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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김정호의 카탈락시 Catalla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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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리더십의 성공비결

다음은 프리덤팩토리와 자유와창의교육원이 함께 기획하여 제공하고 있는 강의시리즈,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의 제 10강, “제조업 절정에 달하다”의 강연 일부를 김규태 미디어펜 연구원이 요약 정리한 것이다.

글 |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프리덤팩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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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정몽구 회장과 삼성의 이건희 회장,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얼까.
 
첫째, 세계 초일류의 제조업 회사를 일구어낸 경영자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장남이 아니었으며, 창업자인 아버지로부터 그룹 총수의 권한을 물려받는 것이 애초에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그룹 총수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평균 소득이 2만5천불인데, 지역별로는 8만불, 9만불의 소득을 올리는 지역이 있다. 바로 울산이다. 이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울산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및 조선업 등 각종 제조업의 산업 기반과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울산 지역의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근로자들은 세계 최고의 근로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수출액을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의 3대 제조업은 전자산업, 자동차산업, 석유산업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3대 제조업의 주역, 3명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이건희, 정몽구, 최종현 3인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은 글로벌 시장을 활용한 우리나라의 기업가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3인에 대하여 얘기하려 한다.
 
   
▲ 현대차 울산공장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는 기업이 월드베스트 수준에 올라있냐를 판가름하는 가장 명확한 척도는 해당 기업의 글로벌브랜드 인지도 및 그 가치이다. 매년 인터브랜드(Interbrand)라는 브랜드 컨설팅 그룹에서 세계 100대 베스트 브랜드를 꼽는다.
가장 최근의 기준인 2013년 인터브랜드의 세계 100대 브랜드 기업 발표에, 우리나라 기업의 브랜드는 3개가 들어가 있다. 8위인 Samsung(삼성전자), 43위인 Hyundai(현대자동차), 93위인 Kia(기아자동차) 등으로 모두 제조업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수십년 간의 산업화를 이끌어 온 가장 큰 주역이 제조업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현대기아차가 지금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그 주역이었던 정몽구 회장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드리고자 한다. 2013년 11월 26일 저녁 7시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제네시스 신차발표회가 열렸다.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선 정몽구 회장은 기념사를 읽기 시작했다.
 
“현대차의 기술력이 집약된 새로운 제네스는 혹독한 성능 평가...”. 그는 제네시스를 발음하지 못해서 제네스라고 말했다. 기념사 내내 정몽구 회장은 제네시스가 아니라 제네스로 발음했다.
정몽구 회장(이하 정몽구)은 말을 참 못하는 사람이다. 써 준 것도 잘 못 읽는다고 한다. 그래서 1998년 정몽구가 왕자의 난을 거쳐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잡았을 때 사람들은 현대자동차가 곧 망할 거라고 얘기했다. 떠나려고 하던 회사 임원들도 많았다.
그랬던 그가 당시만 해도 3류에 불과하던 현대차를 어떻게 세계 제 4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을까.
정몽구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정주영을 정말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정주영(이하 정주영)은 아들들과 항상 함께 다니고 식사를 즐겼으며, 매일 새벽에 함께 식사를 마치고 부자가 모두 함께 현대사옥으로 걸어서 출근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들 정몽구는 아버지의 그림자도 못 밟은 세월이었다.

   
▲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청년 정몽구는 학창 시절 럭비부 출신으로 또래 중에 가장 힘이 셌다고 한다.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과는 동기로, 공부에만 열중하던 갸날픈 체구의 손병두를 정몽구가 지켜주곤 했다. 그런데 학창 시절 사고만 치고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공부도 잘하지 못했던 정몽구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났던 아들이었다.
정주영이 사업가의 필수 덕목으로 생각했던 영어는 못하거니와, 머리가 좋지 않고 몸만 앞서는 사람이라는 평이 정주영이 정몽구를 바라보는 주된 시선이었다.
맏아들 정몽필이 사고로 죽은 이후로 맏아들이 된 정몽구에 대해서, 줄곧 정주영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사업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하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몽구는 잡화상이나 시켜야지”라는 것이었다.
한양대 공과대학 공업경영학과를 1967년 졸업한 뒤, 정몽구는 정주영의 허락이 없어 현대 그룹에 정식으로 입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어머니가 회사 직원들에게 따로 부탁을 하여 아버지 몰래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정몽구는 부품담당 영업과장으로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고장난 차를 고쳐주는 AS서비스를 담당하는 당시 기준으로는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정몽구는 자동차를 고치는 AS업무로 시작하게 된다. 지금의 현대자동차 원효로서비스센터가 첫 직장이었다.
이후 10~15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흘러, 정몽구는 아버지로부터 컨테이너사업의 성공을 통해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다. 복잡한 기계가 아니라 단순한 철제박스에 불과한 컨테이너를 제작하는 현대정공의 경영을 1977년 정몽구가 맡게 되었는데, 이후 현대정공이 수년간 성장한 끝에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40%를 점하게 되면서 드디어 정주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이어 정몽구는 정주영에게 새로운 사업 제안을 하게 되어, 컨테이너를 만들던 회사 현대정공은 지프차를 만드는 회사로 변모하게 된다. 현대갤로퍼로 시작한 정몽구의 첫 사업은 쌍용 코란도가 장악하던 우리나라 시장을 양분하게 되어 주위로부터 경영능력을 더욱 인정받게 된다.
정몽구는 아버지 정주영에게 “말을 잘하지 못해도 경영은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계에서 정상의 위치를 구가하던 현대에게도 위기는 닥친다.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고난의 시절이 바로 그것이다.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경쟁자였던 정주영 회장은 그룹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1995년부터 본격적인 2세 경영이 시동된다.
전자, 건설, 중공업 등 주요 부문은 형제들과 분리해서 경영하게 되었지만, 정몽구는 1996년 현대그룹 회장에 오른다. 이후 2000년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과 완전히 분리하여 현대차그룹의 회장으로 임하게 된다.
 
