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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미셸라이브의 런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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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부인 제인과 가톨릭 수도원 해산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여섯 명의 부인들 (4)

글 | 미셸라이브 회계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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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시모어 (Source: http://en.wikipedia.org/wiki/Jane_Seymour)
어린 아기같은 얼굴과 겸손한 성격을 지녔던 제인은 앤 볼린 때 절정을 이루었던 왕비들의 사치스럽고 헤픈 습관을 단순한 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얌전한 그녀는 정치에 참견하지도 않았습니다.

임신 중 입덧으로 메추라기를 먹고 싶어 하는 제인을 위해 헨리는 칼레와 플랑드르 같은 외국에서까지 메추라기를 수입해 왔습니다. 드디어 1537년 햄튼 코트 궁전에서 헨리가 그렇게도 바라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헨리 국왕을 축하할 시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만은 쉽지 않았고, 불행히도 출산 후 며칠만에 제인은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섯 명의 부인들 중 가장 사랑했다는 제인의 죽음 이후 낙심한 헨리는 3개월 동안 검은 옷을 입고 애도했습니다. 그 후 여러 번 결혼 제안이 있었지만 3년 동안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제인은 헨리의 부인들 중 왕비의 장례식을 치루고 윈저 성에 묻힌 유일한 왕비입니다. 헨리는 죽은 후에 제인 곁에 묻혔습니다.
 
돈이 궁해진 헨리…. 크롬웰과 헨리가 또 머리를 맞댑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물에 녹듯 녹아버린 문화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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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헨리: 요즘에 돈이 궁한데 어떡하면 좋겠느냐. 의미도 없고 돈도 많이 드는 일이지만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도 계속 해야겠고, 내 품위유지비도 낮출 수 없느니라.
 
크롬웰: 수도원들이 돈이 많은 것 같습니다, 폐하. 성직자들의 타락을 빌미 삼아 수도원들을 닫고, 그들의 재산을 왕실로 반납하게 하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헨리: 내 너 없이 어찌 살겠느냐? (What would I do without you?)
 
헨리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돈이 궁한 왕 + 부유한 교회 = 수도원 해산
 
1536년부터 1541년까지의 수도원 해산(Dissolution of Monasteries)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가톨릭교의 ‘옹호자’였던 헨리의 중심은 가톨릭교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아, 후에 미사를 금지하고 영어성경을 보급하기는 했지만 더이상의 변화를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크롬웰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상승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면 좀 더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고, 크롬웰 역시 비밀리에 루터사상의 발상지인 독일여자와 결혼하면서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하는 신교를 더욱더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와 단절했지만 1,000여년의 습성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 수도사와 수녀들은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교황에게 충성하고 있을 것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원들은 흑사병 이후 기부된 많은 재산을 잘 투자하며 늘려 런던 토지의 3분의 2를 포함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원 해산은 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가톨릭교를 뿌리 뽑고, 고갈된 왕실의 재정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방법이었습니다.
 
 
도끼로 찍어지고 불태워진 몇백년 역사의 유산
 
해산은 파괴를 의미했습니다. 당시 영국 전역에 850여개, 런던의 성벽 안에만 100여 개가 넘었던 수도원•수녀원•성당 및 다른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던 건물들이 1540년까지는 거의 하나도 성한 모습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무작정 해산시킬 수는 없으므로, 1534년 크롬웰은 규율에 따르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이유로 관리들을 파견해 수도승과 수녀들의 재정적•도덕적•성적 타락을 발각해 이슈 삼고, 그들의 재산과 수입을 자세하게 기록하게 했습니다. 사회의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 그들의 대부분이 매우 럭셔리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성경 말씀과 규율에 따라 살기는커녕, 폭식 폭음하며 술에 취한 채로 미사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수도승 한 명당 8명에서 10명의 여자친구들이 있었고, 많은 수녀들이 아이를 몇씩이나 낳았습니다. 여섯 명의 아이를 둔 수도원장도 있었습니다.
 
바로 크롬웰이 원했던 모습들이었습니다. 크롬웰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부하들은 덜 타락한 곳들에서는 과장된 보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충분한 증거를 획득할 수 있었던 크롬웰은 ‘교회들이 너무 타락해서 안 되겠다’며 전례없는 교회 건축물과 재산의 압수와 파괴를 시행했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그림들이 끌어내려지고, 엄숙해야 한다는 이유로 벽들이 하얗게 칠해졌고, 미신숭배라는 이유로 성자들의 동상과 유적들이 도끼로 찍혔습니다. 지붕과 수로의 납을 축출하기 위해 건물 전체가 불태워지면서 몇 백 년의 역사가 기록된 귀중한 도서들이 재가 되었고, 교회종이 녹여져 대포가 만들어졌으며, 앨프레드 대왕을 포함한 고대 왕과 성자들의 무덤이 파헤쳐져 돈이 되는 것은 모두 약탈되었습니다. 파괴되거나 약탈되지 않은 석재, 목재, 스테인 글라스와 귀중품들은 매매되었습니다.
 
