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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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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1300년 전에 동아시아의 기본틀을 마련하다

백촌강 해전(3)- 日本과 군사동맹을 맺어 신라를 치려했던 唐

663년 백제부흥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도착한 400척 3만의 왜군은 나당(羅唐)연합군에 대패하고 한반도(韓半島)문제에서 손을 뗀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국 신라의 구상대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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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개! 미친 종놈!』
 
   부여풍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비록 복신(福信)과 왜국의 힘으로 백제왕으로 옹립되었다고 하지만, 자기는 王이라는 긍지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옛 백제 왕실에 있어서 부여풍의 지위, 즉 왕위계승 자격은 낮았던 만큼 원래라면 그는 왕위를 바라볼 수 없었을 터이다.
 
  그 때문에 부여풍은 북신의 대수롭지 않는 언동에도 『그늘에 있던 너를 백제왕으로 끌어올린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나』라고 하는 무언의 위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위압감은 부여풍으로선 왕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것 같다. 더구나 복신은 도침을 제멋대로 주살한 위험인물이었다.
 
  복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는 백제부흥운동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자부심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그로선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듯이 행세하는 부여풍을 대할 때마다 불쾌감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부흥운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두 사람 간의 적대의식은 표면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왜군 장군들의 맹반대를 누르고 근거지 이동을 감행했다가 되돌아온 사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빠르게 악화시켰다.
 
  피성으로의 본거지 이동은 부여풍의 발의와 복신이 동의 아래 왜장들의 반대를 억눌러 버리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참한 실패로 끝났던 만큼 전투지휘관으로서 강렬한 프라이드를 가졌던 복신으로서는 자신의 위신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복신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 과오와 책임을 부여풍에게 전가하고 싶은 심리상태가 되었는지 모른다. 한편 부여풍으로서도 복신의 언동에 내포된 자신에 대한 불신감·경멸감 등을 민감하게 느끼고 복신을 적대시했던 것 같다.
 
  부여풍의 복신에 대한 감정은 그가 석성(충남 부여군 석성면)에서 고구려에 사자(使者)로 다녀온 한 왜장을 만나, 그에게 「복신의 전횡」을 성토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드디어 복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복신도 부여풍을 주살하기로 결심했다.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지도부의 고질적 분열이 부흥군 내부에서도 재연된 것이다. 복신은 부여풍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병을 칭탁하여 굴실(窟室)에 누웠다. 부여풍이 문병 올 것을 미리 타산했던 것이었다.
 
  부여풍은 짐짓 복신의 음모를 모르는 체하고 문병을 갔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부여풍이었다. 부여풍의 심복들은 순식간에 복신을 덮쳐 복신의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복신은 대내외적으로 명망이 높은 장수였다. 부여풍으로서도 복신을 베려면 요식절차가 필요했다. 그는 신하를 모아놓고 말했다.
 
  『복신의 죄는 여러 신하들이 잘 아는 바이다. 더 이상 논할 것은 없다. 복신을 참할 것인가, 아닌가만 논의하라』
 
  달솔 덕득집(德執得)이 입을 열었다.
 
  『이 악한 역적을 방면할 수 없습니다』
 
  복신은 덕집득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매도했다.
 
  『썩은 개! 미친 종놈!』
 
  복신에 대한 부여풍의 증오심은 지독했다. 「일본서기」에는 『목을 베고,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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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회의 중인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 /민족기록화


  
 羅唐 7년전쟁의 승리
  
  백촌강 전투의 이듬해인 664년 2월. 당 고종의 명에 의해 신라 문무왕과 당에 의해 웅진도독으로 기용된 부여풍은 웅진의 취리산에서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바르며 회맹을 하고 양국의 평화를 맹세했다. 당장 유인원(劉仁願)이 여기에 입회했다. 신라로선 불만스럽고 억울했지만 對고구려戰을 위한 전열의 정비라는 차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665년 10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 연개소문이 병사했다. 그에게 집중되어 있던 절대권력의 계승을 둘러싸고 그의 세 아들, 남생·남건·남산이 다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나당 연합군은 침공을 개시, 드디어 고구려가 멸망했다. 668년 9월의 일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번에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이 충돌했다. 670년 4월에는 고구려의 유신들이 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8월, 신라는 이들을 지원하면서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보덕국(報德國: 小고구려국)의 왕으로 冊封(책봉)했다.
 
