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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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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上)

東아시아 3國의 명운(命運)을 가르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철포(鐵砲)는 일본 열도에선 100여 년간 지속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는 철포의 위력을 과신한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도발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조(朝)·명(明)·왜(倭)의 3國이 7년에 걸쳐 피투성이의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 만주(滿洲)에서 흥기한 여진족(女眞族)은 중국 대륙의 정복왕조(征服王朝: 淸)로 떠올랐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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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서 조총을 쏘는 왜군.

 
철포(鐵砲)의 섬―다네가시마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철포가 전래된 門倉岬(가도쿠라미사키). 아래쪽 해변(마에노하마)에「南蠻船」이 표착했다.
  지난 12월21일 오전, 필자는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니시노오모테(西之表)港에 상륙했다. 다네가시마라면 1543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 신무기 鐵砲(철포·조총)가 전래되었던 섬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일본에서 양산된 철포에 의해 엄청난 파문과 변화를 겪는다.
 
  다네가시마는 규슈(九州) 남단 오스미(大隅) 반도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동서는 4~10km에 불과한데 남북은 72km이나 된다. 면적은 475 제곱킬로미터. 제주도보다는 작지만 거제도보다 큰 섬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3만5000명.
 
  니시노오모테市의 중심가 中目에는 철포박물관이 있다. 뱃머리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이 박물관에는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철포와 그것을 모델로 다네가시마에서 제작된 種子島銃 제1호 등 90여 정의 화승총이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박물관의 건물이 철포를 싣고 입항한 「南蠻船(남만선)」의 모습처럼 지어진 점이다.
 
  철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와사키 호텔 전용버스에 올라 58번 국도를 타고 南進했다. 필자는 이와사키호텔그룹의 홍보행사에 초청을 받아 2004년 12월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가고시마 공항-이부스키市-야쿠시마-다네가시마-가고시마를 여행했다.
 
  니시노오모테港에서 해변길을 따라 10여 리 내려오면 요키노(能野) 포구와 스미요시(住吉) 소학교가 보인다. 이 소학교는 철포 전래 당시 島主의 居館(거관)이 있었던 자리다. 버스는 곧 나카타네초(中種子町)로 접어들어 東進했다. 도로변으로 조그마한 種子島공항이 보인다. 이제 호텔버스는 다네가시마의 동쪽 해변길을 들어서 南進했다. 곧 미나미타네초(南種子町)이다. 미나미타네초의 동남단 다케자키(竹崎) 해안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우주센터 NASDA가 자리 잡고 있다. NASDA에서는 1966년 건설 이래 매년 2~3회씩 우주 로켓을 발사해 왔다. 이곳 우주과학기술관에는 실물 크기의 로켓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우주실험 시뮬레이션도 체험할 수 있다.
 
  NASDA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3km쯤 西進, 種子島 이와사키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필자는 일행과 잠시 헤어져 서남단에 위치한 가도쿠라미사키(門倉岬)로 직행했다. 가도쿠라미사키는 철포를 전래한 남만선이 표착한 해변(마에노하마)을 조망할 수 있는 곶(岬·미사키)이다. 이곳 약 100m 절벽 위에는 鐵砲傳來紀功碑(철포전래기공비)가 세워져 있다.   
    
 남만선의 표착(漂着)
  
   1543년 8월25일 未明,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시마의 서남단 가도쿠라岬에 표착했다. 당시의 상황은 16대 島主 히사토키(久時)의 지시에 따라 승려 南浦文之가 쓴 「鐵砲記」(1606)에 기술되어 있다.
 
  정체불명의 괴선박 출현-. 이 소식은 다네가시마의 治所가 위치한 니시노오모테(西之表)로 급보되었다. 이때 다네가시마의 치안책임자는 니시무라(西村直部丞)였다.
 
  당시, 다네가시마는 그렇지 않아도 비상사태에 들어가 있었다. 불과 5개월 전, 오스미(大隅) 반도에 웅거한 네지메氏의 기습공격을 받아 다네가시마內 城의 함락으로 島主가 할복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島主 할복의 위기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네지메氏에게 할양함으로써 겨우 해소되었다. 그러나 다네가 島民들은 네지메氏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야쿠시마의 면적은 500km2로서 다네가시마보다 오히려 조금 크다. 1993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필자는 다네가시마 상륙 직전에 야쿠시마를 들러 하루를 묵었다. 야쿠시마에는 규슈 최고봉인 표고 1935m의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를 중심으로 1000m 이상의 산이 대여섯 개나 솟아 있고, 그 속에 수령 1000년 이상의 삼나무, 즉 야쿠스기(屋久衫)가 우거져 있다.
 