수도원들을 파괴시키려고 온 행정관들에게 대항했던 사람들은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사지가 잘리거나, 산 채로 불속에 던져 넣어졌습니다.
 
수도원 해산은 영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문화와 예술의 고의적인 파괴였고, 중세를 휩쓸었던 가톨릭교의 열정이 이렇게 설탕이 물에 녹듯 해산(dissolve) 되었다고 해서 ‘수도원 헤산(Dissolution of Monasteries)’ 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들은 수도사와 수녀 외에도 많은 관료와 하인들을 고용하고 있었고, 종교적인 장소뿐 아니라 예술•과학•학문의 중심지로서 병원과 학교를 운영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기에, 수도원 해산 이후 런던에는 한동안 병원과 학교와 고아원도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환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졌고, 눈먼 자와 노인들은 거리로 쫓겨나게 되어 수도원 해산은 예술적으로 큰 손실이었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사회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 파괴할 수가 있습니까’ – 은총의 순례
 
종교개혁이 백성들의 믿음 생활에 그다지 실질적인 변화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교회들을 파괴하고 가톨릭교의 전통과 문화를 아예 역사에서 지우려 했던 수도원 해산은 다른 문제로, 여러 계층의 원성을 샀습니다. 수도원 해산 외에도 당시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오르는 세금, 공유지를 막아 경지를 목장으로 전환하여 농민의 실업과 농가의 황폐를 초래했던 인클로져(enclosure) 정책, 신교 형식의 예배 스타일을 강요했던 10개 조항, 사생아가 된 불쌍한 메리 공주, 왕을 쥐고 흔들었던 사악한 크롬웰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결국 1536~1537년 로버트 아스키(Robert Aske)라는 변호사가 주동이 된 영국 북부의 링컨셔와 요크셔에서 시작된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림을 들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행진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에 고귀한 뜻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순례’라고 했던 것이지만, 말이 순례일뿐 '은총의 순례'는 평민부터 귀족까지 여러계층의 무장한 사람들의 대규모 반란이였습니다.
 
초기에는 쫓겨난 수도사와 수녀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고 가톨릭교의 관습이 재개되는 등 반란이 성공할 것처럼 보였으나, 헨리와 크롬웰의 교묘한 작전에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헨리와 크롬웰은 반란자들의 요구사항을 받고도 몇 주씩이나 답하지 않으면서 아스키와 그의 3만 5,000명의 군대가 기다리는 동안 세력이 약해지기를 노렸습니다. 아스키를 런던으로 불러 왕실 연회에 초청해 ‘이런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어 고맙다,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종이에 쓰고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들도 적어 달라’고 하면서 주동자들을 파악했습니다.
 
‘곧 의회가 열릴 텐데, 그때까지 반란을 멈추면 참여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아스키는 군대를 해산했지만, 순진했지요. 은총의 순례는 1381년 농민봉기와 비슷한 면모가 많습니다.
 
물론 헨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반란의 주동자 200명은 모두 재판도 없이 반역죄로 처벌되었고(‘재판받아봤자 소용없으니 그냥 영장에 사인해라’), 아스키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특별히 요크 성에서 쇠사슬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무서워진 국민들은 더 이상 왕에게 대항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헨리는 수도원 해산을 더욱더 강화했고, 이때부터 가톨릭교인들을 반역자로 여기는 풍조가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헨리는 은총의 순례를 작고 하찮은 반란으로 보이게 하려 했지만, 사실 순례는 헨리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위협이었고, 만약 아스키의 3만 5,000명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규모가 더 커지고 런던에 이르기라도 했다면, 영국의 종교적•사회적 역사는 지금과 매우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입니다.
 
 
파괴적이었던 수도원 해산이 창조한 것들
 
 
거지의 수가 늘어나면서 불안정해진 사회
 
수도원 해산 이후 다른 성직자의 자리에 임명되거나 연금을 받았던 수도사와 수녀들도 있었지만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던 이들도 많았고, 수도원에서 일했지만 성직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아 거지의 수가 현저하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빈곤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구호품을 제공하던 수도원들이 있었던 자리에 일부 자선단체나 병원•고아원•양로원 등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병원들이 문을 닫게 되었던 것도 거지의 수를 더욱더 증가시키고 사회적인 불안정을 가져왔습니다.
이 문제로 왕실과 본인의 금고 채우기에만 혈안이었던 크롬웰과 ‘수도원들이 있었던 자리를 지역발전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앤 볼린의 사이가 멀어졌던 것입니다. 앤에게 위협을 느낀 크롬웰이 수도원의 마지막을 조정했듯이 앤의 마지막도 조정했던 것이었습니다.
 
