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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아베 신조 日 총리의 정치적 자궁(子宮)...조슈(長州)를 가다

①아베 신조의 뿌리는 조슈벌(閥)

명치유신의 주체로서 일본 국수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만든 조슈벌(閥). 조슈벌의 후계자이며 한국침략의 원흉인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아베 신조. 아베家 3代가 흠모한 역사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요시다 쇼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카다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등 조슈(長州) 인맥은 일본사에서 어떻게 평가되든 한국사에서는 국권 강탈의 원흉들이다. 일제(日帝) 패망 이후에도 조슈(야마구치)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2人의 총리대신을 이미 배출했고, 이제는 아베 신조 내각의 제2기이다. 조슈 인맥의 사상적 뿌리에 접근, 아베 신조의 정치적 좌표를 탐색해 본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6-08-31 10:03

아베 신조는 A급 전범의 외손자

조슈번의 1863년 양이전(攘夷戰)에서 미국 상선에 첫 포격을 가했던 가메야마 포대(砲隊) 터에서 내려다본 시모노세키 해협. 이때의 포격이 근대 일본의 개막을 고(告)하는 제1탄이 되었다.
 지난 8월30일 오전 8시, 필자는 부관(釜關)페리 「성희호」로부터 하선해 시모노세키港(항)에 상륙했다. 시모노세키(下關)는 대마도(對馬島)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이다. 시모노세키港 국제터미널에서 시모노세키驛(역)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뱃머리와 驛 사이에 위치한 호텔 「도큐(東急)인」에 짐을 맡겨놓고 걸어서 역시 5분 거리인 아베 신조(安倍晉三) 중의원 지역구(시모노세키 제4선거구) 사무실로 직행했다. 시모노세키驛 남쪽 약 700m 「야마구치(山口)신문」 사옥 건너편에 위치한 신조의 지역구 사무실은 아직 출근시간 전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이곳은 재차 방문할 예정이라 위치만 확인해 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시모노세키에서 가장 사랑받는 역사인물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덕천막부)에 결정타를 가해 그 숨통을 사실상 끊어 버린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이다. 아베 신조의 이름 중 「晉」(한글 발음 진)은 「진작(晉作)」에서 한 字(자)를 따온 것이다. 총리대신이 될 뻔한 시기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晉三의 선친(先親)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自民黨 간사장과 외무대신 역임)의 이름에도 역시 「晉」 자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빌려 쓸 수 없다. 조선조 시대의 얘기지만, 할아버지 이름 字 중 한 字가 고을 이름 중 한 字와 같다고 해서 그 고을의 사또 부임(赴任)을 거부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관습은 우리와 정반대다. 시모노세키에서는 심지어 「晉作 우동」, 「晉作 모치(떡)」라고 쓰인 간판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베 신조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의 계보를 보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다카스기 신사쿠-기시 노부스케(岸信介)로 이어지는 조슈(長州) 인맥이다. 조슈는 일본 혼슈 서쪽 끝의 藩(번: 한)으로,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다. 신조의 어머니 요우코(洋子)가 기시의 큰딸이다. 젊은 시절의 기시는 일제(日帝)의 만주국 식민지 경영에 투신해 日帝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3개월간 복역하다가 풀려나와 자민당(自民黨) 간사장과 외무대신 등을 거쳐 1957년 2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오뚝이처럼 부활한 그는 정적들로부터 「昭和(소화·쇼와)의 요괴(妖怪)」라고 불렸다.
 
아베 신조(오른쪽)와 그의 시모노세키 지구당 당사(黨舍, 왼쪽).
  
