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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신라는 강소국(强小國)의 역사적 롤모델이었다

삼국통일 완성한 나당(羅唐) 7년전쟁(4)

당대(當代)의 슈퍼파워 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강소국(强小國)의 역사적 모델이었다. 신라는 해로(海路)를 통한 당군(唐軍)의 병참선(兵站線)을 차단해 넘허(南下)를 저지했고, 서역(西域)에서 唐과 실크로드의 이권(利權)을 다툰 토번(吐藩)의 힘을 절묘한 타이밍에 이용했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7-14 오전 9:54:00

본문이미지
고구려 개마무사 벽화. 신라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무장을 했다.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창 : 7~8세기, 길이 60.5cm
  緖戰(서전)에서 신라군은 장창당의 선전으로 당군 3000명을 포획했던 것이다. 장창당은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고슴도치 모습의 밀집대형을 이뤄 敵(적) 기병의 돌격에 대처하는 신라의 신설 보병부대였다.
 
  신라군의 다른 부대들은 서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창당에 대해 시기심이 생겨 병력의 集中原則(집중원칙)을 무시하고, 병력을 분산배치시키려다 미처 진을 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당군의 급습을 받고 궤멸적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신라군의 장군급 10여 명이 전사했다.
 
  672년 石門 전투의 패배 이후 신라군은 공세에서 守勢(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사세가 급박해지자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또다시 사죄사를 급파했다. 그때 문무왕의 表文(표문)은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할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唐조정에 엄청난 진상품을 보내고, 유력 인사들에게도 뇌물을 뿌렸다.
 
  이때 신라는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廣州)의 晝長城(주장성: 남한산성)을 축조해 江北의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기지로 삼았다. 당군이 임진강을 돌파하고 한강을 넘어올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673년 5월,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군은 임진강의 요지인 호로하(임진강 중류)에서 고구려부흥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대거 남하했다.
 
  673월 7월, 太大角干(태대각간)의 지위에 있던 김유신이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만년의 김유신은 야전(野戰)에 출전하지는 않았으나 내정(內政)과 외교의 방향을 잡았던 大전략가였다. 그의 죽음은 신라의 위기였다. 「삼국사기」의 사론(史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김유신을 평가했다.
 
 < 신라가 김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치 않았으니, 그의 계책이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능히 功名(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中略) 유신에 대한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고려시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士大夫(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
 
  문무왕은 자신과 김유신의 사이를 「물고기와 물」로 비유해 왔던 만큼 김유신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1년 전 石門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의 대책회의에서 김유신은 정세변동을 기다리며 堅壁(견벽)에 의지한 방어전을 건의했었다.

 

 

  신라의 수륙(水陸) 방어전략
 
675년 9월, 이근행이 지휘한 당군 20만 명을 격파해 전마(戰馬) 3만380필을 획득한 매소성 전투의 현장(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현재 우리 국군의 진지가 축조되어 있다.
  문무왕은 673년 8월 沙熱山城(사열산성)을 증축하고, 9월에는 國原城(국원성: 충주), 北兄山城(북형산성: 경주), 召文城(소문성: 의성), 耳山城(이산성: 고령), 主岑城(주잠성)·萬興寺山城(만흥사산성: 거창), 骨爭峴城(골쟁현성) 등을 축조하고 走壤城(주양성: 춘천 鳳山)을 요새화함으로써 적의 예상 공격로 상의 방어진지를 대폭 증강했다. 13개 성의 신축 또는 증축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문무왕의 의지 표명이었다.
 
  적과 내통하는 무리에 대한 문무왕의 처리는 이번에도 냉엄했다. 唐에 붙으려 했던 아찬 金大吐(김대토)를 처형하고, 그 一家를 모두 賤人(천인)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적국에 국가기밀을 누설하던 「내부의 적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였다.
 
  적이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온 상황에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만약 적의 수륙군이 합세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상황은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海路(해로)를 통해 침공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적의 수군을 견제·소탕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673년 9월, 戰船(전선) 100척으로 편성된 신라 함대가 대아찬(관위 제5위) 金徹川(김철천)의 지휘로 서해에 진출해 적의 수군 활동을 저지했다.
 
  이같은 수륙 연합작전에 의해 적의 兵站線(병참선)을 봉쇄함으로써 신라군은 호로하와 王逢河(왕봉하: 경기도 고양) 등지에서 배고픈 당병과 싸워 9전9승했다. 이때 신라군은 적 2000명의 목을 베었고, 호로하와 왕봉하에 빠져 죽은 적병은 헤아릴 수 없었다.
 
