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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민족 통일을 견인하고, 일본의 천황씨(天皇氏)를 배출한 가야의 맨파워

'가야의 빅3' 아라가야(阿羅加耶: 함안)(1)

"고대일본의 최대 기술혁명 제품 스에키(須惠器)는 아라가야계 도질토기(陶質土器)라 불러야 옳다"

일찍이 가야인은 日本으로 건너가 신천지를 개척하면서 천황씨(天皇氏0를 배출했고, 가야의 후예는 한민족(韓民族) 형성의 결정적 전기(轉機)인 신라의 삼국통일을 견인했으며, 현대 한국에서 가야 김씨는 제1의 대성(大姓)집단이 되었다. 고대 일본 최대의 기술혁신 제품 스에키(須惠器)는 일본의 프라이드이지만, 그것은 아라가야에서 만든 '불꽃무늬 토기'의 아류(亞流)였다. 그럼에도 가야는 우리에게 '未知의 영역'으로 버려져 있다가 일본의 관변(官邊)학자들에 의해 '임나일본부 지배한 식민지'로 훼손당하고 말았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사진 | 이태훈 월간조선 사진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2014-12-14 15:37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함안군 가야읍 末伊山에 펼쳐져 있는 가야 최대 규모의 도항리·말산리(시가지 쪽) 고분군. 일제시대의 慶全線의 철로 건설로 말이산의 동쪽 기슭이 잘려 나가 평지화했다(함안박물관 제공 항공사진).
  阿羅加耶(아라가야)는 한국 古代史(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이다. 아라가야의 옛터 咸安(함안)은 필자에게 아스라한 추억의 고을이다. 45년 전, 高2 겨울방학 때였다. 『咸安에 가서 「趙대목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 안다』는 귀띔 한 토막에 의지해 그분 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1961년이 저물어 가던 그날, 釜山에서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저녁 무렵에야 함안군 伽耶面(가야면) 車埠(차부: 버스정류소)에서 내렸다. 『趙대목씨 댁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당시 가야면엔 여관 같은 것도 없었다. 난감한 순간이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필자의 어깨를 툭 쳤다. 부산의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 李某였다.
 
  함안군의 군청 소재지는 그때도 伽耶面(1979년에 가야읍으로 승격함) 末山里였다. 伽耶面은 일제 때 慶全線(경전선)이 통과한 이래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엔 가야읍 중심가의 바로 북쪽으로 남해고속도로까지 지나가고 있다.
 
  함안군의 군청은 원래 咸安面에 있다가 1954년 驛前(역전) 취락으로 성장한 가야면으로 옮겨졌다. 이런 과거사 때문에 咸安郡은 郡名(군명)과 군청 소재지의 地名(지명)이 일치하지 않는 매우 희귀한 郡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야읍 주민들은 함안면에 가면서 『읍내에 간다』고 말한다. 외지 사람들로선 헷갈리게 마련이다.
 
  그날, 李某는 咸安面으로 곧장 넘어 가려는 필자를 굳이 그의 집으로 끌고 갔다. 당시 李某의 집은 함안군청 건너편 국도변에 있었다. 국도라 해봐야 먼지를 풀풀 날리는 10여m짜리 非포장도로였다. 
 
본문이미지
함안말이산 고분군의 설경/ 함안군


  
  지금의 함안군청 바로 뒷산이 가야 諸國(제국)의 고분군들 중 최대 규모의 末伊山(말이산) 고분군이다. 말이산은 「마리산」의 音借(음차)이다. 「마리(首)」는 音韻變化(음운변화)에 의해 오늘날엔 「머리」로 변해 있다. 아라가야의 王級(왕급) 무덤이 즐비한 곳인 만큼 「머리山」이라 일컬을 만하다.
 
  하지만, 그때는 末伊山이 아라가야의 중심 유적지인지 몰랐다. 1960년대만 해도 모두들 먹고살기에 바빠 『문화유적이 밥 먹여 주냐?』는 말이 「原論(원론)」에 가깝던 시절이었다. 末伊山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0년대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그때 필자는 趙대목이 「성은 趙요, 이름은 대목」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李군에게 「趙대목씨가 어떤 분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의 大姓인 咸安 趙氏의 門中人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펜터(大木: 큰 건물을 짓는 목수) 趙란 분인데, 함안면의 地主라더군』
 

 
 
 45년 만의 방문
 
아라가야 최대의 왕릉 末伊山 4호분. 封土의 지름 39.3m, 높이 9.7m.
  冬至(동지) 무렵의 해는 토끼 꼬리처럼 짧아 加耶面 거리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필자는 그날 밤을 李군 집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李군 집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10리 길을 달려 趙大木 댁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함안이라면 언젠가 꼭 한 번은 다시 가고 싶었다.
 
