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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조현제의 가고싶은 가고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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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쯔마 스튜던트 – 가고시마 중앙역의 ‘젊은 사쯔마의 군상’

글 | 조현제 남큐슈전문여행사 스토리투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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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2일은 큐슈신칸센의 전구간 개통일로서, 가고시마 중앙역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날 발생한 동북지역 대지진의 참사로 인해 축하행사는 생략한 채, 조용히 기차만 후쿠오카의 하카타역을 출발하여 가고시마 중앙역에 도착하였다. 가고시마 중앙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관광객을 맞아 주는 것은 ‘젊은 사쯔마의 군상’ 이라는 조형물이다. 가고시마 중앙역 동쪽출구에 서 있는 ‘젊은 사쯔마의 군상’이란 사쯔마번(薩摩藩 가고시마의 옛지명)이 1865년에 영국에 파견한 유학생 일행의 기념 조형물인데, 지금은 가고시마의 심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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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중앙역의 ‘젊은 사쯔마의 군상’ 사진 가고시마시 관광컨벤션

1865년 당시 일본은 쇄국령이 내려진 상태로 외국으로의 출국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사쯔마번(가고시마의 옛지명)이 막부와의 충돌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고 유학생을 파견한 데는 나마무기사건과 영국함대의 가고시마 포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 나마무기사건의 개요에 대하여는 다음의 책자를 통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교토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돌아가는도중에 또다시 중대한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히사미쓰의 행렬과 마주친 영국인 남녀 4명의 관광객들이 길을 막는다고 공격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점이 요코하마(横浜) 교외의 나마무기(生麦) 촌이기 때문에 보통 나마무기사건(生麦事件)이라고 한다. 나마무기는 오늘날에는 요코하마의 일부이다. 당시 다이묘의 행렬이 지나갈 때 평민들은 길 옆으로 물러나서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공손한 태도로 기다리는 것이 예의범절이었다. 불행하게도 영국인 관광객들은 이러한 풍습을 알지 못했다. 행렬의 선두에 있던 무사가 큰소리로 말에서 내리고 길옆으로 비킬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영국인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관광객의 선두에 선 리챠드슨의 말이 행렬 사이로 돌진했다. 이를 보고 나라하라 기자에몬이 리챠드슨의 복부를 칼로 베었다. 나라하라의 공격에 영국인들은 혼비백산했고 공격을 피해서 달아났다. 일행인 마샬과 클라크는 팔이나 어깨에 부상을 입고 여자인 보로델 부인은 머리칼이 일부 잘렸다. ”
<최승표저,"메이지 이야기" 중에서 북갤러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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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쯔마번과 영국과의 전쟁 그림:센간엔(仙巌園) 홈페이지
 
이 사건이 일어나자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는 발칵 뒤집혔고, 영국은 막부의 사과와 10만파운드의 배상, 그리고 사쯔마번에는 2만5천 파운드의 배상과 살해범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쯔마번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영국은 함포를 이끌고 사쯔마번을 향하여 포격을 강행하였다. 이에 사쯔마번도 해안포대에서 응사를 했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해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사쯔마번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의 우수성을 통감하고 막부의 쇄국령을 위반하면서까지 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영국과 손을 잡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이 메이지유신의 진행에 많은 공헌을 하고 일본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사쯔마번이 막부의 감시를 피해 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할 당시에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국인 무역상인 글로버이다. 나가사키(長崎)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구라바엔' 내의 글로버 저택의 주인이 바로 그이다.
당시 유학생들은 사쯔마번 근처의 섬인 코시키지마(甑島)에 출장을 간다고 하고서는 코시키지마 근처에서 글로버가 준비한 기선으로 갈아타고 몰래 영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사쯔마번 유학생 외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 젊은이들의 해외여행을 알선했는데 무역상인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메이지유신의 전개 과정에 그가 크나큰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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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바엔"내의 구글로버저택 사진:구라바엔 홈페이지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메이지유신과 관련한 또하나의 관광지를 만날 수 있다. 가고시마 시내를 흐르는 코우츠키강(甲突川 )을 가로지르는 다카미다리(高見橋)와 고려다리(高麗橋 코라이바시) 사이의 녹지대를 정비하여 역사의길 – 유신후루사토의 미치(維新ふるさとの道)¡± 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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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길 – 유신후루사토의 미치 안내도. 사진: 유신고향관 홈페이지
 
역사의 길 구간 내에는 메이지유신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시물과 영상, 그리고 로봇인형극을 통하여 전시하고 있는 ‘유신고향관’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그 위치는 막부말기 시절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토시미치등의 출생지인 가고시마시 카지야쵸(加治屋町)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 일본의 원동력이 된 가고시마의 역사와 인물 등을 여러기지 다채로운 전시와 연출을 통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전시관내의 주요 볼거리는 지하1층의 유신체감 홀에서 상영되는 2가지의 드라마이다. 그 중 “사쯔마 스튜던트, 서양으로” 라는 드라마에서는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세워진 ‘젊은 사쯔마의 군상’이라는 조형물의 주인공들인,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사쯔마의 젊은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드라마는 일본어로 진행되지만 사전에 신청하면 한국어 안내를 들을 수 있는 헤드셋을   이용할 수 있다.
300엔의 입장료가 필요하지만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전시장으로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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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고향관 내부- ‘고쥬(郷中)’ 라고 하는 선배가 후배를 지도하고 이끌어 주는 사쯔마번 특유의 교육제도를 소개하고 있는 코너이다. 사진: 유신고향관 홈페이지
 