당나라 기마 인물상.
  673년 겨울, 당군은 예성강 중하류 지역에 위치한 牛岑城(우잠성: 황해도 금천) 등을 공파했다. 우잠성을 지키던 고구려부흥군은 병력의 열세와 무기·병량의 부족으로 패퇴했다. 말갈·거란군은 강원도 금강군 현리의 大楊城(대양성)과 강화도 對岸까지 진격해 童子城(동자성: 경기도 김포시 通津) 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부흥군의 패전으로 開戰 이래 처음으로 한강 계선이 일부 돌파되었던 것이다.
 
  당군은 이때 신라군이 지키던 임진강 南岸의 七重城(칠중성: 경기도 파주군 적성)을 공격했지만, 패전하고 북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신라는 당군의 673년 겨울 공세를 저지하고 임진강 계선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고구려부흥군은 거의 소멸했다.
 
  674년 1월,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고, 金仁問을 신라국왕으로 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고, 劉仁軌(유인궤)를 鷄林道(계림도)대총관, 衛尉卿 李弼(이필)과 우영군(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을 副총관으로 삼아 김인문의 귀국을 호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의 唐은 신라와 대규모 전투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토번의 배후조종을 받은 天山지역 여러 유목부족들이 反唐 활동을 보여 唐고종은 소정방 등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대대적 군사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羅唐전쟁은 그로부터 약 1년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문무왕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白衿誓幢(백금서당)」을 편성했다. 백금서당의 병력은 670년 신라군이 백제 故土의 82개 성을 점령하면서 신라 內地로 이사시켰던 백제 유민들인 것으로 보인다.
 
 
  말갈군으로부터 전마(戰馬) 3만380필 획득
 
  675년 1월, 토번의 사절단이 長安에 들어가 唐과 토번 간에 일시 평화무드가 감돌았다. 청해(靑海) 방면의 긴장이 일시 완화되자 당은 한반도 작전을 재개했다. 유인궤의 당군은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이근행의 말갈군은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토번과 당이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섰다. 675년 2월, 唐고종은 유인궤를 靑海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 이후 이근행이 安東진무대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했다. 말갈군·거란군을 주력으로 삼은 당군이 남하하자 신라는 9軍을 출동시켜 방어전을 벌였다.
 
  675년 9월, 설인귀의 수군은 숙위(宿衛)학생인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임진강 하구로 침입했다. 風訓은 병부령(兵部令) 재임 중 「근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문무왕에 의해 숙청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로서 唐에 유학 중이었다.
 
  이때 金文訓(김문훈)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이 임진강 하구 泉城(천성) 앞바다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강타했다. 이때 신라 수군은 적선 40여 척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살상하는 승전을 거두었다. 설인귀는 戰馬 1000필을 내버려 둔 채 포위망을 빠져 도주했다. 唐의 水陸(수륙) 연합작전이 이번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이근행이 지휘하던 말갈군 20만 명과 매소성에서 격돌했다. 설인귀의 천성(泉城) 해전 패배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근행 軍은 전면 퇴각을 서둘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戰馬 3만380필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다.
 
  이근행의 말갈군은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감행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 말갈이 阿達城(아달성)에 들어와 약탈하자 성주 素那(소나)가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전사했다. 당군이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小守(소수: 지방무관직) 儒冬(유동)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赤木城(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脫起(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군이 또한 石峴城을 포위 점령하려 하자 현령 仙伯(선백)과 悉毛(실모) 등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명의 머리를 베고, 200필의 전마를 얻었다>
 
  신라는 强小國(강소국)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신라의 武官들에게 敵前後退(적진후퇴)는 최대의 수치였다.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 위와 같은 신라 사람들의 희생정신에 의해 성립되었다.
 
 
  [2부] 신라(新羅)는 토번(吐藩)과 함께 唐을 동서(東西)에서 협격했다
 
 
  말갈 장수 이근행(李謹行)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말갈군은 한반도를 떠나 西域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羅唐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적장이다.
 