  671년 신라와 당은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신라는 매소성(買肖城) 전투와 해전 기벌포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특히 기벌포 전투는 7년전쟁 최후의 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제해권(制海權)의 향방(向方)을 결정지었다. 이 해전에서 신라의 수군은 22전 22승을 거두었다. 그 직후 당은 평양에 설치했던 식민통치기관인 안동도호부를 요동(遼東)으로 후퇴시켰다. 이로써 신라의 한반도 통일이 실현되었다. 
  
   日本과 군사동맹을 맺어 신라를 치려했던 唐
 
  백촌강 전투 이듬해인 664년 5월, 唐의 백제 진장(鎭將) 유인원(劉仁願)은 조산대부(朝散大夫) 곽무종(郭務悰)을 쓰쿠시(筑紫)로 파견했다. 이어 665년 9월에는 기주마사(沂州司馬) 유덕고(劉德高)와 곽무종이 다시 쓰쿠시로 갔다. 이들은 다음달인 10월 경도(京都)로 올라갔다. 667년 11월에는 유인원(劉仁願)의 사자(使者) 사마법총(司馬法聰)이 쓰쿠시를 또다시 방문했다. 이때까지 唐의 對왜국 외교는 고구려 공격을 위한 국제적 포위망 형성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唐의 對왜국 외교는 고구려(668년) 멸망 이후에도 계속된다. 671년 1월, 유인원(劉仁願)의 사자(使者) 이수진(李守鎭)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6월, 일본국은 이수진에게 「요청한 바의 군사(軍事)」에 대해서 모종의 선언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청한 바의 군사」라는 것은 당사(唐使)부터 日本에 대해서 무엇인가의 군사적 요청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수진은 7월에 귀국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어떠했는가. 670년 신라는 말갈과 연합한 당군을 격파한 데 이어 백제의 옛땅 80여 성을 장악했다. 나당(羅唐) 7년전쟁의 개전이었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反唐) 군사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에 발끈한 唐은 장안(長安)을 방문한 신라의 사신을 감금했는데, 양도(良圖)는 옥사하고 김유신(金庾信)의 동생 흠순(欽純)만 석방되었다. 왜국이 국호를 바꾼 것도 670년이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년호(年號)와 「천황(天皇)」의 號를 채택했다. 일본史에 있어서 천지천황(天智天皇) 9년이었다.
 
  이어 671년, 신라군은 부여 석성(石城)에서 단군을 대파했다. 이 시기에 당사(唐使)의 日本에 대한 「요청한 바의 군사」라면 신라를 적국으로 삼는 唐과 일본의 군사동맹일 수밖에 없다. 唐은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와 고구려를 차례로 먹고 이제는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먹으려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드디어 671년 11월, 곽무종이 대선단을 이끌고 일본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대마도(對馬島)에서 일본조정으로 올라 왔다. 이것은 2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이 唐使는 白村江 등에서 포로가 된 왜국병 1400명을 인솔했다. 이들을 송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왜국에 뭔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동맹이었을터이다.
 
  그러나 唐-日 군사동맹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해 12월3일, 천지천황이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新羅의 외교적 이니셔티브
 
   신라의 어깨 너머로 전개되는 唐-일본(왜국) 간의 교류에 대해 신라는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일본서기」 천지(天智) 7년(668)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김유신(金庾信)의 對왜국 외교를 기록하고 있다.
 
  이 해 9월12일, 신라는 급찬 김동엄(金東嚴)을 파견하여 일본에 조물(調物)을 보냈다. 9월12일이라면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던 만큼 문무왕은 친정 중이었다. 국왕 친정 중 王京을 지키며 김동엄의 왜국 파견을 주도한 인물은 김유신이었을 것이다. 9월26일, 왜국의 내대신(內大臣) 나카도미노 가마다리(中臣鎌足)는 表敬(표경) 사절로 승려 호오벤(法弁)과 신히쓰(秦筆)를 파견하여 김유신에게 배 한 척 분의 회사품(回謝品)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마다리가 누구인가. 나카노오에-가마다리의 관계는 일본판 김춘추-김유신 동맹이었다. 645년에 황극(皇極)천황의 왕자 나카노오에(中大兄)가 집권자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태극전의 정변) 가마다리는 나카노오에의 「오른팔」이었다. 나카노오에가 661년 제명(齊明)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천지(天智)천황이다.
 