  야쿠스기는 목조건물의 지붕을 이을 때 사용되는 최고급 목재로 이름 높다. 야쿠스기는 유달리 樹脂(수지) 성분이 많아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한다. 다네가시마 島民들에게는 야쿠시마는 꼭 탈환해야만 할 보물섬이었던 것이다.
 
  치안책임자 니시무라는 니시노오모테로부터 130여 리의 길을 달려 가도쿠라岬의 둔치에 도착했다. 마침, 5명을 태운 보트가 대선을 떠나 해변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었다. 니시무라는 敵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보트는 파도에 떠밀려 모래밭에 닿았다. 보트를 탄 5人은 조심스럽게 해안을 살피고 있었다. 승마용 채찍 하나만 지니고 있던 니시무라는 천천히 다가가면서 상륙하도록 손짓했다. 경계심을 풀도록 미소까지 지었다.
 
  가도쿠라岬 해안으로 표착했던 괴선박은 南·東중국海를 무대로 밀무역에 종사하던 安徽省(안휘성) 출신의 「대두목」 王直의 소유였다. 王直의 배가 마에노하마(前之浜)에 닻을 내린 것은 바로 네지메 전쟁의 굴욕으로부터 아직 5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먼저 王直이 모래사장에 뛰어내렸다. 이상한 모습을 한 3명이 뒤따랐다. 니시무라의 눈길은 이 3명에게 못박혔다. 복장, 머리색, 눈 색깔, 높은 코, 이런 것들은 니시무라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王直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시하며 니시무라에게 접근했다. 이어 승려를 만나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당시 일본에서 漢文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던 지식인은 대개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니시무라는 漢文을 아는 사무라이였다. 그는 모래바닥에 채찍으로 다음과 같이 써 보였다.
 
  「船中之客不知何國人也 何模形之異哉(배 안의 손님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왜 모습과 형태가 이상한 것인가)」
 
  이 글자 하나하나를 살피던 王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는 니시무라의 채찍을 빌려 다음과 같은 답변을 모래 위에 썼다.
 
  「此是西南蠻種之賈胡也 非可怪矣(이들은 서남방 미개국 종족의 상인들로서 별로 괴이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선주(船主) 왕직(王直)의 정체
 
   그렇다면 王直이란 이름의 明國人은 어떤 존재였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王直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倭寇(왜구)의 존재부터 추적해야 할 것 같다.
 
  明國 기록에 의하면 왜구의 출신지로는 薩摩(사쓰마)·豊後(붕고)·長州(죠슈)가 주류를 이뤘고, 이어 大隅(오스미)·筑後(치쿠고)·博多(하카타)·日向(휴가)·種子島 등이었다. 죠슈 한 곳을 제외하면 일곱 곳 모두가 규슈에 있다. 이렇게 규슈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이런 왜구들이 중국의 東海岸 지역을 침입할 때 앞잡이 노릇을 한 明國人들은 「王直·抗虎(항호)·陳東(진동)의 패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王直의 패거리는 밀무역에 종사하면서 때로는 왜구에게 협조했던 것이다.
 
  明國 정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국비의 태반을 투입, 해안경비를 강화했다. 그런 해안 요새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이 金山衛(금산위)였다. 이 밖에도 昌國衛(창국위)·太昌衛(태창위) 등 해안 요새가 많았다. 이렇게 단속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王直 등이 明國 연안에 기지를 유지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다. 王直 등은 규슈 서쪽 해안에 떠 있는 하라도(平戶島)에 기지를 두려고 했던 것 같다.
 
  1543년 8월 초, 王直은 그가 보유한 船團(선단)을 이끌고 廣東을 출항했다. 배는 길이 45m에 달하는 대형선이었다. 그들은 廣州灣 입구에 떠 있는 上川島에 기항했다. 王直은 上川島에서 일본行의 선편을 기다리고 있던 8명의 포르투갈人을 승선시켰다. 王直은 자기가 탄 「南蠻船」에 포르투갈人 3명을 태웠다. 나머지 5명은 다른 배를 탔다.
 