  「舊唐書(구당서)」 말갈전에는 이근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突地稽(돌지계)의 아들 근행은 외모가 빼어나고 무력이 남달랐다. 麟德(인덕) 연간(664~666)에 營州都督(영주도독)으로 부임했는데, 그 부락의 집이 수천이고 재력으로써 변방의 영웅이 되니 夷人(오랑캐)이 그를 꺼려했다. 우령군대장군에 累拜(누배)되어 積石道經略大使(적석도경략대사)에 임명되었다. 토번의 論欽陵(논흠릉) 등이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湟中(황중)에 쳐들어오자 이근행은 병사들에게 나무를 하게 하고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적이 도착한 것을 듣고, 드디어 旗(기)를 세우고 북을 치며 陣門(진문)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군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진군하지 못하였다. 上元 3년(676) 또 토번의 수만 무리를 靑海에서 무찌르니 황제(唐高宗)가 璽書(새서)를 내려 그 노고를 격려해 주었다>
 
  이근행의 아비 돌지계는 원래 營州에 자리 잡은 속말말갈에 속하는 한 분파의 추장이었다. 그는 일찍이 隋(수)나라에 항복했지만, 속말말갈의 다수는 원래 고구려의 附庸(부용)세력이었다.
 
隊商을 묘사한 唐三彩. 唐과 西域 간의 교류를 보여 준다.
 
  속말말갈은 고구려가 隋나라의 遼西(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을 때 동원된 말갈 기병 1만이 바로 그들이다. 근행은 충성의 공적으로 唐고종으로부터 國姓(국성: 李氏)을 받았다. 그와 靑海에서 싸운 논흠릉은 토번의 병권을 잡았던 인물로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676년 윤3월 토번이 당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는 시기에 이근행은 靑海 전선에 나타났다. 靑海에서 이근행은 유인궤와 합동작전을 벌였다. 「舊唐書」토번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上元 3년(676) 토번이 ?(선)·廓(곽) 등 여러 州를 노략질하고, 人吏(인리)를 약탈하고 죽였다. 高宗이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 유인궤에게 명하여 河郡鎭守(조하군진수)로 가서 이를 막게 했다. 儀鳳 3년(678) 중서령 李敬玄에게 명하여 선주도독을 겸하게 하고, 그곳에 가서 仁軌를 대신해 조하진을 지키게 했다>
 
  676년 윤4월, 토번은 감숙성의 선주·곽주·하주·방주로 침공했다. 유인궤는 후임자인 이경현이 부임해 올 때까지 2년간 토번군의 대공세를 막았던 것이다. 이때 적석도경략대사 이근행은 전공이 혁혁하여 燕國公(연국공)에 봉해졌다.

 

 
  22회 해전(海戰)에서 전승(全勝)
 
  676년 11월, 薛仁貴(설인귀)의 唐 水軍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어귀로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수군이 설인귀가 지휘한 敵 수군을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포착했다. 신라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전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唐 수군 4000여명을 살상했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수군 작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22회의 해전은 그것이 해상기동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종래의 해전은 接舷戰(접현전) 위주로 전개되었다. 접현전은 피아의 함선이 뱃전을 마주대고 칼과 창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던 만큼 대개 한두 차례의 접전으로 승패가 판가름났기 때문이다.
 
  기벌포 해전 당시, 신라 수군은 千步弩(천보노) 등 새로운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신라의 노(弩)는 접현전을 위한 단병무기(短兵武器)가 아니라 장병무기(長兵武器)로서 일정한 먼 거리를 두고 적 함대와 전투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신라의 노(弩)는 羅唐전쟁 開戰 전에 이미 唐고종이 부러워했을 만큼 우수한 무기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9년(669) 겨울 條(조)에 따르면 唐고종은 신라 弩의 기술자인 仇珍川(구진천)을 詔書(조서)로써 唐에 불러들여 弩 제조의 노하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구진천은 끝내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 唐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하고, 弩의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을 데리고 갔다. 황제(唐고종)가 弩를 만들고 나서 화살을 쏘아 보니 3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 弩는 1000步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步밖에 나가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요구하였으므로 대나마 福漢(복한)을 파견하여 목재를 바쳤다. 황제가 즉시 弩를 개조하게 하였는데, 개조한 후에 쏘아 보니 6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重罪)를 준다고 위협해 보았으나 그는 끝까지 그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新羅는 의외로 海軍 강국이었다
 
