도 각각 그 나라 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1996~7년에는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틀담”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씨이저” “왕자와 거지” 등 세계명작을 한영대역 만화로 재구성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 워싱턴 교외에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메일 johbook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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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zio  ( 2018-05-13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글을 정말 흡입력있고 정갈하게 잘 쓰시네요. 우연히 읽고 깊은 감명 받고 갑니다.
kimjy56  ( 2018-05-09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조선생님께서 옛날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읽은 소설이 기억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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