  김유신(金庾信)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와 왜국은 해묵은 원수관계였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병력을 대거 북상시키면서 왜국의 동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국은 663년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나당(羅唐) 양군의 보복전을 겁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메시지는 그런 왜국의 위기의식을 해소시키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라가 왜국과 국교를 튼 것은 對고구려 전쟁 기간 중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신라 수뇌부는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 7월에 이미 대당(對唐)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문무왕은 663년 백촌강 전투 직전,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던 왜군 포로를 「인도주의적 명분」을 표방하면서 대거 석방시켜 준 일도 있다. 따라서 신라의 對왜국 외교는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외교였다.
 
  천지천황은 이 해 11월 초순, 문무왕에게 비단 50필, 풀솜(綿) 500근, 가죽 100장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신라-왜국 양국이 임금은 임금끼리, 중신(重臣)은 중신끼리 격에 어울리는 인사를 차렸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唐의 팽창정책을 견제하는 신라-왜국 간의 관계개선이었다.
 
  참으로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명언을 실감케 하는 신라의 현란한 이니셔티브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라는 東아시아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적 존재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신라가 구상한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가 120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거의 그대로 관류하고 있는 것이다. 
  
   新羅로부터 배워 日本 국가 완성
 
  백촌강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왜국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 무렵 왜국은 대화개신(645) 이후에 발생한 갖가지 모순에다 패전까지 겹쳐 사회적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명천황의 뒤를 이어 칭제(稱制: 즉위하지 않고 소복으로 통치)하던 나카노오에(中大兄)로서는 국내문제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신라와 당의 정벌에 대비하여 해안의 방위에 주력했다. 664년 대마도·일기도(壹岐島) 축자(筑紫: 쓰쿠시)에 방인(防人: 수비병)·봉화(烽火)를 배치하고 대재부(大宰府)를 방어하기 위해 수성(水城: 미즈키)·大野城·키이城을 쌓았다. 또 667년에는 讚岐(사누키: 四國의 세토 內海 쪽)에 야시마城, 대마도에 金田城, 오사카에 高安城 등 백제식 산성을 축조했다. 667년에는 수도를 아스카(飛鳥)에서 琵琶湖(비파호) 부근의 내륙 오쓰(大津)로 옮겼다. 이같은 천도는 아스카에 뿌리를 내린 구세력과의 연결을 끊고, 개신정치를 추진함과 아울러 신라와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670년 국호를 일본, 종래의 왕호를 천황(天皇)으로 높였다. 天智천황은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행정·기술 등을 배워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671년, 天智천황이 죽고 그의 아들 오토모(大友: 明治維新 후 弘文천황으로 추존) 황자가 즉위했다. 그러나 이런 천황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삼촌 오아마(大海人) 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아마 쪽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붙었고, 오토모 쪽에는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담했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2개월 동안 전개된 싸움에서 신라계 도래인들이 밀었던 오아마가 이겨 오토모를 자살로 몰아넣은 다음에 즉위하니 그가 天武천황이다. 이것이 일본사에서 말하는 「壬申의 亂」이다. 이런 정세의 일본으로서는 신라와 당 사이에 전개된 7년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을 터이다.
 
  天武천황은 재위 14년간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 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선진 제도와 문화를 배우게 했다.
 
  일본 역사학계의 거두인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律令)을 정비하고 고대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天武천황의 재위 시기에 신라는 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670∼676년 사이에 벌어진 나당전쟁 때 일본은 오히려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신라가 잘 버텨 주어야 일본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天武 정권은 신라의 눈치를 보면서 당과 통교를 중단했다가 신라-당의 국교가 회복된 27년 후에야 遣唐使(견당사)를 파견했다.
 
  701년 天武천황을 이은 文武천황은 신라를 모델로 삼은 大寶律令(대보율령)을 완성했다. 律은 형법이며, 令은 행정법이다. 大寶律令의 제정에 의해 일본은 율령에 기초한 국가적 통일 지배체제를 완성했던 것이다.
 