  지난 3월21일 「꿈★은 이루어졌다」. 서울을 출발해 가야읍 도항리 748번지 함안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남해고속도로 함안IC를 빠져나와 신호등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가야동에 접어드는 지점에 이르니 벌써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불꽃(火焰)무늬 土器」의 대형 모형물로 장식된 함안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60m의 末伊山을 사이에 두고 북쪽 기슭엔 함안박물관이 호젓하게 들어서 있고, 남쪽 기슭을 따라 가야읍의 중심가(末山里)가 형성되어 있다. 오후 3시30분, 함안박물관 학예연구사인 白承玉(백승옥) 박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최근, 왕성하게 가야사 관련 학술논문을 발표해 온 젊은 그와 3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前·後期 가야연맹의 兩强
 
불꽃무늬 토기(중앙)를 상징물로 세운 함안박물관.
  ―우리는 흔히 아라가야라고 합니다만,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에는 阿尸良國(아시량국)과 阿那加耶(아나가야), 그 列傳(열전)에 阿羅國(아라국), 「삼국유사」에 阿羅伽耶, 「일본서기」에 安羅와 阿羅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어떤 국명이 맞습니까.
 
  『金官가야, 아라가야 등의 ○○가야라는 것은 가야연맹 존재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羅末麗初(나말여초)에 생겨난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阿尸良에서의 「尸(시)」는 古語에서 사이시옷(ㅅ)으로서 阿尸良은 「아ㅅ라」이고, 이것이 阿那 또는 阿羅로 표기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阿尸良, 阿羅, 阿那, 安羅 등은 모두 「아ㅅ라」를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사이시옷(ㅅ)은 「ㄹ」 받침의 音價(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혀집니다. 「알라」의 音借字(음차자)로 가장 가까운 것이 「安羅」입니다. 그런 만큼 安羅國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봅니다』
 
  함안군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형이다. 함안의 남동쪽에는 해발 600~700m의 산들이 둘러싸 창원·마산·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에는 南江이 東進하여 낙동강과 합류하고 있다. 남쪽 山地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溪谷流水(계곡유수)를 이용한 谷間(곡간)평야와 남강·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라국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낙동강·남강을 이용한 교통로도 안라의 주요 성장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안라국은 「三國志(삼국지)」 韓條의 安邪國(안야국)이 모체였던 것으로 봅니다. 안야국 단계의 인구는 4000~ 5000家, 2만~2만5000명, 전성기인 안라국 시대엔 1만家, 5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안야국의 형성 시기를 한반도 南部에 철기 보급이 일반화되는 기원전 2세기, 혹은 그보다 약간 소급해 기원전 3세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안야국·안라국은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약 800년간 번영했습니다』
 
  ―가야 사회에서 안라국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서기 400년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의 最强(최강)이었고, 안라국은 랭킹 2위였습니다, 5세기 중엽 이후는 가락국의 高靈(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안라국이 각각 가야 북부와 남부의 맹주였습니다』
 
  ―「三國志」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에 따르면 弁辰安邪國(변진안야국)은 三韓시기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안야국·안라국이 南部 가야의 리더로 도약하는 계기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함안 지역의 유적 분포를 보면 함안분지권, 郡北圈, 柒原圈(칠원권)으로 대별됩니다. 이 중 柒原(칠원)은 안야국의 범위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라국은 浦上八國(포상8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칠원권 등을 편입시켰고, 이후 南部 가야의 맹주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뒤편 山 아래가 아라가야 王宮 터로 전해 오는 伽耶邑 가야동 일대.
 
 
 도약의 轉機-浦上8國과의 전쟁
 
아라가야의 기마무사. 함안 지역에서 출토된 갑주와 말갑옷을 모델로 재현시켰다.
  그렇다면 浦上8國 전쟁이란 무엇일까. 다음은 「三國史記」의 관련 기록이다(괄호 안은 필자 注).
 