  역사 왜곡의 원점인 일본서기의 맹신자들
  
  총리대신 재임時, 기시는 좌파의 극렬한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美日 新안보조약의 체결을 소신대로 강행했다. 훗날의 얘기지만, 이것은 일본의 안보와 경제번영의 초석을 놓은 「기시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베 신조는 「기시의 정치 DNA 상속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은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다. 에이사쿠는 어릴 때 사토家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에이사쿠는 총리대신 재임시, 미국에 점령된 오키나와를 반환받았고, 韓日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스승이다. 요시다 쇼인은 한일관계사 왜곡의 원점인 일본서기의 맹신자였다. 쇼인이 훈장 노릇을 한 「송하촌숙(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의 문하생들의 면면을 보면 신사쿠를 비롯해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스기조(入江杉藏),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다. 후일 明治정부의 실력자가 되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쇼카손주쿠가 개설되기 전 번교(藩校)인 명륜관(明倫館·메이린간)」에 다니면서 쇼인에게 배운 만큼 쇼카손주쿠의 숙생(塾生)들에게는 사형(師兄)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쇼인은 일본에서 「막말지사(幕末志士)의 스승」이라 불린다. 지금도 야마구치縣 사람들 앞에서 그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으면 대번에 핀잔을 받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쇼인은 잊지 못할 애물일 따름이다. 그는 일찍이 『서양(西洋)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몽(滿蒙)에서 벌충하자』고 부르짖은 정한론(征韓論)」의 원조(元祖)다.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伊藤博文 初代 1885.12~1888.4 5代 1892.8~1896.8 7代 1898.1~1898.6 10代 1900.10~1901.5
山縣有朋 3代 1889.12~1891.5 9代 1898.11~1900.10
桂太郞 11代 1901.6~1906.1 13代 1908.7~1911.8 15代 1912.12~1913.2
寺內正毅 18代 1916.10~1918.9
田中義一 26代 1927.4~1929.7
岸信介 56代 1957.2~1958.6 57代 1958.6~1960.7
佐藤榮作 61代 1964.11~1967.2 62代 1967.2~1970.1 63代 1970.1~1972.7
 
  『동(動)하면 우레 같고 발(發)하면 풍우(風雨) 같았다』
 
  시모노세키에 찾아온 만큼 우선 이곳 「최고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의 행적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아베 신조의 지역구 사무소를 뒤로 하고 걸어서 시모노세키 역사(驛舍)로 발길을 돌렸다. 「야마구치신문」 사옥 앞길을 거쳐 시모노세키 최대 할판점인 「씨몰하관(下關)」 옆으로 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바로 기차역이다.
 
  역사(驛舍) 안 교통정보센터로 찾아가 하루 동안 시내버스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패스」를 일금 700엔에 구입했다. 기왕에 역사를 찾은 김에 다음날인 8월31일 조슈번의 중심지로서  명치유신의 스타트라인인 하기(萩)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위해 시모노세키~東하기(萩) 간 왕복 기차표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편도 요금 1890엔).
 
  시모노세키는 시가(市街)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다. 시모노세키 시역 동북쪽 끝 지역 요시다(吉田)에 위치한 동행암(東行庵·도고안)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東行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호(雅號)다. 그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빛나는 족적(足跡)을 남겼다. 동행암은 신사쿠의 애인 오우노가 삭발하고 「곡매처니(谷梅處尼)」란 법명의 여승이 되어 신사쿠의 명복을 빌었던 암자다.
 
  시모노세키 역전에서 동행암까지는 25km 거리다. 중심가를 벗어나 산양도(山陽道·산요도)로 접어들면 버스의 차창 밖으로 간몬해협(關門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의 급류가 흐르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곳과 대안(對岸)의 北규슈市 모지(門司)港 사이의 바다 폭은 가장 좁은 곳이 600여m이다. 그 위로 간몬대교(大橋)가 걸려 있다. 이 간몬해협이야말로 1864년 조슈번이 영국 등 4국 연합함대의 포격에 굴복한 패전의 현장인 동시에, 1866년 신사쿠가 조슈번을 공격해 온 막부군을 격파한 결전(決戰)의 현장이기도 하다.
 
  모지港으로 건너가는 유람선의 선착장이 소재한 가라도(唐戶)의 가메야마(龜山) 포대, 간몬대교 바로 동쪽의 단노우라(壇之浦) 포대, 신사쿠가 조슈의 속론파(俗論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거병한 공산사(功山寺)가 소재한 조후(長府) 등이 차례로 전개된다. 필자는 가장 먼 거리의 동행암을 먼저 답사한 후 귀로에 이들 일본 근대사의 유적지를 둘러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신사쿠의 짧은 생애를 살피면서 그것과 동행(同行)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전야(前夜)」인 막말사(幕末史)를 간략하게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사쿠는 명치유신을 가능하게 했던 조슈 전쟁의 영웅이다. 신사쿠의 행적에 대해 그의 부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動(동)하면 우레 같고 發(발)하면 풍우 같았다』고 표현했다.
 

