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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백촌강 해전(2) -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복신, 왜에 구원군을 간청하다

663년 백제부흥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도착한 400척 3만의 왜군은 나당(羅唐)연합군에 대패하고 한반도(韓半島)문제에서 손을 뗀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국 신라의 구상대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4-10-03 오후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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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이 봉기할 수 있었던 배경
 
  이제는 백제 패망 이후 백촌강 패전 직전까지의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백제부흥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660년 7월,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군(唐軍) 13만 명이 백제의 왕도(사비성)를 일거에 공략하여 의자왕(義慈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의자왕의 항복 후 당은 백제의 고토(故土)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했다. 648년 김춘추(金春秋: 후일의 태종무열왕)-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비밀협약」을 어기고 백제를 당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다. 전후 백제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신라에겐 통한의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백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나당 연합군의 기습적이며 압도적인 병력집중으로 왕도(王都)는 함락당하고 말았지만, 백제의 지방군은 건재했다. 이것은 나당연합군이 백제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기보다는 도성 함락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승전군의 행포에 분노한 백제 왕가 출신의 복신(福信), 서부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임존성(任存城)에서 깃발을 들자 10여 일 사이에 3만여 명의 군세가 이루어졌다. 임존성과 인접한 고마노리성(홍성군 홍성읍 고모리)에서는 달솔 여자진(餘自進)이 궐기했다. 
  
  백제부흥군의 응집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소정방의 당군은 본국으로 개선했다. 이때 의자왕 비롯하여 태자 부여효(扶餘孝)·왕자 부여융(扶餘隆)과 관료 등 1만2000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다면 백제의 전영토가 평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정방이 그렇게 철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 공략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도 풍긴다.
 
  소정방은 조국을 되찾겠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백제부흥군과 싸워 보았자 주산(珠算)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병력의 손실만 초래할 뿐이지 그 자신의 전공이 드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소모전이 불가피한 전투는 신라 쪽에 떠넘긴 셈이다.
 
  사비성-웅진성 지구에는 유인원(劉仁願)의 당병 1만 명과 태종무열왕의 왕자 김인태(金仁泰)의 7000 병력이 주둔했다.
 
  10월9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흥군의 거점 중 하나인 이례성(爾禮城: 이례성: 충남 논산시 연산면)을 공략했다. 이례성은 아흐레만에 떨어졌다. 이례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부흥군의 성 20여 개가 대거 항복해 전세는 다시 신라군의 우세로 돌아섰다.
 
  10월30일, 무열왕은 사비성 남쪽에 목책을 친 백제부흥군을 공격했다. 사비성의 진장(鎭將) 유인원(劉仁願)도 부흥군을 협공했다. 1주일 만에 백제부흥군은 22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했다.
 
  사비성 공략에 실패한 복신은 흑치상지가 지키던 임존성으로 들어갔다. 부흥군의 여러 장수들은 낙담하지는 않았다. 왜국의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제명(濟明) 6년(660)의 기록이다.
 
 < 동(冬)10월,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좌평 귀지(貴智)를 보내 당병(唐兵) 포로 100여 명을 바쳤다. …또 군사를 빌고 구원을 청하였다>   
  
  
 제명천황의 백제 구원 결의
  
  복신은 한 달 전인 9월에도 사미각종(沙彌覺宗) 등을 왜국에 급파하여 구원군을 요청한 바 있다. 아스카(飛鳥)의 이타부키(板蓋) 궁에서 귀지(貴智)를 접견한 제명(齊明: 사이메이)천황은 구원군 파병의 뜻을 명확하게 표명했다.
 
 < 병(兵)을 빌고 구원을 청하는 것은 예전에 들었다.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국이 궁하여 나에게 온 것은, 본방(本邦)이 망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호소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창을 베개로 하고 쓸개를 맛보고 있다. 꼭 구원해 줄 것을 멀리 와서 말하였다. 뜻을 빼앗기 어렵다. 장군에 명하여 여러 길로 나아갈 것이다.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 같이 백제 땅에 모여 그 원수를 참하고, 긴박한 고통을 덜어 주어라. 유사(有司)는 (사신에게) 넉넉히 주어서 례(禮)로써 보내어라>
 
  우선, 제명천황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여성이며 각종 역사적 기록의 보유자이다.
 