 < 勿稽子(물계자)는 奈解 尼師今(나해 이사금) 때의 사람이다. (중략) 이때 浦上八國이 모의해 阿羅國을 쳤다. 아라국의 使者가 (신라에) 와서 도움을 청했다. 이사금이 王孫인 捺音(날음)으로 하여금 인근의 郡 및 六部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해 8國의 병사를 패퇴시켰다. (중략) 3년 뒤 骨浦(골포: 지금의 창원·마산), 柒浦(칠포: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古史浦(고사포=古自國: 지금의 固城)의 3국 군대가 竭火城(갈화성: 지금의 울산)을 공격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했다. 3국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삼국사기 列傳 8 勿稽子傳)
 
  浦上八國이 함안의 안라국을 공격했던 신라 나해왕 17년의 실제연대는 3세기 말엽~4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浦上8國은 그 명칭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浦口(포구)나 해양을 그 존립 기반으로 삼는 小國들이었다. 그렇다면 포상8국이 동맹을 결성해 침략전쟁을 감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安羅國史」의 저자 南在祐씨(창원대 강사)의 주장이 많은 시사를 던지고 있습니다. 南씨는 포상8국이 안라국을 공격한 이유를 「농경지의 확보와 내륙지방으로의 진출 모색에 있다」고 했습니다』
 
  포상8국은 1~2세기에 걸쳐 樂浪(낙랑)·대방 등 중국 郡縣(군현)과의 교역관계를 통해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일층 발전된 사회 만들기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포상8국은 그들이 처한 입지조건상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해안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역에는 好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해상으로부터의 外勢 침입에 대비하기 어려운 불리한 조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惡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好조건을 구비한 안라국을 노렸을 것입니다』
 
  함안군의 남쪽은 여항산(770m)·광려산(720m) 등 600~700m급의 산지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고, 북쪽은 南江과 낙동강이 자연방벽을 이루고 있다. 함안군은 경지율이 32.4%로 경남에서 제일 높고, 면적에 비해 논도 많다(權赫在 고려大 교수의 「韓國地理」, 法文社, 1999). 남쪽의 여항산 등에서 발원해 남강으로 흘러드는 함안천·석교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광노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古代의 안라국은 농업 생산량이 풍부하고 남강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水運(수운)도 편리했을 것이다.
 
  3세기 말엽 또는 4세기 초엽의 일로 추정되는 포상8국 동맹의 전쟁도발은 한반도 남부의 세력판도에 상당한 충격을 가했다. 포상8국은 안라국을 공격하기 3년 전에도 김해의 駕洛國(가락국)을 침략했다가 신라 원군의 개입으로 6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등 참패한 바 있었다(「三國史記」 나해왕 14년 條).
 
  신라군의 개입으로 가락국과 안라국 공략에 실패한 포상8국은 이어 보복전을 전개한다. 포상8국의 主力인 古自國(고자국: 지금의 경남 고성) 등 3國은 나해왕 20년 신라의 對外 교역항이자 남해안 진출 기지인 竭火(갈화: 지금의 울산)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포상8국의 패전이었다.
 
  9년간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실패한 포상8국의 지역연맹체는 퇴조하고, 전승국인 가락국·안라국·신라의 약진이 실현되었다. 이후 안라국의 영역은 남쪽으로는 여항산을 넘어 鎭東灣(진동만), 동쪽으로는 마산·창원, 서쪽으로는 진주 일부, 북쪽으로는 남강 北岸인 의령의 남부지역에 달하게 된다.
 
  5세기가 개막되는 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步騎(보기) 5만 명을 보내 가락국과 倭에 점령당한 신라를 구원하고, 가락국의 본거지인 낙동강 하구 김해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같은 고구려軍의 원정은 백제-가락국-倭의 동맹을 분쇄해 한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대 캠페인이었다. 만약 이때 慕容氏(모용씨)의 後燕(후연)이 고구려의 西北境(서북경)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신라·가야뿐만 아니라 백제도 고구려에 병합될 뻔했다.
 
 
 
 안라국 主導의 高堂국제회의
 
아라가야의 單甲과 투구. 함안박물관 소장.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역까지 휩쓴 고구려軍은 배후의 불안 때문에 곧 회군했지만, 가야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심대했다. 김해의 가락국은 가야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추락하고,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가 각각 남북 가야사회의 盟主的(맹주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은 『그로부터 고령 지역을 「우(上)가야」, 함안 지역을 「아래(下)가야·아라가야」로 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29년, 지금의 함안에 있는 안라국에서 신라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아 사실상 멸망한 南加羅(남가라=가락국), 卓淳國(탁순국: 그 위치를 놓고 大邱說과 昌原說이 양립해 있음) 등 南部 가야를 재건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가락국의 멸망 연도는 서기 532년으로 「三國史記」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신라에 귀속된 시기를 서기 524년 前後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안라국은 이 국제회의를 위해 「高堂(고당: 높은 건물)」을 세웠다. 학계에서는 이를 「高堂회의」 또는 「安羅회의」라 불러 왔다. 참가국은 안라국·백제·신라·倭 등 5개국이었다.
 