 
  吉田松陰을 만나 학문에 눈뜬 19세 청년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의 영웅이었다.
  신사쿠는 1839년 다카스기家의 1남3녀의 외아들로 조슈藩(번)의 성 밑거리(城下町·조카마치)인 하기의 국옥횡정(菊屋橫丁)에서 태어났다. 당시 다카스기家는 조슈번의 가신단(家臣團) 13등급 중 4등급인 大組(대조·오쿠미)에 속했다. 녹봉은 150石이다. 당시 쌀 1石은 지금의 18ℓ이다. 다소 여유가 있었던 中上級 무사집안이었다. 신사쿠는 12세 무렵부터 검술을 연마해 20세 전후에 유생신음류(柳生新陰流)의 면허(免許)를 개전(皆傳)한 검의 고수(高手)이다.
 
  그는 번교(藩校)인 명륜관 등에 다녔지만, 구태의연한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19세(1857년)의 나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숙(入塾)해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고 부터는 구국(救國)의 실용(實用)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독특한 교수법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신사쿠의 조부와 부친은 신사쿠가 쇼카손주쿠에 다니는 것에 반대했다. 훈장인 요시다 쇼인의 가격(家格)이 하급(下級) 사무라이인데다 그 정치노선이 과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였기 때문이다. 신사쿠는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밤중에 가만히 쇼카손주쿠에 다녔다.
 
  1859년 10월, 쇼인은 막부의 최고위직인 老中(노중)으로서 열강의 위협에 굴복하여 개국(開國)노선을 추진하던 마나베 아키가쓰(間部詮勝)의 암살을 기도한 사실이 드러나 에도의 전마정(傳馬町) 감옥에서 참수당했다.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들은 신사쿠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들은 복수를 맹세했다.
 
  1860년 1월, 신사쿠는 양친의 권유로 「하기 城下의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번사(藩士) 이노우에 헤이우에몬의 차녀 마사(雅)와 결혼했다. 1861년 3월, 신사쿠는 번주의 世子 모리 사다히로(毛利定廣)의 소성역(小姓役: 측근 비서직)으로서 번청(藩廳)에 출사했다.
 
  엘리트 번사(藩士)로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한 신사쿠에게 전기(轉機)가 다가왔다. 1862년, 24세의 신사쿠는 藩의 추천으로 막부 파견단의 1人이 되어 淸朝 중국의 上海(상해·상하이)에 도항해 중국의 내전(內戰)과 열강의 동향을 3개월간 시찰하게 되었다.
 
 
  『日本도 위험하다』
 
조슈번 攘夷激派의 리더 구사카 겐즈이. 겐즈이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더불어「松下村塾의 雙璧」으로 일컬어졌으나「禁門의 變」때 敗戰하자 현장에서 자결했다.
  막부가 이 시찰단을 보낸 이유는 上海에 무역의 거점을 설치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때 조슈번은 신사쿠에게 上海에서 「외국의 사정과 형세, 제도, 기계(器械)」를 견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太平天國의 난(1851~1864년)」이 발발해 上海 교외까지 교전지역이 되어 총소리가 들려오던 시기였다. 아편전쟁(1842년) 후, 부패·무력한 淸朝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태평천국의 혁명군에는 많은 농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상해港에 도착하면서 신사쿠 등을 놀라게 한 광경은 정박해 있는 유럽 열강의 상선·군함 수백 척과, 육상에 늘어서 있는 상관(商館)의 성곽과 같은 웅장함이었다. 2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남경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에 따라 중국 측은上海·廣州(광주)·福州(복주)·廈門(하문)·寧波(영파) 등 5개 港을 개항했다. 열강은 이들 5개 港에 영사관을 설치해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누리면서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신사쿠는 上海 체재 중의 일기인 「유청오록(遊淸五錄)」에 『중국인은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 일본도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 일기에서 신사쿠는 『우리 일본도 막부의 虛弱외교로 인해 이미 (중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통탄했다.
 