 
한편 1853년에 미국의 페리제독이 동경의 앞바다 우라가항에 와서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기 약 30년 전인 1824년에 가고시마의 도카라지마(十島)에 영국의 포경선이 도착하여 선원들이 소를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파견 나온 관원과 선원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여 영국인 1명이 사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막부는 외국선박에 대하여 포격을 하여 격퇴할 것을 명하게 된다.
그 후 오키나와에 서구열강의 함선이 계속해서 찾아오게 되고 매년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오키나와를 찾아 와서 통상과 포교를 요구했다. 이러한 위기감으로부터 오키나와를 실제적으로 지배했던 사쯔마번은 서양식대포의 도입과 청동대포의 주조 등 해군력강화의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서구열강의 우수한 문명을 접하게 된 사쯔마번은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어 일본의 근대화에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사쯔마의 군상’ 기념비의 하부에는 기념비의 유래가 새겨져 있는데 일본인들에게 이들 젊은 사쯔마 유학생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게끔 여기에 전문을 옮겨 본다.

<기념비의 유래>
 1863년 사쯔마번은 영국과의 전쟁으로 유럽문화의 위대함을 알게되어 전번주 시마즈나리아키라의 유지를 받들어 영국에 니이노 히사노부(新納久修)이하 유학생과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당시 막부는 일본인의 해외출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시키지마(甑島)에 출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전원이 가명을 사용했다. 일행은 1865년 4월 17일 쿠시키노(串木野) 하시마항(羽島港)을 출발하여 도중에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면서 66일째인 6월21일 런던에 도착하여 런던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유학생과 함께 출국한 니이노 히사노부(新納久修), 고다이 토모아쯔(五代友厚)등은 영국에서 방적기계를 도입해서1867년 5월 가고시마시 이소(磯)지역에 일본최초의 기계방적공장인 가고시마 방적소를 건설했다. 기계의 설치와 조업지도를 위해 일본에 온 영국인 기사들의 숙소가 이소(磯)에 현존하는 이인관(異人館)이다.

더욱이 마쯔키 코우안(松木弘安)은 과거에 2년간 영국에서 체재한 경험을 활용하여 영국의 외무당국에 대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통일국가 일본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하여 영국당국의 이해를 얻어 냈다. 이후 영국의 대일방침은 일변하여, 프랑스가 막부를 지원하는데 반하여 영국은 막부타도파를 지원하게끔 되어 막부타도 운동의 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사쯔마번이 1867년에 파리만국박람회에 막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출품하게 된 것도 그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삿쵸동맹(薩長同盟)의 성립 이후 막부와 막부타도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국내정국은 크게 요동쳤지만, 막부타도파의 정점에 있던 사쯔마 당국은 파견단으로부터 유럽의 정보에 대해 큰 도움을 얻어 정세를 유리하게 전개하였다. 유학생은 그 후 대부분이 미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계속하고 귀국 후에는 메이지정부에 진출하여 유학의 성과를 크게 발휘했다.

사메시마나오노부(鮫島尚信) , 요시다키요나리(吉田清成), 나카무라하쿠아이 (中村博愛) 는 다 같이 공사가 되어 외교계에서 활약, 다나카모리아키(田中盛明)는 이쿠노은광의 개발에 진력하고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成)는 동경개성학교장(현재의 도쿄대학), 모리 아리노리(森有礼)는 초대 문교부장관이 되어 일본 문교부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마츠무라는 미국의 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해군 건설에 힘을 쏟아 해군중장이 되었다. 유학당시 13세의 최연소인 나가사와(長沢鼎)는  생애를 아메리카에서 보냈으며 광대한 포도농장을 경영하며 포도주제조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포도왕이라고 불리었다.

또 사절단의 니이노히사노부는 뒤에 사법관이 되었고, 마치다히사나리는 내무성에 진출, 고다이토모아츠는 오사카상공회의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했으며, 마츠키코우안은 외무부장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이와 같이 사쯔마 당국의 용기 있는 결단과 젊은 사쯔마청년 들의 적극적 열의가 일본의 역사를 크게 전환시켜, 신생일본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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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츠키가와(甲突川 ):가고시마 시내의 중앙역 근처를 흐르는 강 이름이 '갑돌강'이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인 '갑돌'이 가고시마의 강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사진:가고시마 관광컨벤션제공
 
사쯔마번은 일본 본토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시대를 앞서서 외압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사쯔마번이 부국강병, 식산흥업을 전개하여 메이지유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역사적 사실에서 아는 바와 같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영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통해 서구열강의 군사력과 문명의 우수성을 경험하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에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메이지유신의 주도세력들이 지금도 일본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메이지유신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는지.
등록일 : 2014-03-08 오후 6:01:00   |  수정일 : 2014-03-0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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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조현제 남큐슈전문여행사 스토리투어 대표

일본 남큐슈 최대의 여행 레저그룹인 이와사키 그룹 서울사무소장을 맡아 오랬동안 일했다. 지금은 남큐슈 전문여행사 스토리투어 대표로 '여행을 통한 일본 제대로 알기'에 힘을 쏟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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