쿠차의 거리에서 판매되고 있는「남」이라는 이름의 빵. 방석 모양의「남」은 쿠차에 唐나라의 安西都護府가 설치되었을 당시 군인들의 휴대용 식량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육군국이었지, 해군국은 아니었다. 양자강에서 水戰을 벌이기는 했지만, 해전(海戰)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반면 신라는 오랜 세월 倭(왜)와의 전투를 통해 해전 경험이 풍부했다.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6년(289) 여름 5월 조에는 『왜병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助賁尼師今(조분니사금) 3년 가을 7월 조에는 『이찬 于老(우로)가 왜인과 沙島(사도)에서 싸우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왜선을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신라는 이후에도 292년·297년·346년·364년·394년·405년·407년·500년에 海路를 통해 침입한 왜군과 싸웠다. 신라와 倭가 자주 싸운 것은 신라가 가야 제국(諸國)을 무력적 방법으로 잠식해 들어가자 규슈(九州) 지역에 있던 가야 계통 倭의 小國들이 신라에 적대감을 가지고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라는 일찍부터 해군을 창설·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소지왕 15년(493) 臨海鎭(임해진)과 長嶺鎭(장령진)을 설치하고 해군기지를 보강했다. 신라의 선박 건조 기술은 同시대 최고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배 모양의 5~6세기 토기가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라의 함선은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뱃머리(이물)와 꼬리(고물)를 비교적 높게 만든 構造船(구조선)이었다. 선수도 파도를 헤치는 데 알맞게 예리하다. 오른쪽 끝에 있는 돌출부는 전투시 적선에 기어오르기 위한 사다리로 보인다. 유럽 선박들의 발달사를 보더라도 신라의 함선과 유사한 선형의 배들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신라는 의외로 海軍 강국이었다. 500년 3월 왜적들이 장령진에 침입했다가 섬멸적인 타격을 받고 쫓겨간 후 160여 년간 다시는 한반도 해역에 나타나지 못했다.
 
  신라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압록강 이남에서의 당군의 작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병참선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對신라戰 강행은 唐으로서도 모험이었던 것이다.
 
  기벌포 전투 패전 후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침공군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평화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對토번 관계가 호전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것이 唐고종의 의지였다. 신라로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시대가 그 이후 무려 60년간이나 계속된다.
 
  唐은 676년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던 安東도호부를 677년 2월에는 新城(신성)으로 더욱 후퇴시켰다. 唐고종은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다시 조선왕으로 책봉했다. 웅진도독 扶餘隆(부여융)도 帶方王(대방왕)으로 책봉되었다. 전통적인 以夷制夷(이이제이) 정책이었다.
 
  그러나 高藏은 오히려 反唐투쟁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사천성 ?州(공주)로 유배되었고, 요동에 再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호도 또다시 감숙성과 하북성 등지로 분산 徙民(사민)되었다. 대방왕 부여융도 신라의 공격을 받을 것이 뻔했던 만큼 감히 한반도로 들어오지 못했다.
 
  678년, 신라는 船府(선부)를 설치해 종래 兵部의 大監(대감)과 弟監(제감) 등이 관장하던 水軍 업무를 전담시켰다. 船府의 설치는 신라의 水軍 발전을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로 이전보다 3배나 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고,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낀 해양국이 되었던 것이다.
 
 
  唐의 재상 장문관(張文瓘), 『新羅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신라와 토번은 물론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슈퍼파워 唐을 東·西 양쪽에서 견제·협공했다는 점에서 손발이 척척 맞았던 셈이다. 677년 5월, 토번은 扶州(부주)의 臨下鎭(임하진)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신라를 먹으려는 唐고종의 결심은 변함 없었다. 그러나 토번의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재침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은 「資治通鑑(자치통감)」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 高宗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시중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하여 高宗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臣은 그 폐가 공사 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唐고종은 (對신라戰을) 중지했다. 癸亥(계해)에 장문관이 죽었다. 丙寅(병인)에 李敬玄의 장병 18만이 靑海에서 토번의 논흠릉(論欽陵)과 싸우다 패했다>
 
羅唐 전쟁당시 당나라 집권자였던 고종과 측천무후.
 
  678년 9월, 左衛대장 劉審禮(유심례)가 토번에 대해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토번군의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토번은 이후에도 唐의 변경을 계속 기습했다. 680년에는 사천 서북부 지역의 전략적 요새인 安戎(안융)을 점령했다.
 
  679년 10월, 唐과 토번은 일시 화해했다. 「자치통감」 의봉 4년(679) 10월 조에는 『토번의 文成公主(문성공주: 唐태종의 황녀로 토번의 승첸칸포에게 시집감)가 대신 論塞調(논새조)를 파견하여 만첸칸포(승첸칸포의 후계왕)가 죽은 것을 고하고 화친을 청하자 황제(唐고종)가 낭장 宋令文(송영문)을 토번에 장례사절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번 측의 기록에 따르면 만첸칸포는 676년 겨울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토번에서는 왕이나 고위귀족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3년 후에 장례를 치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680년에 사망한 文成公主도 3년 후인 683년에 장례가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吐藩의 영웅 논흠릉(論欽陵)
 
서역인들을 묘사한 唐三彩. 唐과 西域 간의 교류를 보여 준다.
  676년 만첸칸포의 왕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치토슨(器弩悉弄)은 나이가 어려 국정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논흠릉(論欽陵)이 맡았다. 이때 토번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 다음은 「冊府元龜(책부원귀)」의 관련 기사이다.
 
