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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고사기'에 기록된'근국'(根國)은 가야, 일본 천황가는 '가야金씨의 후예'

'철(鐵)의 나라' 금관가야(金海)(1)

금관가야(金官伽倻)는 농업국이 아니라 국제 허브항(港)을 보유한 해양국이었다. 가야의 철정(鐵鋌)은 「고대의 반도체」이자 東아시아 세계의 화폐로 통용되었다.

경주 외곽에서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 섬멸당한 왜병은 금관가야의 용병(傭兵)이었고, 용병 파견은 철정 공급에 대한 왜왕(倭王)의 대가였다. 신라와의 力관계가 역전되자 금관가야는 재기를 위해 여성전사까지 동원해 분전했다. '임나일본부설'은 김해 양동리·대성동 고분군 발굴로 역사적 허구임이 100% 판명되었다. 한국사의 삼국시대는 500년간 번영한 가야(加耶)를 포함한 '사국시대(四國時代'로 고쳐야 한다.

글 : 정순태 月刊朝鮮 편집위원
사진 : 이태훈 月刊朝鮮 기자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4-11-22 16:36

본문이미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목곽묘./대성동고분박물관

2000년 역사가 보이는 盆城山

金海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복원된 가야 鎧馬武士의 모습.
  金海市(김해시)의 중심지가 등지고 있는 높이 310m의 盆城山(분성산). 분성산에 오르기만 하면 古代 동아시아 세계의 最先進(최선진) 해양국이며 「鐵(철)의 나라」였던 金官伽倻(금관가야·駕洛國)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해의 新·舊 시가지 사이를 꿰뚫고 흘러내려 西낙동강에 합류되는 해반천. 아득한 옛날, 바로 이 해반천을 따라 東아시아 세계를 압도한 가야의 철기문화가 절정의 꽃을 피웠다.
 
  특히 4~5세기 가야무덤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철제 말 얼굴 가리개까지 발굴되었다. 이런 가야의 전쟁도구는 같은 시기의 신라나 백제의 것보다 선진적이었다.
 
  가야의 鎧馬武士(개마무사)는 무서운 戰士(전사)집단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개리 레저드 교수는 일찍이 『가야 무사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의 기간에 100년 이상 왜국의 왕위를 차지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분성산 烽燧臺(봉수대)에 올라 서쪽을 향해 보면 발 아래로 首露王(수로왕)의 天降(천강) 설화로 유명한 龜旨峯(구지봉), 伽倻(가야) 철기문화의 선진성을 입증한 大成洞 고분군, 금관가야 최대의 주거지 鳳凰洞(봉황동) 유적이 펼쳐 있다. 해반천 동쪽 유역을 따라 이어진 南北 2km의 벨트. 바로 이 벨트 안에서 전성기 가야인들이 태어나 살고 죽어서 묻혔다.
 
분성산은 분산성으로 요새화되었다. 분산성 봉수대에 올라 김해의 지형을 설명하는 宋源永 문화재연구원(오른쪽).
  필자의 답사에는 김해시청의 문화재연구원 宋源永(송원영)씨가 동행했다. 지난 1월25일 오전 9시30분, 김해시청 앞에서 만나자마자 宋연구원은 필자 일행을 盆山城(분산성: 사적 제66호·어방동 산 9번지)으로 끌고 갔다. 그는 釜山大 고고학과 출신으로 『가야의 위상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 우리 역사상의 「三國시대」를 「四國시대」로 바꾸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젊은 연구자이다.
 
  분성산은 분산성으로 요새화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1377) 김해부사 朴威(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 그러나 城의 기초 선정 방법이 우리 古代 山城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퇴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의 축성연대는 가락국 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은 성곽의 길이가 929m인 石城이다. 분산성 바로 아래엔 朴威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박위라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쓰시마 섬(對馬島·대마도)을 정벌한 장수이다. 우왕 14년(1388), 경상도 都巡問使(도순문사) 박위는 병사 1만 명과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對馬島에 원정해 왜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이는 쓰시마를 소굴로 삼았던 왜구에 대한 응징이었다. 우왕 在位 14년간 한반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 횟수는 무려 378회에 달했다.
 