현대차는 1976년 포니자동차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지만, 정몽구가 현대차그룹으로 완전히 독립하던 2000년에 이르기까지 세계시장에서 혹평을 받던 브랜드였다. 데이비드 레터맨이 진행하는 레이트쇼에서 “우주선 계기판에 현대 로고를 붙이면 우주비행사들이 겁에 질려 지구로 당장 귀환할 거야”라는 농담이 미국 방송계에서 횡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이 본격적으로 현대차그룹의 경영에 집중한 2000년부터 현대차는 본격적으로 달라진다. 앞서 2년 전인 1998년 기아차를 인수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현대차는 품질을 모든 것의 모토로 삼는 ‘품질경영’에 시동을 건다. 여기서 정몽구 회장의 과거 경험이 큰 빛을 발한다. 입사 초창기 AS센터에서 오래도록 근무했던 경력 말이다.
 
정몽구 회장은 현장 일선 구석구석에 임직원들과 함께 자주 방문했는데, 방문해서 불량품을 발견하거나 공정 문제나 제품의 하자를 조금이라도 발견하면 몇 마디 하지 않고 이렇게 짧게 언급했다고 한다.
“이것들을 당장 고쳐!”
그리고 정몽구 회장은 관련 임직원에게 해당 사항에 대해서 물어보고, 이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임직원 모두 그 자리에서 해고했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의 모토는 “품질이 모든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것은 당장 해결하라!”였다. 이를 통하여 일종의 럭비공 인사라는 세간의 평을 듣기도 했지만, 정몽구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품질관리만을 바라보았다.
한편 정몽구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한국금속노조(현대자동차노조)의 연이은 태업 및 파업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동차의 모듈화를 꾀한다. 전 부품의 모듈화를 통해 노동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한도로 낮추어 노조파업에 따른 생산성 차질의 문제를 최소화했다.
이러한 경영조치에 힘입어 현대차의 품질은 급속도로 향상된다. JD파워의 신차 100대당 품질 결함 기준을 의미하는 미국 신차품질지수(IQS) 추이에 따르면, 2001년 32위에 불과했던 현대차의 품질 순위는 2006년에는 3위에 이르게 된다. 정몽구 회장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동차 시장이 얼어붙은 와중에는, 오히려 강력한 마케팅 정책으로서 10년 10만 마일 무상보증을 소비자에게 약속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오히려 급속도로 더욱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이는 자사 제품의 품질에 대한 신뢰와 철저한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리스크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차는 이후 더욱 성장했다.
 
급기야 글로벌 생산거점으로 삼는 해외공장들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현대기아차 그룹의 연 생산능력은 800만대를 넘어섰으며, 2012년 업체별 판매대수를 기준으로 세계 5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현대기아차의 세계 자동차시장 점유율은 2007년 이후로도 꾸준히 상승하여 2012년에는 8.6%에 이른다.
 
시장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점에서 자동차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의 자동차 업계는 현재 전기자동차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내연기관으로서의 모터가 아니라 전기전자제품으로서의 엔진 구동력으로 자동차가 굴러가는 현재의 트렌드는, 구글을 위시한 IT기업들이 시장참여자로 들어와서 자동차시장이 더욱 가혹한 경쟁을 펼치는 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정몽구 회장의 리더쉽으로 현대기아차가 전기자동차라는 자동차 업계 ‘창조적 파괴’의 주역으로 다시금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 미디어펜
등록일 : 2014-10-06 09:32   |  수정일 : 2014-10-0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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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프리덤팩토리 대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1988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2003년에는 숭실대학교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2012년 3월 9년간 해오던 자유기업원장직을 떠나서 지금은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로 있다.

2013년 8월에는 시민 731명으로부터 1억 8478만원의 출자를 받아 새로운 싱크탱크인 프리덤팩토리를 경영하고 있다. 그 밖에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이념분과의 민간위원으로도 활동 중이고,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정호 교수는 대한민국 최고령 래퍼이기도 하다. 청년들과 소통하기 위해 김박사와 시인들이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2011년 1월에는 <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라는 음반을 냈다. 또 같은 해 6월에는 김문겸 중소기업호민관과 같이 동반성장을 주제로 하는 랩배틀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서 유튜브에 공개했다. 제목은 We Can Do It! 2012년 10월과 11월에는 대학로 갈갈이홀에서 <기호 0번 박후보>라는 시사 코미디에 래퍼이자 강연자로 출연했다.

「다시 경제를 생각한다 」「k-pop 세계를 춤추게하다 」비즈니스 마인드 셋」,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운대행 버스」, 「누가소비자를 가두는가」, 「땅은 사유재산이다」, 「왜 우리는 비싼 땅에서 비좁게 살까」 등 여러 권의 저서와 논문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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