  그녀는 두 번 결혼을 하고, 두 번 천황에 오르고, 그녀의 아들 둘이 천황이 된 매우 특이한 여성이다. 그녀는 원래 용명(用命)천황의 손자 고향왕(高向王)에게 출가해 한(漢)왕자를 낳았지만, 그녀를 연모한 서명(舒明: 죠메이)천황과 재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상당한 미모였던 것 같다.
 
  서명천황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후일의 천지천황)이고 차남이 오아마(大海人: 후일의 천무천황), 딸은 후일의 효덕(孝德)천황과 결혼하여 간인(間人)황후가 되었다. 642년 서명천황이 재위 13년에 죽자 그녀는 황극(皇極: 고교쿠)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왜국의 최고 실력자는 백제계 도래인 가문 출신인 소아하이(蘇我蝦夷:소가 에미시)-입록(入鹿: 이루카) 부자(父子)였다. 특히 에미시는 643년 자신의 사촌인 고인대형(古人大兄) 왕자를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성덕(聖德)태자의 아들로서 유력한 황위계승자였던 산배대형(山背大兄)을 습격, 족멸(族滅)시켰다. 조정 내부에 소아(蘇我)씨에 대한 반감이 점증했다.
 
  서명천황과 제명 사이의 장남인 중대형과 그의 동지 중신겸족(中臣鎌足: 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은 발호하는 소아(蘇我)씨를 타도하기로 모의했다.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던 645년 6월12일, 태극전(太極殿)에서 중대형 황자 등은 이루카를 기습·암살했다. 중대형은 그가 동원했던 무사가 결행을 머뭇거리자 스스로 창을 들고 달려들어 맨 먼저 이루카를 찌를 만큼 과감한 인물이었다.     
  
 대화개혁(大化改新)으로 중앙집권체제 추진
 
  대세가 기울자 이루카의 아비 에미시도 자기 집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로써 소아(蘇我)씨의 종가(宗家)는 멸망했다. 이것을 일본史에서 「을사(乙巳)의 변(變)」 또는 「태극전(太極殿)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직후 황극천황은 물러났다. 퇴위의 이유는 소아가(蘇我家)가 그녀의 친정 쪽이고, 그런 친정가를 그의 아들 중대형이 족멸(族滅)해 버린 데 대한 회한 때문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만약 물러나지 않았다면 아들과 짜고 大臣을 살해했다는 세상의 의심을 받는 것을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황극에 이어 그녀의 시동생 경(輕: 가루)황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곧 효덕(孝德: 고토쿠)천황이다. 중대형은 황태자가 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이후 왜국의 체제 변화는 663년 백촌강 전투 때 병력 및 함대의 동원과 관련되는 것인 만큼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위 직후, 효덕(孝德)은 중국의 본을 받아 처음으로 「대화(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대화 2년(646) 정월 초하루 효덕(孝德)천황은 새로 천도한 난파(難波: 나니와)궁에서 4개조로 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내렸다.
 
  이것은 귀족·호족의 세력을 삭감하고 국왕의 권한을 확대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조치였다. 이는 중대형과 중신겸족이 주도한 것으로, 일본史에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고 한다. 그 핵심사항은 『지금으로부터 모든 토지와 인민은 국가 소유로서 천황이 지배한다』는 공지(公地)·공민(公民)의 원칙이었다.
 
  물론 이로써 왜국의 중앙집권화가 단번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각 지역 호족들이 자의로 다스리던 단계를 지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정치체제가 다스리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개신(改新)정치의 추진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강화로 훗날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해외파병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개신정치의 모순도 잇달아 빚어졌다.
 
  무엇보다 천황과 황태자가 대립했다. 실권을 장악한 중대형은 653년 효덕(孝德)천황의 반대를 무시, 백관을 이끌고 구도(舊都) 아스카로 돌아와버렸다. 효덕천황은 외톨이로 난파(難波: 지금의 오사카)에 남아 거기서 병사했다.
 
  655년 1월, 효덕천황에 이어 즉위한 인물은 뜻밖에도 제명천황이었다. 그녀는 645년 「태극전의 변」 직후에 퇴위했던 황극천황이었다. 이같은 중조(重祚: 한 사람의 두 차례 등극)는 일본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례이다. 그녀가 다시 즉위하자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15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을 보내 이를 축하했다.
 