  분산성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는데, 고종 8년(1871)에 개축되었다. 당시의 집권자는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이었다. 흥선대원군 기념비는 박위의 공적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분성산의 북쪽으로는 김해시를 껴안은 神魚山(신어산·630m), 동쪽으로는 이름처럼 뾰족하게 돌출한 「돗대산」이 보인다. 수년 전의 어느 날, 짙은 안개 때문에 착륙 포인트를 놓친 中國籍 여객기가 김해 상공을 선회하다가 바로 이 돗대산에 부딪혀 추락했다.
 
  분성산 동남쪽으로는 西낙동강, 그 너머로 김해국제공항과 낙동강 본류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해안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분성산에서 바라본 西낙동강과 김해평야. 김해의 新·舊 시가지 사이로 흐르는 해반천이 西낙동강과 합류하는데, 해반천 동쪽 연변을 따라 수로왕 誕降(탄강)신화의 현장 구지봉, 가락국 전성기 지배층의 떼무덤인 대성동 고분군과 수로왕릉, 가락인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펼쳐 있다.
 
 
 50년 前과 지금의 金海
 
수로왕의 탄강신화의 현장 구지봉 정상부에 놓인 南方式 고인돌. 고인돌의 윗면에「龜旨峯石」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필자는 김해와 경계를 맞댄 釜山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요즘 김해에 대한 지리 감각은 거의 백지에 가깝다. 그래도 필자에게 김해가 生面不知(생면부지)의 땅으로 느껴지지 않는 연유가 있다.
 
  50년 전,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추억이다. 부산의 「교통부 앞」(지금의 범내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馬山으로 가면서 중도의 김해 읍내 車阜(차부: 정류소)에 잠깐 정차했다. 그때 「아줌마들」이 버스의 전후좌우로 우르르 몰려와 이렇게 외쳤다.
 
  『내 딸 사이소(사세요)!』
 
  『내 딸 사이소 예!』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절은 무르녹은 봄날, 바로 딸기철이었다. 「과일행상 아줌마들」이 「딸기」란 낱말의 절반을 줄여 그냥 「딸」이라고 했다 .
 
  이런 물정은 애들도 대번에 눈치챌 만했다. 하지만 버스에 탄 몇몇 싱거운 청·장년들은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머니 「딸」 얼맹교(얼마요)?』
 
  『아주머니 얼굴 보니 「딸」도 이뿔꺼라(예쁠 것이라)…』
 
  『내 아즉(아직) 총각 아닌교. 마, 사우(사위) 삼으소!』
 
  그때만 해도 순박했던 시절인지라 아주머니들은 『문디 머슴아…』 따위의 질펀한 대거리는 하지 못했다.
 
  당시 김해평야는 영남에서 제일 넓은 곡창이었다. 토마토·오이·딸기 등 원예농업도 풍성했다. 하기야 지금도 김해시 進永邑(진영읍) 일대는 전국 제일의 단감 産地(산지)이다.
 
  舊김해군은 부산직할시의 팽창으로 1970~1980년대에 김해평야의 중심부인 1邑(대저읍) 3面(명지면·가락면·녹산면)을 부산에 넘겼다. 하지만 지금의 김해시는 그때 그 시절의 농촌이 아니라 首露王 이래 최대의 경기를 누리고 있다. 1973년 시가지 바로 남쪽으로 남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식품·섬유·타이어·전자업체 등이 부산으로부터 대거 이전해 들어와 인구 1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 후의 도시화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현재 인구는 무려 45만 명,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농사를 짓다가 토지보상금을 받아 하루 아침에 수십억원대 부자가 된 주민들도 적잖다.
 
  특히, 金大中 대통령-金鍾泌 국무총리-金爀圭 경남지사 재임 시절, 김해시가지와 가야 유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위 3人의 공통점은 首露王을 시조로 삼는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정치세력의 子宮일까. 현재의 盧武鉉 대통령도 김해 출신이다.
 
  분산성에서 내려와 가야문화의 출발점인 구지봉(구산동 산 81번지)에 올랐다. 구지봉은 정상부가 놀이마당처럼 편평한 구릉이다. 구지봉의 정상부 남동쪽 가장자리에는 「龜旨峯石」(구지봉석)이라 새겨진 南方式 고인돌(支石墓) 1基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김해 일대가 청동기시대에 이미 상당한 인력 동원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1860년대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김해. 신어산이 배후를 이루고, 낙동강이 두 갈래로 갈라져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과 달리 河中島 4개가 보이며 강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현재는 낙동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4개의 하중도가 하나의 삼각주로 변해 있다. 「해양왕국」 가야 시기에는 김해평야의 대부분이 바다였다.
 