 
늘어난 왕실의 재산
수도원 해산으로 해마다 들어오는 왕실의 수입이 15만 파운드(오늘날의 6,300만 파운드)만큼 증가했고, 부동산과 재산의 판매는 140만 파운드(오늘날의 4억 8,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크롬웰은 새로운 국왕재산 증가법원(Court of Augmentation)을 설립해 수도원 해산의 수익을 관리했는데, 수익의 일부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기부금 등 사회적인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의미 없는 전쟁들에 낭비되었습니다.
 
 
중상류층 벼락부자
수도원 해산으로부터 가장 큰 득을 본 사람들은 상류층과 중류층 서민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왕실의 소유가 된 수도원들의 토지와 재산은 일부 왕에게 아첨하는 이들에게 주어지기도 했지만, 당장 현금이 급했던 헨리는 상당수를 싼값에 팔았고, 이것은 젠트리들에게는 토지를 늘려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상인들에게는 부를 늘려 젠트리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파괴되지 않은 수도원들의 대부분은 일반저택으로 변했습니다. 성벽 안에만도 100여 개가 넘는 교회가 있어 밤하늘이 십자가들로 빛났었던 런던만큼 수도원 해산의 영향이 뚜렷했던 곳이 없었습니다. 수도원 해산으로 뜻밖의 횡재를 한 벼락부자 영주들이 부동산 시장에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다른 지방과 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과 더불어 런던의 경제발전을 도왔습니다.
 
귀중한 문화재들의 파손과 사회적인 불안정의 문제를 잊으면 수도원 해산은 정치적으로는 천재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수도원 해산을 통해 부를 획득하고 신분 상승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톨릭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블러디 메리의 영국을 다시 가톨릭교로 개종하려는 노력이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술집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종교개혁과 수도원 해산
종교개혁과 수도원 해산의 흔적은 영국 술집pub들의 이름에도 남아있습니다. 가장 흔한 술집이름이 성모 마리아(Virgin Mary) 에서 헨리 8세의 문장인 붉은 사자(Red Lion)로 바뀌었고, 가톨릭교의 느낌이 짙은 방주(arc)나 성 베드로(St. Peter)같은 이름들은 좀 더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뉘앙스가 덜 풍기는 배(Ship)나 직각으로 놓인 두개의 열쇠(Cross Keys)로 바뀌었습니다. 왕에게의 충성을 뜻하는 왕의 머리(King’s Head), 왕의 병기(King’s Arms), 왕관(Crown) 등의 이름들도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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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술집

한편 이런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헨리의 여성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등록일 : 2014-12-10 02:44   |  수정일 : 2014-12-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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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미셸라이브 회계사/작가

살사추는 회계사의 런던 이야기 – 소설처럼 읽는 런던의 역사, 생생하게 사진으로 가보는 명소, 런던에 사는 그녀의 삶. 미셸과 함께 런던과의 데이트를 시작하세요.

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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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ee  ( 2014-12-13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10
와 방대한 정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만수  ( 2014-12-11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2
헨리8세가 수도원의 해산으로 조성한 엄청난 돈과 부동산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 등에 많이 기부한 것으로 이야기들었는데, 머지않아 뉴턴 등이 여기서 학습하거나 머무르게 됩니다. 그 당시의 대학이란 성직자나 철학자들이 주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양반들은 까칠하지 않았습니까? 헨리8세가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도 그 양반들이 조용했었습니까? 그 당시의 대학의 교권은 어떠했습니까? 크지 않다고는 표현하셨지만 그 대학에 기부를 하지 않았다면, 일부 분들이 영국을 위하여 큰 일(결과적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장 갖춤)을 했다고는 하지만 후세의 평가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소용  ( 2014-12-11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2
깜짝 놀랐네요, 크롬웰이 역사상 유명한 Oliver Cromwell이 아니고
Thomas Cromwell이네요.내가 마침 미국의 선조인 청교도 퓨리탄들의 극단적 종교관
정치관으로 인해 고통받은 역사를 준비 중인데요. 암튼 자세한 소개 감사.
정중한  ( 2014-12-11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8
수도원이 기독교인들을 마녀와 이단으로 몰아 5000만∼7500만명을 죽이고, 그 재산을 강탈한게 아닌가?
SBS  ( 2014-12-10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목 여섯번째 부인 제인 에서 Jane Seymour 는 여섯번째 부인이 아니고 세번째 부인이지요.
      답글보이기  미셸라이브  ( 2014-12-10 )  찬성 : 3 반대 : 1
안녕하세요, 네 저도 아침에 보고 말씀드렸더니 고쳐주셨습니다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이홍  ( 2014-12-10 )  답글보이기 찬성 : 4 반대 : 8
잘 읽었읍니다. 영국 왕들은 악날하기도 하고 독재도 했지만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갔으니 그래도 다행인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그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요. 가능하시다면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를 한번 연재해 주실수 없을까요?
      답글보이기  미셸라이브  ( 2014-12-10 )  찬성 : 11 반대 : 3
감사합니다. 왕이 바보같을때는 의회가 나섰기에 이렇게든 저렇게든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은 런던 이야기 를 책으로 내는 과정에 있어서 시간이 없지만, 그 후에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도 한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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