 < 의봉 4년 칸포가 죽었다. 嫡子(적자) 치토슨은 大臣 麴殺若(국살약)과 함께 往年(왕년)에 병마를 징발했다.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여 칸포가 되었다.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로서 論欽陵의 부대에 있었다. 欽陵이 강성하여 치토슨의 동생을 받들어 主로 삼으려 했지만, 마침내 欽陵이 大義에 따라 살약(殺若)과 協心(협심)함으로써 치토슨의 왕위가 비로소 정해졌다>
 
  국살약은 만첸칸포의 사망 당시에는 그의 외손(혹은 생질)인 치토슨을 데리고 西部 티베트고원에 위치한 羊同(양동)에 나가 있다가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羊同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거 귀국했다. 그때 논흠릉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라사(拉薩)로부터 5000리(1907km) 북방의 靑海에서 유인궤·이근행 등의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唐고종은 토번의 왕위계승의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裵行儉(배행검)에게 명하여 토번 내부의 분열공작을 전개했다. 그때 치토슨과 국살약은 羊同의 군대를 데리고 라사로 먼저 입성했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당시 토번의 내분을 조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羊同은 승첸칸포 재위時에는 토번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승첸칸포는 그의 여동생을 羊同의 王 리그미에게 시집을 보내고서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승첸칸포는 기회를 노렸다. 664년, 羊同의 왕비가 된 승첸칸포의 여동생은 남편 리그미가 屬國(속국)인 숨파에 순시하러 간다는 정보를 오빠 승첸칸포에 알렸다. 승첸칸포는 길목에 복병을 깔아 리그미 王을 살해했다. 이로써 승첸칸포는 티베트고원을 통일할 수 있었다.
 
  토번은 羊同을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했으나 직할통치는 하지 못했던 듯하다. 토번의 「年代記(연대기)」에 따르면 만첸칸포의 사망 직후인 676년 연말과 677년 정초에 이르는 시점에 羊同은 논흠릉이 이끄는 토번군에 의해 가혹하게 토벌되었다. 羊同은 논흠릉에게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만첸칸포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왕비 로(沒祿)씨와 국살약을 중심으로 하는 파벌은 權臣 논흠릉의 정권장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왕비 로氏는 국살약과 짜고 對唐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논흠릉과 사전협의도 없이 羊同의 군사까지 동원해 그녀의 아들 치토슨을 후계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이다.
 
  이때 논흠릉은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唐과 전쟁을 하는 상황하에서 내부 권력투쟁을 벌인다면 실크로드의 이권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라가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논흠릉은 치토슨을 후계왕으로 받들기로 하는 한편 토번의 병권을 계속 장악해 對唐戰을 줄기차게 전개했던 것이다.
 
 
  東아시아 세계의 平和체제 완성
 
 
 신라는 羅唐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誓幢(서당)의 증설, 騎兵(기병)의 증강 등 대규모 군비확장을 계속했다. 세계제국으로 건재했던 唐은 언제든 다시 對신라 전쟁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 간 국력의 차이가 현저했던 만큼 전쟁 재발에 대한 우려는 신라의 몫이었다.
 
  문무왕은 왜국과의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이었다. 「日本書紀」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668년부터 700년까지 신라는 25회에 걸쳐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사절단의 대표도 대아찬 이상의 진골왕족이나 고위급이 많았다. 심지어 675년 2월에는 왕자 金忠元(김충원)을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679년 토번의 유력한 동맹인 西돌궐의 여러 부족이 당군에게 격파되어 그 可汗(가한)이 사로잡히고, 토번도 만첸칸포가 죽은 후 태후와 권신 논흠릉 사이의 암투가 지속되는 내분상태에 있었다. 신라를 재침하려던 唐고종의 야망이 시중 張文瓘(장문관)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문무왕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0월부터 본격화된 신라의 對일본 평화공세는 위와 같은 西域정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羅唐전쟁 승리 이후에도 노심초사하던 문무왕은 681년 7월1일 죽고,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신문왕도 9誓幢(서당)을 완성하는 등 군비확장에 힘썼다.
 