  어떻든 백제 구원에 대한 제명천황의 열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12월에 직접 나니와(難波)궁으로 행차했다. 이어 여제(女帝)는 세토 내해(內海)를 통해 남하(南下)하면서 여러 연안지역에 들러 원정에 참가할 병력을 모았고, 규슈의 쓰쿠시(筑紫)에 도착한 이후에는 병사·무기 등을 직접 점검했다. 또 준하국(駿河國: 자금의 시즈오카 지방)에 대해선 군선 건조를 명했다.
 
  군선(軍船) 건조가 거의 마무리된 661년 5월, 제명은 규슈의 조창(朝倉: 아사쿠라)궁으로 행차했다. 백제구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달 후인 661년 7월, 백제 원정군의 출발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661년 정초가 되면서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불어나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공주와 옛 왕도 부여를 계속 압박했다. 당장(唐將) 유인원이 서라벌에 급사(急使)를 날리자 신라는 구원군을 급파했다. 3월5일 이찬 품일의 부대가 두릉산성(豆陵山城)의 남쪽 기슭에 진을 치려 하다가 백제부흥군의 급습을 받고 참패했다. 두릉산성은 지금의 충남 정산면 백곡리 계봉산이다.
 
  3월12일, 무열왕의 제3왕자 문왕(文旺), 대아찬 양도(良圖)의 후속부대가 달려가 두릉산성을 36일 동안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 신라의 병참부대가 백제부흥군의 습격을 받아 막대한 군수품을 탈취당했다. 
  
 「신무(神武)」로 찬양받은 복신(福信)
 
  두릉산성의 승리 후 복신의 부흥군은 지금의 대전 부근까지 진출하여 서라벌-웅진 간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무열왕은 몸소 백제부흥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의 포위를 풀어야 했다. 이때의 무리한 친정(親征)이 무열왕의 건강을 해친 것 같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59세의 나이로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전북 익산)에서 병사하고 태자 김법민(金法敏: 文武王)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신라로선 위기였다.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속셈은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 그리고 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백제부흥전쟁을 지도한 중심인물은 복신이었다. 그의 권모(權謀)는 「무신(神武)」으로 찬양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무왕(武王)의 종자(從子)이다. 종자란 어머니 자매(姉妹)의 아들 혹은 형제의 아들, 즉 생질과 조카를 의미한다.
 
  「일본서기」에는 복신을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뜰안에 서 있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기공비(紀功碑)에도 「귀실복신」이라고 새겨져 있다. 복신의 성씨가 귀실인 만큼 부여(扶餘)씨인 백제 왕가의 친족은 아니다. 따라서 무왕(武王)의 맏아들인 의자왕과 이종사촌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복신은 왜국에 대해 구원군의 급파와 아울러 왜국에 체류 중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조속한 귀국을 요청했다. 제명천황이 세상을 뜨자 황태자 중대형이 소복 차림으로 칭제(稱制)를 했다. 칭제란 즉위하지 않고 정무를 보는 방식을 말한다.
 
  중대형은 제명천황의 시신을 규슈의 행궁(行宮)에서 수도 아스카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다음 백제 구원문제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다급한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중대형은 그 해(661) 8월, 대화하(大花下) 아담(阿曇)과 소화하(小花下) 하변(河邊) 등에게 일부 병력을 붙여 백제로 급파했다.
 
  이어 이듬해(662) 5월 왜국에 체류 중이던 부여풍이 백제로 귀국했다. 황태자 중대형은 대금중(大錦中) 아담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 등이 병사 5000명과 막대한 군수품을 실은 병선 170척을 지휘, 귀국하는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부여풍이 귀국하자 복신은 절하며 그를 맞았다. 그 모습을 본 『(백제)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부여풍과 일본귀족 여성의 정략결혼
 