  특히, 신사쿠는 上海 체재중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縣)이 上海 일대에서 세계를 상대로 密무역을 이미 개시했고, 장래에는 사쓰마로부터 구미(歐美)로 건너가는 항로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신사쿠는 초조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의 최대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슈번은 구식(舊式) 범선 군함을 2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군비(軍備)로는 만약 구미 열강의 공격을 받는다면 한순간에 깨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上海로부터 규슈의 나가사키港에 도착한 신사쿠는 네덜란드의 무기상이 매도하려 했던 증기선을 매입하기 위한 계약을 독단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조슈번의 수뇌부는 그의 독단 구매계약을 추인하지 않았다. 번내에서 신사쿠의 독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측도 이 상담을 포기했다. 신사쿠는 번주 父子에게 귀국 보고를 한 후 에도(江戶·지금의 東京) 근무를 命(명) 받았다.
 
  신사쿠의 에도 체재시, 조슈번에서는 「항해원략책(航海遠略策)」을 주장하던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실각하고, 번론(藩論)이 쇄국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렸다. 「항해원략책에 조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구사카 겐즈이 등 양이파(攘夷派)가 경도(京都·교토) 조정 관계자와 통해 비난한 결과였다. 항해원략론은 쇄국을 포기하고, 서양열강처럼 해외로 진출해 국위를 떨치자는 구상이었다. 너무 앞서간 나가이는 결국 자기 배를 갈라 자결했다.
 
  1862년 7월, 항해원략책을 파기한 조슈번은 번론(藩論)을 이번에는 코메이(孝明) 천황의 지론이기도 한 양이(攘夷·조이)로 돌아섰다. 조슈번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京都 조정도 「攘夷」 방침을 명확히 했다.
 
  에도에서 신사쿠는 조슈번의 동지들에게 上海에서 느낀 「위기감」을 전달했다. 1862년 11월 신사쿠 등 10여 명은 가나가와(神奈川)에 있던 외국공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정보가 누설되어 중지했다. 이어 12월12일, 시나가와(品川)에 건설 중이던 영국공사관에 잠입해 방화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 방화에 참여한 범인은 신사쿠 등 13명이었는데,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방화범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구사카 겐즈이(쇼카손주쿠 수학 시절에 신사쿠와 더불어 「쌍벽(雙璧)」으로 불렸음), 이노우에 가오루(후일 외무대신과 駐조선공사 역임), 이토 히로부미(일본 수상 4회 역임).
 
 
  게릴라 전법(戰法)의 민병조직「기병대(奇兵隊)」창설
 
가메야마 포대 터. 1863년 5월10일 구사카 겐즈이의 지휘로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가 며칠 후 美 군함 와이오밍號의 보격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양이(攘夷)」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조슈번은 1863년 들어 절정기를 맞았다. 그해 3월4일 칙사로부터 양이(攘夷)를 독촉받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上洛(상락: 천황이 있는 京都로 올라감)했다. 쇼군의 上洛은 3대 이에미쓰(家光) 이래 200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 기회에 조정의 권위를 확립시켜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조슈번의 속셈이 숨어 있었다.
 
  당시의 유행(流行)사상은 非현실적인 양이(攘夷)였다. 1863년 4월20일, 이에모치는 불가능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世論에 밀려 「5월10일까지 양이(攘夷)를 단행하겠다」고 코메이 천황(天皇)에게 약속했다. 이미 구미 열강과의 사이에 개국의 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던 만큼 막부로서는 벼랑가로 몰린 꼴이었다.
 
  이 무렵 신사쿠는 실력이 없으면서 목소리만 큰 조슈번의 양이(攘夷) 방식에 회의했던 것 같다. 진짜 양이(攘夷)를 하려면 정치게임보다는 우선 군사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증강 건의는 조슈번 상층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25세의 신사쿠는 돌연 삭발을 하고, 그 다음날인 3월15일 번청(藩廳)에 10년의 휴가를 신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生家 근처에 은거했다.
 
  그러나 시대는 신사쿠에게 독서삼매(讀書三昧매)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 5월10일, 양이(攘夷)의 「급(急)선봉」이던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양이전(攘夷戰)을 감행했다. 5월10일은 조슈번이 앞장서 무리하게 막부를 몰아세워 양이기한(攘夷期限)으로 선포된 날이었다.
 
  1863년 5월10일 새벽 2시, 조슈번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지휘로 외국 선박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려고 하다 포격을 받고 혼이 난 선박은 미국 국적의 상선 팬브로그號였다.
 
  공격을 받은 미국 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 미국 군함 와이오밍號가 보복 공격을 가해 가메야마(龜山)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조슈번의 군함 경신환(庚申丸)과 임술환(壬戌丸)은 침몰하고, 계해환(癸亥丸)은 대파당했다.
 
