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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형수 김질락의 수기가 오늘의 종북세력에 남긴 경고장인 이유는?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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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락의 '주암산': 또 다른 통혁당 요원의 고백-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쓴 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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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6일 열린 통혁당 사건 군(軍) 관련 피고인 4명에 대한 구형공판 장면. 이날 공판에서 군 검찰은 당시 신영복 피고인(사진 맨 왼쪽)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3명에게는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신영복은 육사교관(육군중위) 신분이어서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월간조선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내외빈 환영 연설에서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말한 신영복 씨는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중형(重刑)을 살고 나온 사람이다. 북한 정권이 1960년대 후반 남한에 구축한 지하당(地下黨)인 통일혁명당의 창당멤버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옥중(獄中)에서 수기(手記, 原제목 '주암산')를 썼다. 수기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11월 초 김종태, 이문규와 함께 지하당의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그는 1967년 5월에 월북하여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후 23일간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68년 중앙정보부에 검거되었고, 7·4 남북 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15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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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락
   수기(手記)는 슬프다. 그는 자신을 인생 낙오병이라면서 이 글을 비문(碑文)이라 하였다.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영원히 매장해버리려는 나의 이 작업에 대해 산 자들은 나를 고발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나를 증언할 것이다>는 머리글부터가 처연하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옥중(獄中)에서 쓴 이 글이 얼마나 자유의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 글을 쓰도록 허용한 당국의 뜻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오늘에 더욱 가치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든다. 반공국가에서 反국가단체인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가며 숨어서 지하당을 만들고 목숨을 건 월북을 하고 거기서 공화국에 환멸을 느껴간 과정에서 웃음이나 밝은 면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념전선의 뒤안길에서 보낸 너무나 절박하였던 삶을 너무나 성실하게 써놓았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는 머리말의 제목부터 읽어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김질락 씨의 따님인 김수아 씨가 아버지의 머리글 뒤에 붙인 ‘아버지 나라도 지금 꽃이 피나요’란 글은 너무 슬퍼 아름다운 글이다.
  
   <봄에 왔을 때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왠지 그날은 무섭고 답답했습니다. 구치소 앞마당의 비에 젖은 새까만 삼륜차를 보면서 벌써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삼륜차 안에는 관(棺)이 있었습니다. 멍석이 씌워져 빗발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의 관.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가 아니라 숨이 끊어진 시신(屍身)으로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김수아 씨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이 책에 온기(溫氣)를 준다. 그는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은 뒤로 하고서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 아버지의 행복은 결코 값싸게 흥정하여 사들일 수도 없고 맛보고 싶은 때 마음대로 맛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답니다>라면서 이렇게 다짐하였다.
  
   <수아에게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주어져 있고 지난날의 상실은 오히려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 뼈를 주신 아버지의 훈기(薰氣)를 잃지 않으려합니다>
  
   이 책은 김질락을 죽음의 길로 포섭해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金鍾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나의 셋째 삼촌이었다. 아버지의 5형제, 7남매 가운데 다섯째, 끝에서 둘째였다. 나보다는 여덟 살 손위인 삼촌이었고 맏이인 아버지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아래인 셋째 동생이었다>
  
   김질락은 수기(手記)를 통하여 김종태의 인간됨을 많이 비판한다. 달변가, 자만가, 영웅심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일제(日帝)시절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선 1946년 10·1 대구좌익폭동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향에서 종적을 감춘 적도 있다고 했다.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종태는 중형(仲兄)인 김상도가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자 그의 비서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김질락은 이 활동가 삼촌의 영향권 안에 흡입되어간 사정을 설명하면서 <나에게 있어 그는 베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 같았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이었다>고 썼다.
  
   김종태는 법과대학을 지망하는 조카를 위협하여 정치학과로 진학하도록 했고, 선거 때마다 청년조직을 맡게 하였으며, 득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에 배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책을 읽어가면, 김질락은 좀 심약(心弱)한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집안의 최고 엘리트인 김종태의 권위에 눌려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리란 느낌이다.
  
   <우리 사회의 대가족 제도가 얼마나 큰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본보기로 내세우고 싶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있어 나한테 굳이 변명하기를 권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My beginning is my end)라고>
  
   그가 삼촌에게 포섭되어 통일혁명당에 연루되는 과정은 아마 요사이도 나라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형적인 사례이다. 인정(人情)으로 인간관계를 만든 뒤 이념적으로 설득해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강요하는 좌익들의 수법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김질락은 김종태에게 먼저 포섭된 양춘우가 자신을 설득하는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기구한 인생에 대해 말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이 모두 국가의 책임이며, 그 궁극적인 요인은 모순된 제도에 있고, 이 모순이 제거되지 않는 한 밝은 앞날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톤이 쓴 《A Hidden History of Korean War》의 일역판 《조선전쟁비사》를 인용하여 6·25는 북괴가 먼저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먼저 쳐들어갔다고 우겼으며,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으로서 항일전쟁의 투쟁경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또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음이 사실이라는 등 실로 허망된 얘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일부 불쌍한 지식인들 가운데는 자기의 두뇌를 필요 이상으로 과신한 나머지 남보다 그것을 곧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고 그것은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맹신 또는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북괴간첩들이 내세우는 선전내용은 ① 6·25 침공의 부인 ② 박헌영의 간첩설 ③ 김일성 항일빨치산 투쟁사의 정당화 ④ 계급의식의 고취 ⑤ 反정부 투쟁에 대한 고무찬양 ⑥ 반미사상의 고취 등이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을 만들 때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었지만 순진한 동조자에겐 ‘동등한 관계의 형제당’이라고 속였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당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이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당은 이북의 노동당과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형제당의 관계에 있는 겁니다. 우리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북한노동당에 의하여 滅絶(멸절)된 남로당의 운명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종북(從北)세력은 절대로 북한 정권에 대하여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이는 힘의 원리이고, 권력의 법칙이다.
  