  「일본서기」에 보이는 풍장(豊璋: 扶餘豊)에 관한 기사는 약간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즉, 천지천황 즉위 전기(前紀) 9월 조(條)에 따르면 풍장은 661년 9월에 중대형(천지천황) 황태자에 의해 백제왕으로 「책봉」되고 협정빈랑과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이 이끄는 병사 5000명에 호위되어 본국의 땅을 밟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만으로는 부여풍이 직관(織冠: 19단계의 관위 중 제1위)을 받고 백제왕으로 책봉된 날과 병사 5000명을 이끌고 백제로 건너간 것이 같은 날의 일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일본서기」 천지 원년 5월 조에 의하면 부여풍이 아담비라부련)등에 호위되어 고국에 돌아간 것은 662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를 「일본서기」의 편찬 착오로 돌릴 수는 없다. 이것은 부여풍이 661년 9월에 쓰쿠시까지 내려가 중대형 황태자를 만나고 바다를 건너 귀국하려 했지만, 왜국의 국내 사정으로 대기하다가 662년 5월에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부여풍의 귀국에 앞서 왜국은 그에게 왜인(倭人) 출신의 여자를 처로 맞게 했다. 신부는 신관(神官)인 다장부(多蔣敷)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는 백제왕이 된 부여풍과 왜국을 좀더 강하게 맺어 두려는 정략결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多씨의 여성이 부여풍의 처로 뽑혔던 것일까? 물론 그녀는 당시 소문난 미인이었겠지만, 미모의 여성이라면 그밖에도 많았을 터이다. 또한 부여풍을 왜국과 엮어 놓으려면 왕족 출신 신부가 더 적합했을 터인데, 당시 대왕가(천황가)에는 부여풍과 짝을 지을 만한 적령의 여성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시 백제·왜국 왕실 간의 혼인 사례를 좀 짚어보기로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직지왕(直支王)이 여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을 응신(應神)천황에게 시집보낸 바 있다. 개로왕도 왕녀 지진원(池津媛)을 웅략(雄略)천황에게 시집 보냈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몰래 정분을 트는 바람에 웅략(雄略)이 대로하여 두 남녀를 불에 태워 죽이는 사건까지 빚어졌다.
 
  이 사건 이후 왜국 대왕가(大王家)의 혼인은 왕가 내부의 근친혼(近親婚)을 중심으로 하는, 극히 폐쇄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대왕(大王:천황)을 재생산하는 폐쇄적 혈연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多씨 가문의 여성이 부여풍의 처로 선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多씨라고 하면 「고사기」 편찬을 주도한 백제계 도래인 안마려(安萬侶)가 유명한데, 대화(大和: 야마토)를 본거로 하는 재지(在地)호족 중 명가이다. 또한 多씨는 왕가의 제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왕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씨족이다.
 
  왜국의 대왕가는 그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왕가와의 혼인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多씨처럼 제사(祭祀)라고 하는 특수부문을 관장하여 대왕가와 지근(至近)거리에 있는 명족(名族) 중에서 대역(代役)을 고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多씨 출신의 그녀는 대왕가의 왕녀에 준(準)하는 존재로서 부여풍에게 시집을 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국땅에서 외국인 남편과 어떤 결혼생활을 했던 것일까, 또한 백촌강의 전투 후에 어떤 운명에 처해졌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운 백제부흥군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부흥군은 선제공격을 감행, 유인원이 지키고 있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공주)을 포위했다. 유인원은 본국에 급보를 날려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병력을 붙여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복신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웅진성을 포위하는 한편 웅진 어귀에 큰 목책을 세워 유인궤의 증원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웅진성 안팎의 당병에게 협공을 받은 부흥군은 1만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런 패전에도 불구하고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증강되고 있었다. 승려 출신으로 백제 유민들에게 영향력이 강했던 도침(道琛)이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662년 7월, 백제부흥군은 금강 동쪽으로 진출했다. 웅진도독부와 사비성의 통로를 차단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나당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당 고종은 백제부흥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대규모의 원정군을 보내기로 결단했다. 「삼국사기」는 이때 당 고종이 손인사에게 준 병력이 40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0」 하나가 더 붙은 오기이거나 군세의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한 이른바 「호왈(號曰)」인지도 모른다. 그야 아무튼 당의 증원군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도 종군했다. 이제 부여융·부여풍 형제는 서로를 적으로 삼아 맞겨룰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부여풍과 복신의 암투
 
  신라의 문무왕(文武王)도 휘하의 김유신 등 28장(將)을 거느리고 백제부흥군 정벌에 올랐다. 이것은 신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투입했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백제부흥군의 지도부에서 고질적인 적전분열이 발생했다. 내분은 결국 상잠장군 복신이 영군장군 도침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어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여풍은 왜국이 파견한 협정빈랑과 박시전래진에게 주유성 버리고 남쪽 피성(避城: 전북 김제)으로 옮기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왜장은 왜국의 집권자 중대형의 의사를 부여풍에게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면서 호위역·감시역·자문역도 담당했던 것 같다. 두 왜장(倭將), 특히 박시전래진은 강력하게 본거지 이동을 만류했다.
 