 
 가야는 「太陽信仰族의 나라」
 
  「三國遺事(삼국유사)」의 駕洛國記(가락국기)는 신라 유리왕 19년(서기 42년) 3월 上巳日(상사일: 3일), 하늘로부터 이곳에 6개의 황금 알이 담긴 황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首露王을 비롯한 6가야의 始祖王(시조왕)들이 태어났다는 신화를 담고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아니 내놓으면 불에 구워 먹으리다』
 
  그날, 구지봉에 모인 김해 지역의 9干(간: 추장)을 비롯한 무리 약 300명은 하늘(天神)이 계시한 대로 그렇게 합창했다.
 
  이것이 우리 국문학상 중요한 詩歌(시가)의 하나로 손꼽히는 「龜旨歌(구지가)」이다. 이 구지가는 거북을 神(신)의 使者(사자), 즉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자로 하여 왕이 강림하도록 기원하는 대왕맞이 굿의 迎神歌(영신가)이다. 그러면 당시의 김해사회는 어떤 발전단계에 와 있었을까.
 
  김해 지역에선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벼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농경·어로생활이 펼쳐져 왔고, 기원후 1세기로 접어들면 9干을 우두머리로 한 조직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辰韓(진한)의 서라벌 지역에서는 혁거세가 斯盧國(사로국: 후일의 新羅), 馬韓의 서울 지역에서는 온조가 什齊(십제: 후일의 百濟)를 건국해 영토국가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물론, 弁韓(변한)의 중심인 김해 지역에서도 고대국가의 건설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가락국의 명칭은 史書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加羅(가라), 伽倻(가야=加耶·伽耶), 狗倻國(구야국), 南加羅(남가라), 金官國(금관국=金管伽倻) 駕洛國(가락국) 등이다. 금관국이란 국호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쓰인 것이고, 구야국은 「三國志(삼국지)」의 魏志 東夷傳(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국명이다.
 
  모든 이름이 그렇듯이 한 나라의 이름에는 그것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라」 또는 「가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은 이번 김해 답사여행 전에 만난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의 견해이다.
 
  1) 가라(加羅)의 본디 소리와 뜻은 「하·해=태양」+「라=사람」+「라=땅·나라」=「하라라: 해의 자손의 땅·태양족의 나라」였다. 여기서 「사람」 혹은 「땅」을 뜻하는 「라」가 중복되어 있는 탓으로 그 하나를 생략해 「하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이 「하라」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가라」라고 발음하게 된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간고쿠」라고 하는 것도 이런 소리바꿈 현상 때문이다.
 
  3)古代의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말의 1인칭은 「라·나=태양」이고, 妻(처)는 「안해=안에 있는 해」, 자식은 「아해=새로 태어난 해」라고 부른다. 요즘 철자법으로는 「아내」, 「아이」로 표기되지만, 그것은 원래의 뜻을 무시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안해」로 표기하고 있다.
 
한양大 金秉模 교수가 허황옥이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로도.
 
 
 韓民族 최초의 여성 파워 許黃玉
 
왕비릉 앞 분수대의 神魚像은 印度 아요디아 왕국과 가락국의 國章을 본떠 조형한 것이다.
  구지봉에서 내려와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구산동 120번지)으로 넘어갔다. 거북의 머리 형상인 구지봉과 거북의 몸통에 해당되는 수로왕비릉 사이의 구릉은 일제 때 김해-밀양 간 국도를 내면서 잘려 나가 평지화되었는데, 15년 전에 구릉을 복원하고, 그 밑으로는 구지터널을 뚫었다.
 
  무덤 앞에는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수로왕비를 왜 「보주태후」라 했는지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수로왕비는 印度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이름은 許黃玉(허황옥)이다. 아유타국은 인도 동북부를 흐르는 갠지스江 중류 유역에 실재했던 아요디아 왕국이다.
 
