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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미셸라이브의 런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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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왕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어떻게 아이를 배나요?"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여섯 명의 부인들 (5)

글 | 미셸라이브 회계사/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

네 번째 부인 – 플랑드르의 암말같이 생겼던 클리브스의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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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국왕 헨리와 독일 공주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과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크롬웰은 궁정화가 한스 홀베인에게 앤의 초상화를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초상화를 본 헨리는 괜찮은 것 같다며 결혼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클리브스의 앤을 직접 본 헨리는 ‘플랑드르의 암말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나한테 보고된 것이랑 왜 이렇게 다르냐’ 며 펄쩍 뛰었습니다. 크롬웰은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긴 소개팅에 나갔는데 너무 아니면, 주선한 사람이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싶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어 헨리와 클리브스의 앤은 런던의 그리니치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불운의 초상화는 파리의 루브르와 런던의 V&A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왕이 제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저를 죽이실까요?

헨리는 문화적이고 교양 있는 여자를 좋아했는데,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클리브스의 앤은 독일어로밖에 읽고 쓸 줄 몰랐고, 바느질과 카드놀이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온화하고 정숙한 자질은 왕비로서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나이가 이미 4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짜릿함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제 헨리는 더 이상 얼짱, 몸짱의 헨리도 아니었습니다. 마상창시합 도중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절게 된 헨리는 이전만큼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친 자리가 심하게 곪아 의사들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였으며, 곪은 자리에서는 계속 고름이 나와 항상 악취를 풍겼습니다. 사람이 아프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라 헨리는 기분의 변화가 심하고 난폭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로 기름진 음식을 과식하는 습관까지 생겨, 허리 사이즈 137cm에 몸무게 140kg의 비만이 되었습니다. 헨리가 앤과 치른 첫날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크롬웰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왕비는 어떠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헨리는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전에도 싫었는데, 지금은 뭐 다르겠냐. 이상한 냄새가 나서 같이 못자겠다!"
 
남자와의 경험이 전혀 없고 순진했던 앤은 잠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도 몰랐다고 합니다. 잘해도 문제, 못해도 문제입니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시간이 지나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불안해진 크롬웰이 앤에게 어서 아이를 가져 왕의 환심을 사라고 했지만, 앤이 말했습니다.
 
"제가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어떻게 아이를 배나요? 왕은 밤에 제 이마에 키스하고 잘 자라 하고 나가시는데요. 냄새요? 저는 왕의 고름 냄새가 더 힘든데요."
 
두려워진 앤이 물었습니다.
"왕이 제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저를 죽이실까요?"
 
 
왕비에서 왕의 여동생이 된 클리브스의 앤

독일과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헨리는 앤과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며 서둘러 이혼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반항하지 않고 이혼을 받아들인 앤이 고마웠던 헨리는 그녀를 ‘왕의 여동생(King’s Sister)’ 이라 칭하고 리치몬드 궁전과 이전에 앤 볼린 가족의 집이었던 히버 성을 선사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재산과 수입을 주며 자신의 부인과 딸들 다음으로 클리브스의 앤을 영국에서 가장 높은 여자로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헨리와 앤은 친구로 남아 나중까지 헨리는 앤에게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왕실의 많은 행사들에도 앤을 초대했다고 합니다.
그럴꺼면 그냥 살지라고요? No. 클리브스의 앤은 헨리에게 여자로 보이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후에 앤의 오빠가 헨리에게 다시 앤과 결합해 볼 것을 권장했지만, 헨리는 두 번 생각 안 해보고 주저 없이 거절했습니다.
 