  신라의 文武王은 나당전쟁이 끝난 지 5년 후인 681년에 죽었는데,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다. 일본의 文武천황도 죽은 후 화장되었는데, 이것도 신라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불화가 시작된 聖武朝 이후 일본 황실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게 된다.
 
  한반도가 신라에 의해 통일됨으로써 당도 숙적 고구려의 위협을 제거하여 세계사에 있어서의 팍스-시니카를 이룩했다.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평화 정착과 번영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동국대 李基東 교수는 지난 3월12일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을 주제로 한 세미나의 주제강연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춘추와 文武王 부자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힘은 없었지만, 시대의 조류를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해 분열된 민족의 힘을 신라의 깃발 아래 결속시키고 장기간 평화를 누리게 한 공업은 찬양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인 한반도가 분열되어 있거나 약화되어 있을 때는 주변 강대국의 개입을 자초하여 국제전장이 된다. 신라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다. 백촌강전투와 그에 이은 신라의 삼국통일은 1300년 전에 이미 동아시아 세계의 기본틀을 마련,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등록일 : 2014-10-19 10:17   |  수정일 : 2014-10-1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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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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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 2014-12-09 )  답글보이기 찬성 : 26 반대 : 6
1512년에 삼국사기(본래 삼국사임)가 뜯어 고쳐져서 교과서에서 꾸며진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엉터리 논의만 분분하고 있는 실정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는 현재의 산서성 곡부시로 추정할 수 있다. 곡부는 공자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 공자묘가 조성되어 있지만, 곡부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변이되어 온 것이다. 도 고구려 마지막 수도 장안성은 현 하북성 탁주시에 있었다.백제 남족에 일본이 있었으니, 양자강 입구에 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근거;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이영진  ( 2014-10-25 )  답글보이기 찬성 : 17 반대 : 6
신라의 통일은 북쪽에 대한 우리의 사고의 틀을 없애버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주를 잃고 다시는 그곳을 쳐다보기도 싫었던 것일까요? 우리민족의 통합을 말하기 전에 만주를 상실함으로 인해 그곳에서 흥기한 민족들이 대륙을 지배할 때마다 우리가 겪은 1,000회에 가까운 고난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고구려질서상에서 차라리 통일을 안한만 못한꼴이 아닌가 합니다. 통일이라는 말을 쓰면 안됩니다.
이마무라호쿠토  ( 2014-10-22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3
당시의 일본을 소국이었다라고 한국인은 오해하고 있지만, 백제의 국토와 왜국의 면적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한국과 일본의 크기 차이보다 크다. 남국인 일본은 농업생산도 많아, 인구도 국토도 항상 한 반도국가가를 압도하고 있었다. 확실히 불교문화나 철기생산에서는 한 반도국가가가 선진이었지만, 국력은 문화력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문화에서는 위이었던 고려가 몽골에 통치된 역사를 살펴보면 좋다. 야만인 만주인이 고도인 문명을 가지는 중국을 정복한 역사를 보면 좋다.
토마스정  ( 2014-10-19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18
수정 합니다----짧은 지식으로 한번 의견을 올려 보았읍니다.
토마스정  ( 2014-10-19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5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인 한반도가 분열되어 있거나 약화되어 있을 때는 주변 강대국의 개입을 자초하여 국제전장이 된다. 신라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다 이 구절은 마치 일본이 그당시에 강대국이였다는 느낌이 오네요.
제 가 아는 지식으로는 일본은 백제의 지방 정권정도 였는데 말이죠.
특히 백제 구원병을 보낸것은 그만큼 백제 의 힘과 영향력이 일본에 크다는거지요. 일본 만엽집에 나오는 대목하나에 누가다 라는 신비의 여인이 사이메이 여왕에게 시를 하나 읊는데 내용은 한뿌리에서 가지가 나와 라는 부분이 있읍니다. 즉 일본은 백제의 가지라는 것이고 그래서 구원병을 보내야 된다고 말 하는것 입니다.
오죽하면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니 일본 조정은 이제 제사는 어떻게 지내야 하나라고 한탄을 하였답니다. 51691;은 지식으로 한번 의견을 올려 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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