  허황옥은 수로왕 7년(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거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해 수로왕과 혼인했다. 人口大國(인구대국) 인도 출신의 여성답게 수로왕비는 多産(다산) 체질이었던 듯하다. 수로왕과의 사이에 10남2녀를 생산했다. 별세 직전에는 열 아들 중 두 아들을 자신의 姓(성)인 許씨를 따르게 했다.
 
  따지고 보면 許왕후는 韓民族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자손인 김해김씨와 김해허씨가 현재 한국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되는 600만 명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宋源永 연구원은 『許왕후는 한국 여성파워의 선구자』라고 치켜세웠다. 과연 그러하다. 許왕후는 年下의 남자(수로왕)와 센세이셔널한 국제결혼을 감행할 만큼 모험적이었고, 아들 둘을 許씨로 삼아 스스로 金海許氏의 시조가 되었던 만큼 우리 역사상 戶主制(호주제)를 파괴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뿐만 아니다. 허황옥은 시집올 때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습의 神魚像(신어상)을 가져와 이 땅에 퍼뜨렸다. 아유타국의 國章(국장)인 이 神魚像은 21세기 김해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수로왕비릉의 앞마당에는 神魚 두 마리가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의 분수대가 만들어져 있다.
 
  또한 그녀가 인도에서 시집올 때 역시 배로 실어 왔다고 전해지는 婆裟石塔(파사석탑)도 왕후릉 앞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다. 붉은 무늬가 은은한 石質(석질)로 보아 한국산이 아니며, 그 조각 방법도 이국적이다. 이 석탑은 荒天(황천) 항해 중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6개의 석재만 남아 있다. 바다사람들이 안전항해에 효험이 있다는 전설을 믿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석탑의 돌을 조금씩 떼어 가는 수난을 당해 오늘처럼 왜소해졌다고 한다.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許왕후가 시집올 때 그녀의 오빠 長遊和尙(장유화상)도 함께 와 김해에 상륙했다. 후세의 假託(가탁)인지는 모르나 장유화상은 김해의 신어산 銀河寺(은하사), 지리산 七佛庵(칠불암) 등의 창건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한반도 전래시기는 300여 년 앞당겨진다. 어떻든 파사석탑은 가야불교의 南來說(남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학계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풍요한 생활유적지 鳳凰臺와 회현리 패총
 
許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올 때 항해 중 선박의 균형 유지를 위해 싣고 왔다는 婆裟(파사)석탑.
  필자 일행은 이어 봉황동 유적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있는 회현리 貝塚(패총: 조개무덤)은 가야시대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골각기 등과 함께 王莽(왕망)시대의 중국 동전인 「貨泉(화천)」이 출토되었다.
 
  왕망이 前漢(전한)을 찬탈하고 세운 新(신)은 A.D. 9~22년 사이에 존속하다 後漢(후한)에 멸망당한 短命(단명)왕조이다. 이 화천의 발견을 놓고 가락국이 국제무역국이었음을 뜻하는 하나의 증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화천은 김해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산지港과 일본의 쓰시마, 규슈에서도 한두 점씩 발견되었다. 화천은 短命왕조 新의 멸망 후에는 국제교역에서 결제를 위한 화폐로 사용될 수 없었던 만큼 그 유민들이 고국을 떠나올 때 간직했던 기념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회현리 패총은 일제 때인 1914년에 1차 발굴되었고, 1999년 부산大 박물관팀에 의해 再발굴되었다. 패총이라면 先史(선사)시대와 고대의 쓰레기장이다.
 
  현재, 발굴현장 주위엔 패총에서 파낸 팔뚝만 한 굴 껍데기, 주먹 크기의 백합·소라 껍데기, 그리고 생선뼈와 토기· 철기의 파편 등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는 불에 탄 쌀도 출토되어 우리나라 쌀농사의 기원과 傳來루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발굴현장은 현재 가건물이 덧씌워진 채로 폐쇄되어 있다. 울타리 틈새로 그 속을 들여다보니 규모가 매우 크다. 宋源永 연구원은 『회현리 패총의 깊이는 8.5m로서 세계에서 제일 깊은 패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 패총 단면 노출 전시시설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회현리 패총과 인근의 가락국 최대의 생활유적인 봉황대는 함께 묶어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가락국의 왕궁터, 주거지, 高床(고상)가옥, 土城 등이 발굴되었다. 고상가옥은 습기와 쥐 피해의 방지를 위해 높은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은 창고이다.
 