  이 船團은 해적과의 전투에 대비, 뱃전이 높았다. 3매의 돛을 단 이외에 삼각 및 사각 깃발 20여 매를 펄럭이며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의 「西勢東漸(서세동점)」은 포르투갈이 선도했다. 1487년부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과 동해안의 대부분을 장악한 데 이어 아라비아로부터 페르시아의 일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해협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15세기 마지막 10년간에는 明나라의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았다. 포르투갈人들은 양자강 하구 교통의 요지 寧波(영파)까지 진출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포르투갈 거류민이 1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王直으로서는 이런 포르투갈 해상세력과의 친선을 위해 선편을 제공했던 것 같다.
 
   王直의 선단은 8월10일경 廣州灣 입구의 上川島를 떠났다. 그 이틀 후 투르크(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아 王直의 선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王直이 승선한 배는 해적의 공격을 겨우 뿌리친 직후에 이번에는 태풍의 直擊(직격)을 받았다.
 
  王直의 남만선은 류규(琉球·오키나와: 당시 류규王國은 독립국이었음)열도로 북상하면서 섬마다 들러 기항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上川島 출항 10일째인 8월25일, 王直의 남만선은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岬 앞바다에 겨우 닻을 내렸던 것이다.
 
  가도쿠라岬의 하얀 백사장에서 니시무라와 王直의 필담이 계속되었다. 기괴한 세 사람이 南蠻國(남만국)의 상인이라는 점, 배는 태풍으로 표류를 계속하다가 겨우 이 섬에 표착했다는 점 등이 파악되었다. 배는 赤尾木(아코우기: 지금의 니시노오모테)港으로 회항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노를 대부분 잃어버린데다 서풍까지 불고 있었기 때문에 自力 회항은 무리였다. 이 대형 남만선을 曳船(예선)하기 위해서는 소형선 10척이 필요했다.
 
  王直과 충분한 타협을 한 니시무라는 서둘러 말을 달렸다. 赤尾木까지 52km의 길이었다. 어떻든 조난선 구조 여부는 극히 중대한 사항이었다. 약 3시간 동안 말을 달린 니시무라는 島主 토키타카(時堯)에게 상황을 보고, 예선의 허락을 얻었다.
 
  이번에는 니시무라가 예선의 책임자로 命을 받았다. 그는 급히 선박 몇 척을 수배하여 赤尾木을 출항, 인근 포구인 能野(요키노)·住吉(스미요시)·島間에도 들러 배를 조달했다. 12척의 예선대가 남만선의 표착 현장에 도착한 것은 하룻밤이 지난 8월26일이었다.
 
  예선들이 明國船에 밧줄을 걸고, 다시 예선끼리 엮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날씨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가을철이라 철야의 예선이 개시되었다. 별빛이 밝았다. 8월27일 아침, 남만선은 赤尾木에 입항했다. 항내로 들어와 계류된 남만선에 니시무라가 먼저 승선한 데 이어 준수한 모습의 소년이 승선했다. 이 소년이 다네가시마의 島主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남만선에 탄 110여 명은 비로소 「살았다」고 실감했다고 한다.
 
 
 
  
    
 사격시범을 보인 포르투갈人
 
   아코우기(赤尾木)에 입항한 明國船은 島民들에게 「南蠻船」이라고 불렸다. 연일 해변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남만선은 돛줄이 끊어지고, 노가 부러지고, 선창도 크게 손상을 입어 수리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승선자 110명은 항만 인근 慈遠寺(시온지)의 宿坊(숙방)에 출항 때까지 기거하게 되었다.
 
  慈遠寺는 島主인 種子島氏의 祈願寺(기원사)였다. 숙방은 36坊을 구비, 승선자 전원을 수용하기에 충분했다. 이 숙방엔 전년부터 사카이(堺: 지금의 오사카)의 화가 株幸(주행: 주코우)와 日向(휴가) 禪寺의 주지 住乘院(주승원)이라는 학승도 머물고 있었다. 住乘院은 중국의 구어체인 白話도 구사했다. 株幸은 남만선과 남만인을 寫生(사생)하는가 하면 그들의 진귀한 생활 및 일용품에 관해 기록하기도 했다. 승선자 중에는 南蠻語를 구사하는 玉城(타마구스쿠)란 이름의 琉球(유구) 여성도 있었다. 島主 토키타카는 住乘院의 통역으로 王直과, 玉城의 통역으로 남만인과 매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토키타카는 남만인이 가지고 있던 筒狀(통상)의 철봉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타마구스쿠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남만인 하나가 웃으면서 그 철봉을 토키타카에게 건넸다. 남만인은 둥근 납구슬과 검은 가루를 보이면서 설명했지만, 타마구스쿠의 통역만으로는 토키타카의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남만인은 그 둥근 구슬이 날아가 사슴이나 산돼지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남만인은 實演(실연)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토키타카는 家老, 니시무라, 株幸, 住乘院 등을 거느리고 慈遠寺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남만인은 들판의 좀 높은 곳에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질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철봉에다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집어넣은 다음, 불 붙인 끈을 끼웠다.
 