  나흘 후에는 프랑스 군함 2척이 역시 보복을 위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민가(民家)도 방화하고 철수했다.
 
  이때 은거 중이던 신사쿠는 번청(藩廳)에 게릴라 전법의 민병(民兵)조직인 「기병대(奇兵隊·키헤이타이)」의 창설을 건의했다. 그가 창설한 奇兵隊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투력 위주로 대원을 선발·편성한 부대였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총독에 취임했다. 기병대에 이어 유격대(遊擊隊)·어순대(御盾隊)·집의대(集義隊)·역사대(力士隊) 등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제대(諸隊)의 총병력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번청(藩廳)은 농민·상인 등 일반 백성이 무장을 하고 무기(武技)를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만 무기를 소유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막부 조종(祖宗)의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조치였다.
 
 
  「8·18 정변(政變)」으로 추방된 조슈藩
 
  이 무렵 조슈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는 조정의 급진적 공경(公卿)과 짜고 천황의 양이친정(攘夷親征)과 도막(到幕·막부타도)의 강행을 기도했다. 그러나 코메이 천황은 열렬한 양이론자(攘夷論者)이기는 하되, 양이(攘夷)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公武合體)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공무합체(公武合體)에서 「公」은 조정(朝廷), 「무(武)」는 막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코메이 천황이 「막부의 타도」라는 현실정치의 변혁까지는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조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는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자파(自派) 공경(公卿)들을 통해 천황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8월13일 「양이(攘夷)를 위한 천황의 친정(親征)을 결행하겠다」는 조칙(詔勅)이 나왔지만, 역량상(力量上)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조슈번의 라이벌인 사쓰마번과 경도수호직(京都守護職)을 맡고 있던 아이즈(會津)번이 조슈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를 경도(京都)로부터 추방하기로 합의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8월18일 새벽, 아이즈·사쓰마·요도(淀)의 세 藩에 황거수위(皇居守衛)의 명령이 떨어졌다. 3藩의 병력은 완전무장하고, 宮城의 9개 문을 엄중히 폐쇄하고, 召命(소명)이 없는 자는 예컨대 그가 관백(關白: 천황을 대리해 정무를 처리하는 최고위직)이라도 입문시키지 않았다.
 
  조의(朝議)에서는 양이파(攘夷派) 공경(公卿)의 참내(參內)·외출·면회의 금지, 조슈번의 사카이마치門 경위 임무 免除 등이 결정되었다. 이 친위 쿠데타가 「8·18의 變(변)」이다.
 
  조슈번 병사들은 사카이마치門까지 달려왔지만, 사쓰마번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쓰마 번병들은 대포의 포구를 열어 놓고 발사할 태세였다. 양군(兩軍)의 대치상태에서 조슈번에 대해 「퇴거하라」는 칙명이 전해졌다.
 
  상황은 조슈번에 절대 불리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쫓겨난 공경(公卿) 7명 및 양이파(攘夷派) 사무라이를 포함한 2600명이 京都 북쪽 대불묘법원(大佛妙法院)에 모여 협의한 끝에 일단 조슈로 내려가 재거를 도모하기로 했다.
 
 
  「금문(禁門)의 변(變)」과 막부(幕府)의「제1차 조슈 정토(征討)」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조슈번은 10월1일 신사쿠를 오번두(奧番頭)로 삼았다. 오번두는 번주의 측근 중 측근으로 사실상 번을 운영하는 역직(役職)이다. 당시 신사쿠의 나이 25세.
 
  공무합체파(公武合體派)에 의한 8·18정변으로 京都에서 쫓겨난 조슈번의 존양파는 1864년에 들어 상경(上京) 복수전을 감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조슈번 유격대 총독 키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 구사카 겐즈이 등이 강경하게 京都 진발을 주장했다. 신사쿠는 『편협한 시야(視野)에 의한 소양이(小攘夷)를 버리고, 진정한 부국강병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진발파(進發派)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신사쿠는 동문수학(同門修學)한 구사카 겐즈이 등 진발파를 설득하기 위해 번명(藩命)을 받지도 않고 2개월간 上京한 사실이 밝혀져 귀번한 후 즉각 성하(城下)의 야산옥(野山獄)에 수감되었다. 당시 「탈번(脫藩)의 죄」가 가볍지 않기는 했지만, 스피드 출세를 한 신사쿠에 대한 주위의 질투가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신사쿠는 「직언직행 방약무인(直言直行 傍若無人)한 성격」이라는 인물평을 받고 있었다.
 