 
왕에게 못생긴 여자를 소개시켜주다니… 사형!
평소에 크롬웰을 시샘했던 사람들이 클리브스의 앤을 주선한 것에 대한 왕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는 것을 기회삼아 그를 모함해, 크롬웰은 결국 메리 공주와 결혼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1540년 6월 반역죄로 런던 타워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사악하고 타락했지만 효율적이고 능력 있는 정치가로서 헨리가 원하는 많은 것을 이루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헨리는 나중에는 크롬웰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를 사형으로 몰고 간 신하들을 탓하며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연옥에서 만나 미안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단두대에서 크롬웰의 목이 떨어질 때에, 멀지 않은 곳에서는 헨리와 다섯 번째 부인의 결혼 축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부인 – 예쁘지만 머리가 나빴던 캐서린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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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브스의 앤의 궁녀였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는(헨리는 궁녀를 좋아합니다!) 앤 볼린의 친척이기도 했습니다. 앤 볼린의 상승과 파멸을 보며 뭔가 배웠어야 했습니다. 캐서린 하워드는 활발하고 예뻤지만 머리가 나빴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덕성이 없었습니다. 하워드 집안은 앤 볼린 때의 특권을 다시 누려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들은 캐서린을 통해 영국에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려는 꿈도 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꿈이 너무 컸던 볼린 집안처럼 하워드 집안도 빠르게 몰락으로 향했습니다.
 
옛 애인을 왕실로 불러들인 경솔한 행동
이제 50세가 넘은 헨리의 문제는 자신이 캐서린 하워드를 사랑하는 만큼, 19세의 그녀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착각한 데 있었습니다. 헨리는 어린 캐서린에게 값비싼 보석과 많은 토지를 선사했지만, 다친 다리를 절고 나이는 아버지 뻘인 헨리와의 결혼생활에 캐서린은 곧 싫증을 느꼈습니다. 헨리가 전쟁으로 스코틀랜드에 가 있었을 때 그녀는 전 애인 토머스 컬페퍼(Thomas Culpepper)를 왕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캐서린과 컬페퍼가 만나는 것을 눈감아준 사람들이 캐서린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기 시작해, 캐서린은 결국 그들의 압력으로 과거에 선약까지 했었던 다른 애인 프란시스 데레햄(Francis Dereham)을 비서로 임명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은 돌고 돌아 결국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헨리는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헨리는 캐서린이 본인에게 오기 전에 처녀였다고 생각했기에 더욱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데레햄과의 선약이 있었던 것을 인정했으면, 부정한 부인을 두어 창피해지는 사람은 데레햄이 됩니다. 또 당시 법에 의해 헨리와의 결혼은 무효가 되어 캐서린은 왕비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왕실 밖으로 쫓겨났겠지만, 목숨은 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 캐서린은 끝까지 선약이 있었음을 부인했고, 데레햄이 자신을 강간한 것이었다는 별 도움 안 되는 말만 계속했습니다.
결국 컬퍼페와 데레햄은 타이번에서 참수되었습니다. 그 둘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 위에 창으로 꽂혔습니다. 여자 잘못만나면 신세 망친다는 말이 이렇게 절절하게 와 닿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캐서린도 ‘창녀처럼 가증스럽고 문란한 삶을 살은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햄튼 코트 궁전에 갇힌 캐서린은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방에서 뛰쳐나와 헨리가 기도드리고 있었던 예배당으로 정신없이 달려가 문을 두드리며 헨리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봤지만, 경비병에 붙잡혀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며 다시 방으로 끌려갔습니다. 헨리는 그녀의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햄튼 코트 궁전에 캐서린 하워드의 유령이 이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는 곳은 ‘귀신 나오는 갤러리(Haunted Gallery)’ 라고 불립니다.
 
 
‘퀸’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파티는 다른 사람과 하고 싶었던 왕비
처형 전 날, 목을 대는 나무 받침을 감옥으로 가지고 오게 해 몇 시간 동안이나 받침에 머리를 대는 것을 연습했다는 캐서린. 당일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교수대로 올라가는데도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받는 벌은 정당합니다. 나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제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연습한 대로 나무 받침에 머리를 대었고, 친척 언니 앤 볼린 곁에 묻혔습니다.
 
한나라의 왕비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정숙하게 왕을 보조하는 것을 요구하는 역할인데, 20대 초반의 캐서린은 연애를 하고 싶었습니다. ‘퀸’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왕이 주는 선물만 받고, 파티는 다른 사람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황만 없는 가톨릭교 – 헨리 스타일
 
종교개혁과 수도원 해산 모두 헨리의 이름을 걸고 일어난 일들이지만, 가톨릭교의 ‘옹호자’ 헨리가 신교로 개종한 적은 없었습니다.
 