  사격거리는 50보였다. 남만인은 철봉의 한쪽에 오른 뺨을 대고 왼눈을 감은 채 조개껍질을 겨냥했다. 다음 순간, 철봉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과 굉음…. 모두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눈들은 발사된 구슬의 방향을 쫓았다. 표적의 조개껍질이 산산히 부숴졌다. 토키타카의 눈빛이 홀린 듯 반짝거렸다. 남만인이라고 얼마쯤 멸시하던 마음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 등장한 최초의 철포는 가마쿠라 막부 때 몽골군이 침입했을 당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것은 이름만 철포일뿐 화약을 가득 채운 鐵球(철구)였다. 그후 중국계의 소총도 전해졌으나 이것은 대포를 소형화한 것에 불과하여 명중률이 극히 낮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한 철포는 명중률이나 사정거리, 파괴력에 있어 중국제 무기를 훨씬 능가했다.
      
 철포(鐵砲)에 매료된 젊은 도주(島主)
 
   토키타카는 남만인으로부터 빌린 철포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무기의 기능과 조작법을 열심히 배웠다. 사격의 비법에 대해 남만인은 성의껏 가르쳤다. 불의의 사고를 우려하여 소년 島主에게 新무기 조작을 만류하던 家臣들도 이제는 호기심 이상의 정열에 휩싸였다.
 
  남만인의 입항 12일째인 9월9일, 토키타카는 철포 試射(시사)를 자원했다. 그동안 그는 사격 예비훈련에 몰두했었다. 장소는 역시 春日山으로 이어지는 언덕. 한복판에 검은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판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거총에 이어 조준. 家臣들뿐만 아니라 남만인들도 숨을 죽였다. 토키타카는 방아쇠를 가만히 뒤로 당겼다. 발사와 동시에 굉음…. 표적판은 두 개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토키타카는 그동안 궁술을 연마해 왔지만,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철포는 달랐다. 단 한 방에 표적판이 두 조각 나버리는 데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철포야말로 야쿠시마 탈환을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그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던 것이다.
 
  토키타카는 남만인에게 철포를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만인도 호의적이었다. 토키타카는 家臣들과 상의해 총값으로 永樂錢(영락전) 2000疋(필)을 지불했다고 한다. 永樂錢이라면 明의 永樂帝 때 주조된 돈으로서 오늘날의 달러화처럼 국제적 신용을 누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永樂錢을 수입하여 국내 통화로 사용했다.
 
  영락전 2000필을 오늘날의 엔화로 환산하면 1억 엔(韓貨 10억원)에 상당한다. 거금의 총값을 받은 남만인은 토키타카에게 철포 1정을 더 증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총 하나의 값이 한화 5억원에 달했던 셈이다.
 
  生殺與奪權(생살여탈권)을 가진 島主가 표류인들이 소지한 조총 하나를 매입하면서 과연 그런 거금을 지불했겠는가―최근 일본의 연구자들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人들이 타고 온 남만선의 수리비와 慈遠寺에서의 숙박비용은 어떻게 계산되었는가―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종자초총(子島銃)의 완성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의 국산화를 위해 섬의 全기능이 집중되었다. 원래부터 다네가시마는 砂鐵(사철) 산지가 해안을 따라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제철업이 발달했던 섬이다. 제작 책임은 刀匠(도장)이었던 야이타 킨베(八板金兵衛)에게 떨어졌다.
 
  철포 제작은 모루(대장간에서 사용하는 쇠 받침대)부터가 연구 대상이었다.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 感, 솜씨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異質의 세계였다. 제1의 난관은 80cm 길이의 筒(통) 제작이었다. 결국 짧은 筒을 깎고, 그것을 용접하여 하나로 붙였다.
 
  제2의 난관은 銃身의 筒底(통저)를 수나사와 암나사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나사 깎는 법을 알지 못해 그냥 붙이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런 초보단계의 철포라도 만들 수 있었던 데는 킨베의 딸 와카사(若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6세였던 와카사는 아버지의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려고 포르투갈人 牟良叔舍에게 몸을 바쳤다. 현재, 니시노오모테市의 구모노시로(雲之城) 묘지에는 「와카사 忠孝碑」가 세워져 있다.
 