  683년 12월, 唐고종이 죽었다. 이후 則天武后(측천무후)가 唐의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692년 唐中宗은 신라에 대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廟號(묘호)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것은 사실상 측천무후의 뜻이었다.
 
  다음은 「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 조의 기사이다.
 
 < 唐중종은 사신을 보내 전하기를 『우리 太宗 文황제(李世民)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廟號를 太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先王 김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廟號)를 쓴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신문왕은 唐중종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698년,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끈 大祚榮(대조영)이 고구려의 故土 만주에 渤海(발해)를 세웠다. 732년 발해군이 요동반도의 요지 登州를 선제공격해 등주자사 韋俊(위준)을 죽였다. 733년 발해-당의 전쟁이 확대되자 唐은 신라에 접근했다.
 
  성덕왕 33년(734)에 당현종(唐玄宗)은 신라가 영유하고 있던 평양 이남의 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군사동맹을 요청했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장기적 평화체제로 진입했다. ●
 
 


  ▣ 토번(吐藩)의 서역(西域) 경영
 
  唐의 西域 경영에 있어 최대의 敵은 吐藩(토번)이었다.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天孫이라는 네치첸 칸포가 창업한 토번은 6세기 후반 중앙아시아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해, 「승첸」칸포(王)에 이르러 티베트를 통일했다. 승첸칸포는 唐태종에게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청했는데, 唐태종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변경을 강타한 토번군의 침공을 받고 화의가 이뤄져 641년 文成公主가 황족인 江夏王 道宗의 호위를 받으며 토번의 수도 라사로 가서 승첸칸포와 결혼했다. 道宗이라면 그로부터 4년 후(645) 唐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安市城 공방전에 참전했던 장수이다.
 
  승첸칸포가 죽은 후 토번은 靑海 지역의 吐谷渾(토욕혼)의 귀속을 둘러싸고 唐과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662년, 토번은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토욕혼을 멸망시킨 후 본격적으로 西域(서역: 지금의 新疆위구르自治區)에 진출해 호탄(和田)을 공격하고, 670년에는 쿠차, 카슈가르, 호탄, 카라샤르 등 唐의 安西4鎭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安西都護府는 지금의 투루판인 西州(서주)로 물러났다.
 
  675년, 唐은 安西4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곧 西돌궐의 阿史那都支(아사나도지) 등과 함께 또다시 安西도호부와 4鎭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안서4진은 당과 토번이 번갈아 차지했다.
 
唐나라 문성공주 일행을 맞이하는 송첸칸포.
  679년, 唐은 長安에 망명해 있던 사산朝 페르시아의 왕자 페로스(사실은 그의 아들 나르세스)를 고국에 돌려보낸다고 사칭하고 호위병을 가장한 원정군을 보내 무방비 상태의 阿史那都支를 포획했다. 이때 당군은 스이아브(碎葉) 등 4鎭을 회복해 스이아브城을 중국식으로 축성했다. 687년에도 토번이 서역을 제압했지만, 또다시 王孝傑(왕효걸)의 당군이 토번군을 무찌르고 스이아브를 포함한 4鎭을 탈환했다.
 
  7세기 후반은 唐과 토번의 서역 쟁탈전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8세기 전반은 唐玄宗의 극성기로서 唐 세력이 서역으로도 뻗어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8세기 중반, 토번은 「安史의 亂」으로 혼란에 빠진 唐을 대신해 일거에 서역의 실크로드(남·북 오아시스路)를 장악했다. 唐代宗 원년(763)에는 唐의 수도 長安을 일시 점령하는 등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때의 「長安 점령 기념비」가 현재 라사의 포탈라宮 앞에 보존되어 있다.
 
  토번은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의 기동력을 활용해 大帝國을 지향했다. 790년에는 서역과 天山 북쪽 스텝로드(草原의 길)까지 일시 지배했다. 그러나 같은 무렵부터 성행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1년 唐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후 불교에 의한 이상적 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帝國 운영과의 모순이 확대되어 846년 멸망했다.
 
  토번의 故地 티베트는 현재 中國의 일개 省으로 취급되는 西藏自治區(서장자치구)로 되어 있어 토번의 후예들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연전에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고 티베트의 종교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입국 조차 거부한 바 있다.(끝)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4-07-14 오전 9:54:00   |  수정일 : 2014-07-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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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chang  ( 2014-07-14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17
정 선생님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신경억  ( 2014-10-15 )  답글보이기 찬성 : 19 반대 : 21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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