1536년 신교 성향을 띤 ‘10개 조항(Ten Articles)’ 이 발행되고 영어 성경이 보급되었지만, 이것에 심기가 불편했던 헨리는 1539년 ‘6개 조항(Six Articles)’ 을 통해 교황의 권리만 제외한 가톨릭 교리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포도주와 빵은 목사에 의해 정말로 예수님의 피와 살로 변한다고 했고, 예수님의 피인 와인을 흘리면 안 되니까 교인들은 빵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성직자와 과부들의 결혼이 다시 금지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시 성직자와 귀족 및 상류층으로 제한되었으니, 이미 매일 성경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영어’ 쓰시는 하느님에게 익숙해졌던 국민들의 실망과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섯 번째 부인 - 30대의 정숙한 여성, 캐서린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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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요, 그와 결혼하는 여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아요!"
캐서린 파Catherine Parr가 울부짖었습니다.
 
헨리는 이번에는 31살의 성숙한 캐서린 파의 도덕성과 정숙함에 매료되었는데, 헨리가 좋아하는 여자라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게다가 캐서린 파는 헨리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머스 시모어(Thomas Seymore)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왕이 좋다는데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thank you, but no thank you)’ 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죽나, 결혼해서 죽나 같습니다. 왕이 찍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인 것도 불행한 일이라, 토머스 시모어는 갑자기 벨기에로 발령받았습니다.
 
어찌되었건 왕비가 된 캐서린 파는 헨리의 첫 번째 전부인의 딸 메리, 두 번째 전부인의 딸 엘리자베스와 세 번째 전부인의 아들 에드워드에게 엄마가 되어주었습니다. 캐서린의 설득에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다음으로 다시 왕위계승권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캐서린의 위엄과 신앙심은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캐서린 밑에서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독실한 신교도로 자랐지만, 메리는 친엄마의 종교였던 가톨릭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종교개혁과 수도원 해산을 강행하고, 여섯 명의 부인 중 두명을 처형한 헨리 8세는 1547년 1월 28일, 55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병적인 비만이 죽음을 앞당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헨리는 본인이 죽은 후에도 캐서린 파를 왕비 대접 하라는 유서를 썼고 그녀에게 많은 재산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헨리가 죽은 뒤, 왕실을 떠나 첼시(Chelsea)로 이전한 캐서린은 옛 애인 토머스 시모어가 벨기에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재혼했습니다. 
사람들은 ‘왕이 죽은 지 6개월도 안됐는데 너무한다’ 고 비난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헨리와의 결혼 이전에 이미 두 번 결혼했던 그녀는 이번이 네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캐서린 파는 영국에서 가장 많이 결혼한 왕비가 되었습니다.
 

신교자가 애국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이 시기에는 예식을 중요시 여겼던 가톨릭교보다 사람들의 지적 수준에 호소했던 신교가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불은 신교의 바람은 앤 볼린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방법으로도 영국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영국이 유럽과 달랐던 점은, 유럽대륙에서의 종교개혁은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 남용과 타락에 대항한 서민들에 의해 일어났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과 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던 유럽에 비하면 영국의 신교로의 전환은 순조로운 편에 속했습니다.
 
원인과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영국의 역사를 바꿔놓았고, 영국은 유럽 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로마, 색슨족,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침략,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등 끊이지 않았던 침략과 전쟁에 지친 영국인들에게 신교는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이르러서는 정체성과 독립심을 심어주게 되었고, 신교(Protestantism)는 애국주의(Patriotism)와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즉 신교를 믿는 자가 애국자였습니다.

***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하면서 종교문제로 싸우던 헨리 8세의 자식들 - 에드워드(신교), 메리(가톨릭교)와 엘리자베스(신교) - 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라틴어로 미사를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영어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포도주와 빵이 정말 피와 살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됩니다.
등록일 : 2014-12-31 03:03   |  수정일 : 2014-12-3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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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라이브 회계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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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홍  ( 2014-12-31 )  답글보이기 찬성 : 30 반대 : 21
잘 읽었습니다. 영국 역사 공부가 참 재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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