  당시 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인류의 적이었다. 각종 질병을 옮길 뿐만 아니라 생산된 곡물의 30%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고상가옥에는 쥐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기둥 상단에 둥근 원판 모양의 防鼠板(방서판)이 설치돼 있다.
 
  고상가옥이나 주거지의 지붕은 낙동강 일대에서 무수하게 자생하는 갈대로 엮었다. 갈대 지붕은 15~20년을 견딘다. 고상가옥 앞에는 다소 엉성하지만 선착장도 복원되어 있다.
 
 
 
 가야인의 로맨티시즘
 
양동리 고분군(김해시 주촌면) 발굴 당시의 모습.
  生者必滅(생자필멸)은 인간세상의 법칙이다. 「봉황대」에서 살던 가야인들은 죽어서는 바로 북쪽에 大成洞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필자는 대성동 고분군보다 良洞里 고분군(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 3번지)을 먼저 답사했다. 양동리 고분군이 대성동 고분군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무덤이기 때문이다.
 
  김해의 중심가에서 馬山 가는 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10여 리 달리면 주촌면 歌谷(가곡)마을에 이른다. 「酒村」과 「歌谷」이 언제부터 그렇게 불려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술 빚는 마을(酒村)」, 「노래 부르는 골짜기(歌谷)」라는 이름에서 가야인의 로맨티시즘이 느껴진다. 韓民族은 중국의 史書에까지 「飮酒(음주)와 歌舞音曲(가무음곡)을 좋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歌谷마을 뒤 야산(해발 90m)에 3만평에 달하는 양동리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가야인들은 「酒村」에서 술 마시고 「歌谷」에서 노래 부르고 살다가 죽어서는 마을 뒷산에 묻힌 것이다. 발굴 후의 무덤들이 흙으로 덮여 있어 지금은 地下遺構(지하유구)를 살필 수 없다.
 
  발굴 당시에 이곳은 감나무 과수원 조성지 부분, 소나무와 잡목들로 이루어진 야산 그대로인 부분, 이미 훼손되어 집과 공장이 들어선 남쪽 끝자락 부분으로 나뉘어 어느 곳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유적에 대한 훼손이 진행된 상태였다. (계속)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4-11-22 16:36   |  수정일 : 2014-11-2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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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숙  ( 2014-11-24 )  답글보이기 찬성 : 29 반대 : 3
정순태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번 칼럼 내용에서 두 개의 질문이 있는데 혹시 답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첫째는 질문은 아니고 우려인데요 그 가야대에 있는 비문에 이곳이 임나가야의 옛 땅이다라고 써있는데 일본 우익들에게 오히려 이용당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게 아닌지요. 둘째는 박성흥옹이 천황계를 세운 사람이 한족 계통인 스진왕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야계가 되는지 하는 것입니다. 가야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조선의 후예인 부여계로 알고 있고 (스진왕도 부여계가 아닌지요?) 고구려에 의해 망한 낙랑은 실존했는지 논란이 되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과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낙랑의 멸망으로 한족계 왕이 위협을 느낀다는게 이해가 잘 안가기도 하구요. 민족 개념이 없던 당시가 아닙니까. 궁금합니다.
고세호  ( 2014-11-27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17
가라의 일본식 표기가 韓 입니다. 일본 큐우슈우 최고봉이 가라쿠니타케-韓國岳 입니다. 신라의 3국통일이 사실은 3韓1統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지요. 그리고 가야라는 단어자체가 국가라는 뜻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요. 고구려의 구려 역시 그러하고요... 그리고 쌍어문 명칭 자체가 가라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고대 페르샤의 문양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이병곤  ( 2014-12-20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10
가야의 설 중에서는 가장 그럴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이병곤  ( 2014-12-20 )  답글보이기 찬성 : 19 반대 : 20
하지만 고구려군에 섬멸당한 왜병은 금관가야의 용병(傭兵)이었고, 용병 파견은 철정 공급에 대한 왜왕(倭王)의 대가였다. 신라와의 力관계가 역전되자 금관가야는 재기를 위해 여성전사까지 동원해 분전했다. 라는 말은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ㅣ
      답글보이기  이병곤  ( 2014-12-20 )  찬성 : 5 반대 : 24
옛날 임라라고 불렀으면 임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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