  조슈 양이격파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슈번은, 병력 3000여 명은 4隊로 나눠 京都로 진격했다. 1864년 7월19일 未明, 조슈번의 家老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의 부대가 京都 진입을 노리며 伏見(후시미) 가도(街道)를 북상하다 오가키·히코네藩 부대와 조우해 전단이 열렸다.
 
  가노(家老) 쿠니시 시나노와 유격대 총독 키지마 부대는 2대로 분진(分進)해 하마구리門을 향해 쇄도했다. 백병전을 벌여 일시는 아이즈 藩兵의 수비선을 뚫고 궁궐 내부로 침입했지만, 새로 투입된 사쓰마·구아나(桑名) 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구사카 겐즈이의 부대는 사카이마치門에 육박했지만, 포격전 끝에 패주했다. 겐즈이는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조슈의 4路軍은 모두 패전했고, 키지마 등은 전사했다. 이로써 조슈번 존양파는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것을 궁궐에 대포를 쏘았다고 해서 「禁門(금문·킨몬)의 變」, 또는 최대 격전지의 이름을 따 「하마구리門의 變」이라고 부른다.
 
  코메이 천황은 조슈번 추토(追討)의 칙령을 발했다. 궁궐을 향해 대포를 발사한 조슈번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격노한 것이다. 막부의 조슈정벌軍(총독 德川慶勝)은 히로시마에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조슈번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15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열강 함대와의 「제1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혼찌검이 나고 군사력도 피폐해진 조슈번은 항전을 포기했다. 조슈번의 속론파(俗論派) 정권은 막부군에 공순(恭順)의 자세로 화평(和平)를 요청했다. 막부군은 「禁門의 變」 현장 책임자인 마쓰다(益田右衛門介) 등 세 가노(家老: 번의 최고위직)의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삼키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슈번은 세 가노(家老)를 셋부쿠(切腹: 자기 배를 갈라 자결함)시키고, 나카무라(中村九郞) 등 참모 4명은 참수했다. 세 가노(家老)의 수급은 즉각 히로시마의 막부 대본영(大本營)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사죄(謝罪)의 세리머니는 끝나고, 강화 조건을 정하는 실질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막부 측은 조슈 번주 父子를 감시하에 두기 위해 에도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부로서도 15만의 정장군(征長軍)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다이묘들이 유혈 사태를 회피하려 했다. 무엇보다 거액의 파병비용을 더 이상 지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864년 2월 막부군과 조슈번 사이에 모리(毛利) 부자가 사죄·근신하는 등 막부의 체면을 세워 주는 선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제1차 조슈정벌戰은 전투를 치러 보지도 못한 채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막부 내부의 강경파는 화평조건에 불만이었다. 이럴 때 조슈번에서는 「토막(討幕)」을 주장하는, 자칭 「정의파(正義派)」가 쿠데타를 일으켜 항복노선의 속론파(俗論派)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토막(討幕)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태를 방관하고서는 막부의 위신이 설 수 없었다. 1865년 3월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조슈 정벌을 위한 칙허(勅許)를 얻기 위해 上洛했다.
 
  막부의 힘이 강한 때였다면 쇼군이 그런 칙허(勅許) 따위는 애당초 받으려고 생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존왕양이파에 의해 잔뜩 고무된 천황은 종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코메이 천황은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에 딴지를 걸었다. 먼저 조슈번과 협상해 보고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정토하라는 따위의 간섭이었다.
 
  이렇게 막부의 정장전(征長戰)이 자꾸 천연되는 상황에서 4개국 연합함대의 조슈번 공격이 더 빠르게 전개되었다. 1863년 5월10일부터 6회에 걸쳐 외국선에 대해 포격을 감행한 조슈번에 대해 4개국이 응징을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번명(藩命)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급거 귀번해 「열국과 강화하라」고 번청(藩廳)을 설득했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禁門의 變」이 발발해 궤멸적 타격을 받은 조슈번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회피를 위한 교섭대표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계속)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6-08-31 10:03   |  수정일 : 2016-08-3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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