  ―高堂회의 참석자 9명의 면면을 보면 안라국에서는 安羅國主 이외에 「國內大人」 2명이 더 참석하고 있습니다. 「국내대인」은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國內大人은 안라국 예속의 지방세력으로 봅니다. 안라지역연맹체 단계에서 연맹체에 속하는 小國의 首長層(수장층)이었다가 안라국이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앙관료로 편입되었거나 자치권을 인정받으면서 안라 국왕의 통제를 받았던 인물들일 것입니다』
 

 
 
 홀대받은 백제 사신
 
  ―신라는 가락국과 탁순국을 병합한 나라이어서인지 처음엔 안라 高堂회의 참가를 주저하다가 참가하게 됩니다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신라와 大加耶의 결혼동맹이 파탄 직후인 529년에 안라 高堂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신라는 그동안 對가야 교섭 파트너였던 大加耶와 결별했던 만큼 새로운 파트너를 모색하기 위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南部 가야 일부를 잠식한 후 그 以西 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6세기代 南部 가야 諸國의 맹주였던 안라국의 의중 모색, 이것이 신라 측의 高堂회의 참석 목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신라와 大加耶의 2국 간 동맹은 「삼국사기」 法興王 9년(522)條의 『3월에 가야 국왕(이뇌왕)이 사신을 보내 (신라 왕녀와의) 혼인을 청하매 왕이 이찬 比助夫(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냈다』는 기사로 보아 52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신라 왕녀를 따라온 시녀 100명의 간첩행위 때문에 파탄이 나는 529년 초까지 지속되었고, 그 직후에 안라 高堂회의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高堂회의에서 백제 사신은 회의장인 高堂에 올라가지 못해 한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백제 사신이 홀대를 당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제는 513년 帶沙(대사: 지금의 경남 하동) 등지를 장악했습니다. 특히 帶沙는 대가야의 바다로 향한 유일한 출구, 즉 對外 진출기지였습니다. 이후 백제는 대가야와 결별하고 남부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각국의 상황이 안라 高堂회의를 성립시킨 배경이었군요.
 
  『안라국은 백제의 가야지역 잠식 의도를 직접적으로 목격한 후 백제를 견제할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高堂회의 직후 백제의 가야 남부 침략의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531년, 백제는 안라국의 관할권 내인 乞城(걸탁성)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高堂회의 실질적 당사자인 안라와 신라는 이후 540년대 후반 安羅가 다시 親백제 노선으로 돌아설 때까지 우호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4-12-14 15:37   |  수정일 : 2014-12-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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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욱상  ( 2014-12-14 )  답글보이기 찬성 : 26 반대 : 8
사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라는 것은 적절치 않은 표현일 수도 있을 만큼, 6세기 이전까지는 가야도 중요한 고대국가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고구려 백제 신라만 치고 가야를 빼고 논하는 이런 풍조는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일본 학자들이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왜왕의 조상이 가야출신이라 이걸 감추기 위해 가야의 흔적을 자꾸 지우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이든, 가야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이재원  ( 2014-12-14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2
계속 발굴되고 연구되면 좋겠네요
강상용  ( 2014-12-14 )  답글보이기 찬성 : 15 반대 : 4
포상팔국을포함한 남부해안지역이 왜의모체가 된것갔읍니다
문성미  ( 2014-12-14 )  답글보이기 찬성 : 6 반대 : 6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진경  ( 2014-12-15 )  답글보이기 찬성 : 4 반대 : 8
조선이 만든 꾸며진 역사를 21세기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있군요. 명이 하북성, 산동성 등을 차지하게 되자 중국 23사에 고대 지명들을 동족과 북쪽으로 변이시키는 위사들을 삽입기켰습니다. 또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뜯어 고쳤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은 현 산동성 곡부시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곡부시를 공자묘가 있는 곳으로 둔갑시켜놨지만, 도대체 묘 앞에 성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조선의 꾸며진 역사를 달달 외어서 21세기에 후손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계속 주입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계속 하시렵니까? 근거: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이마무라호쿠토  ( 2014-12-15 )  답글보이기 찬성 : 2 반대 : 7
컴플렉스가 이러한 망상, 판타지를 쓰이는 것이지요.
이상목  ( 2014-12-16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8
제가 소화하기에는 좀 어려운 부분이 많긴 하지만,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글이네요. 계속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홍주  ( 2014-12-16 )  답글보이기 찬성 : 23 반대 : 4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유은숙  ( 2014-12-16 )  답글보이기 찬성 : 19 반대 : 14
중간중간에 아는 사람 내용이 나오는 듯 하네요.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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