  부흥군의 본거지를 피성(避城)으로 옮기려 했던 것은 「식량의 확보」라는 점 때문이었다. 주유상은 방어에는 적합했지만, 농성이 장기간 계속될 경우 많은 병사 및 非전투원에게 배급할 식량의 확보가 곤란했다. 그러나 나당군의 공세가 가중되던 시점이었던 만큼 본거지 이동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피성(避城)으로의 이동은 부여풍과 복신의 공동제안이었다. 적어도 이 단계까지 부여풍과 복신의 견해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후의 전개상황을 살펴보면 근거지 이동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부여풍인 것으로 판단된다.
 
  20여 년의 왜국 체류 중 천황에게 불려가 자문역도 하는 등 상당한 우대를 받으면서 궁정생활에 익숙했던 부여풍으로서는 주유성이란 험한 산성에서의 진중생활이 체질상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주유성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았을 그는 산성생활이 6개월간 지속되자 넌더리가 났을 터였다.
 
  부여풍은 박시전래진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성(避城)으로의 이동을 강행했다. 그러나 겨우 2개월 만에 주유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663년 2월.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장군 흠순(欽純: 김유신의 동생)과 천존(天存)이 옛 백제 땅에 진군하여 거열성(居列城: 경남 거창)을 공격하여 참수 700여 급의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거물(居勿: 전북 장수)·사평(沙平: 충남 당진)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덕안성(德安城: 충남 논산 은진면)을 공격하여 참수 1700급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도 이때 신라가 백제 구령(舊領)의 남부에 대해 대규모의 공세를 벌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덕안성(德安城)이 있었던 충남 논산은 백제의 구도(舊都) 사비성 동방에 위치, 이곳을 신라군에게 제압당하면 부흥군이 구도 사비성을 탈환하기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라군에 의해 방어진지가 허약한 피성(避城)까지 습격을 받아 점령될 위험도 있었다. 
  
  부여풍 등이 주유성으로 되돌아온 것은 「일본서기」가 기록한 대로 신라군이 피성(避城)에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부여풍 등의 결단은 군사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부여풍과 복신의 협조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 (계속)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4-10-03 오후 12:30:00   |  수정일 : 2014-10-0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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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 2014-10-03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7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김길호  ( 2014-10-04 )  답글보이기 찬성 : 6 반대 : 3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입니다.
윤현식  ( 2014-10-04 )  답글보이기 찬성 : 16 반대 : 21
선생도 어쩔 수 없이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사람이군요. 금강 혹은 백마강이 백강 혹은 백촌강으로 불린 적이 한번도 없었고, 금강같이 작은 강의 하구에서 어디 수백척의 전선이 모여 전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국 고대 왕국들의 수도가 서안 혹은 낙양, 장안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었을 의미합니까? 그 동쪽으로는 고조선,부여, 고구려, 백제 및 신라와 같은 동이족의 나라가 있어서 때문입니다. 당나라 소정방이 어릴적에 백(촌)강에서 낚시질을 하며 놀았다고 하는데 중국 서안에서 낙시질하러 한반도 금강까지 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은 중국 때문에 역사 고증이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중국 내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복원해야 할 것입니다.
서상욱  ( 2014-10-04 )  답글보이기 찬성 : 9 반대 : 14
윤현식과 같은 사람들을 또 다른 모화주의자라 칭한다.
우리역사가 반드시 중국 땅에 있어야 한다는 발상에 탐닉한
국수주의자들. 우리는 한반도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김인선  ( 2014-10-05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11
의자왕은 오늘의 수도방위사령관의 배반으로 패전하고,사비성이 아니고 공주의 공산성 아닙니까
김진경  ( 2014-12-10 )  답글보이기 찬성 : 9 반대 : 16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은 현 산서성 곡부시로 추정합니다.그 남쪽에 백강이 있었지요(근거: 대청광여도) 그러니 왜가 양자강 입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평양성은 54676; 산동성 덕주시. 마지막 수도 장안성은 현 하북성 탁주시. 요동성은 현 하북성 한단시. 부여성은 현 산서성 태원시. 한단이나 태원은 곡부차럼 모두 북쪽과 동족으로 변이된 것입니다. 명 대에 1421∼1512년 기간 중에 수도를 남경에서 현 북경으로 옮기면서 고려 땅을 차지하게 되자 지명 변이가 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근거: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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