   김질락은 평양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평양에 갔을 때만 해도 노동당 간부들은 인혁당이 어떻게 해서 노출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역대 민비(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3·24에서 6·3에 이르는 국내 혼란이 북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확증을 나는 얻고 있었다. 통혁당에 관련하고 평양을 다녀온 후에야 나는 6·3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고, 그 시점에서 한일회담은 불가피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납득이 갔다.
   또한 북괴의 상황과 대조하여 한국의 좌표를 보다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5·16혁명은 역사적인 필연의 논리였다는데 전적으로 수긍이 갔다. 만일 4·19 직후의 혼란기가 좀더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은 오늘의 성장과 번영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종태 삼촌은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산하에 거두려고 애썼고, 인혁당은 인혁당대로 종태 삼촌을 이용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들 반목하여 공작 일반의 수법에 있어서 각자 우월하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는 넌센스가 있다>
  
   <6·25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충실한 자료를 근거하여 북괴의 남침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정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로 6·25사변이 북괴의 불법남침에 의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북괴가 6·25사변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語感(어감) 자체가 이미 전쟁도발을 의미하고 있음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북괴의 혁명박물관이란 곳을 들어가 보면 6·25에 대한 김일성의 5단계 전략은 사전에 이미 계획된 것으로 첫 남침에서부터 패주해서 후퇴한 사실까지 모두 그의 탁월한 전략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침략자였음을 노골적으로 시인하는 것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김질락의 수기를 읽으면 온통 이념과 관념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것들의 귀착점이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란 고백을 스스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공산당의 공식적인 회합이나 선전, 선동의 슬로건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어떠한 공산주의자도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먹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지고 밥을 퍼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나 모택동을 자나 깨나 주워 섬기지만 그들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고나 언동은 인간의 본래적인 습성과 인간생활의 인습에서 결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이북에서 남파된 무장간첩이 있다고 하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조국통일이나 김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생명을 방위하기에 온갖 본능적인 지혜와 교육에 의한 후천적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때 당과 사상을 떠나 있으며, 그를 얽어매고 있는 당의 유일한 끄나풀은 이북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에 대한 가련하고 애절한 미련뿐인 것이다>
  
   김질락의 手記(수기)엔 당시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강사로 있던 신영복씨를 포섭해가는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다. 신영복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장기복역을 하고 나온 뒤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더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의 主무대는 음습한 폐쇄공간이다. 사교(邪敎)집단과 공산당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폐쇄공간으로 몰아넣고 오직 한 사람(또는 하나의 조직)을 숭배하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꽉 막힌 상황에 몰려서 비교대상이 없으면 교육 받은 대로 한 점을 향하여 몰입,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한번 들면 놓기 힘들다.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느끼면서 써내려간 심정(心情)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生을 걸고 증언한 책의 밀도가 대단하다. 김질락 씨는 상당한 문학적 재능까지 보여준다.
  
   <나는 나의 사망을 매장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사망을 증거로 북괴를 고발하고 북괴로 말미암아 무서운 죽음의 길을 헤매고 있는 모든 가엾은 사람들에게 나를 증거하여 경고한다>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從北좌익세력에 보내는 충고로 들린다. 이 수기를 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편집자는 편집실을 찾은 김질락 씨 부인의 한 마디를 소개하였다.    
   
   “남편은 계속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도 아무리 서쪽 노을이 아름답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편집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나는 사람은 혼(魂)의 무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몸과 혼, 온몸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전향(轉向)하였고, 집행도 미뤄져 온 김질락을 7·4 공동성명 직후에 교수형에 처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는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겠다. 이 수기는, 38세에 죽은 김질락이 미리 써놓은 자신의 비문(碑文)이자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세력 앞으로 남긴 경고장이기도 할 것이다.
  
출처 | 조갑제닷컴
등록일 : 2018-03-14 09:59   |  수정일 : 2018-03-1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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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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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수  ( 2018-03-15 )  답글보이기 찬성 : 27 반대 : 5
종북좌빨들이 꼭 읽어야 할 김질락 씨의 고백수기 이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며, 산자들에게 남기는 충고 이다.
윤정옥  ( 2018-03-14 )  답글보이기 찬성 : 37 반대 : 0
남산도서관에서 서고에 있는 책을 사서에게 달라하여 읽어보았습니다. 대출은 안됩니다. 김질락이란 사람이 목포 앞바다에서 밤에 월북하는 과정, 북에서 교양교육을 받는 과정 참 무시무시합니다. 거기에 숙대강사, 육사교관이 된 신영복이 등장하고 그가 한 말들이 진짜인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살고 싶어서 전향을 했고 수기도 썼지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딸이 참 똑똑하던데 어찌 자랐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한지상  ( 2018-03-14 )  답글보이기 찬성 : 118 반대 : 2
최근 청와대에서 문재인이 김여정이하고 기념사진 찍을때 신영복의 붓글씨가 크게 배경에 비치던데... 문은 신영복을 정신적 스승으로 모신다고 실토도 했었고... 대한민국이 반은 적화되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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