  種子島銃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1544년 1월4일에 시작된 야쿠시마 탈환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戰果를 올렸다. 그렇다면 왜 다네가시마 島民들이 야쿠시마를 탈환하려 했는지 잠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야쿠시마 탈환 작전
 
  야쿠시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서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섬의 크기는 야쿠시마가 種子島보다 오히려 조금 크지만, 인구는 種子島가 야쿠시마보다 2배 이상 많다. 種子島의 13대 島主 시게토키(惠時)에게서 야쿠시마를 탈취했던 네지메 타카시게(寢尊重)는 규슈의 남단 오스미 반도의 領主이다. 시게토키의 딸은 네지메 타카시게의 부인이기도 하다.
 
  당시 규슈의 남부지역에선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최대 세력이기는 했지만, 肝付씨·寢씨·本田씨 등이 反시마즈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규슈 북부지역의 최강자인 豊後(붕고)의 大友宗麟(오토모 소린)은 사쓰마 정벌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네지메씨는 種子島의 시게토키에게 反시마즈 연합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마즈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種子島의 시게토키로서는 反시마즈 연합에 가담하기 어려웠다.
 
  1543년 3월23일, 네지메氏는 兵 300을 이끌고 種子島의 북단 우라다(浦田)에 기습 상륙했다. 다음날에는 種子島 측에게 방어전의 틈도 주지 않고 일거에 內城으로 진공, 점령해 버렸다.
 
  島主 시게토키는 배를 타고 야쿠시마로 도주했다. 뒤처리는 그의 장남 토키타카(堯時)가 맡았다. 14대 島主가 된 토키타카는 네지메씨에게 야쿠시마를 할양해 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따라서 토키타카로서 1544년 1월의 야쿠시마 진공은 복수전이었다. 토키타카 軍은 야쿠시마에 기습 상륙하여 나카다-요시다-미야노우라-구스카와로 진격, 야쿠시마에서 네지메氏 세력을 몰아냈다. 이때 種子島 조총은 그 발사음만으로도 네지메 세력을 압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가 낮은 鳥銃이었던 만큼 총저에 화약의 찌꺼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導火孔(도화공)이 잘 막혔고, 連射할 때는 화약재가 타다 남아 불발 또는 폭발의 위험까지 있었다. 결함투성이의 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포의 위력은 곧장 주목을 받아 그 일부가 사쓰마(가고시마)로 전파되었다.
 
  남만인 중의 하나인 「핀트」는 豊後의 영주(大名)인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에게 초대받기도 했다. 「핀트」가 種子島로 歸島할 무렵에 남만선은 수리를 끝내고 중국 양자강 하구의 寧波를 향해 닻을 올렸다.
 
  種子島에서 돌아온 핀트 등 3명은 곧 寧波에 거주하던 포르투갈人들 사이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상품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철포가 예상 이상으로 환영받았다는 것, 南蠻상품이라면 무엇이든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寧波의 포르투갈人들은 種子島를 다시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이번에는 復航船(복항선)을 포함, 16척의 대선단이 조직되어 種子島로 출항했다. 그러나 그중 15척은 풍랑 때문에 실종되고 1척만 種子島의 能野(요키노)에 입항했다. 이 배에는 남만인과 결혼했던 八板金兵衛의 딸 와카사(若狹·약협)도 타고 있었다.
 
  전년에 토키타카가 입수했던 총의 탄환은 13g짜리였지만, 이번에 남만인들이 상품으로 가져온 총의 탄환은 30g짜리였다. 이번의 승선자 중에는 철포 제작기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로부터 암나사를 깎는 방법, 短冊型(단책형)의 細長한 철판을 비스듬히 말아서 筒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드디어 완전한 일본판 철포가 제작되었다.
 
(下편에서 계속)
등록일 : 2014-08-25 10:10   |  수정일 : 2014-08-2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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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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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오  ( 2014-08-25 )  답글보이기 찬성 : 22 반대 : 20
결론은 일본이 한국보다 서양문물을 먼저 받아들여서 한국을 이겼다는거지
솔까 말하면 일본도 막부시대에 쇄국정책 펴는자들이 99% 였다는 사실이지
그런데 서양 포에 일본 포들은 속절없이 초토화 됨. 그래서 항복 하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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