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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신종태 교수의 세계 전사적지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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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과 골란고원!

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Elie Cohen)』은 적국 시리아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신분이 탄로나 다마스커스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묻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코헨은 죽을 때도 이스라엘을 향해 눈을 뜬 채 죽겠다고 하였다. 따라서 용수를 쓰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인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전설적인 스파이이면서도 철저한 애국자였던 코헨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글 |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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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코헨의 사진
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와 골란고원!
 이스라엘인 대부분은 전설적인 스파이 영웅 엘리 코헨(Elie Cohen)을 기억한다. 코헨은 이집트 출생 유대인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의 본국 귀향을 도우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첩보원으로 변신한다. 그는 시리아계 아르헨티나 실업가로 위장하여 시리아 권력층 깊숙히 침투한다. 특히 1967년 6월5일에 발발한 6일전쟁 전,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한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수시로 타전하였다.

 그러나 1965년 신분이 탄로나 그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공개처형 당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묻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코헨은 죽을 때도 이스라엘을 향해 눈을 뜬 채 죽겠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인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전설적인 스파이이면서도 철저한 애국자였던 코헨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스파이 코헨은 아르헨티나에서 가구 무역으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번 사업가로 시리아 상류층에서 알려졌다. 그의 주변에는 고급장교, 정치가, 기업가 등 소위 시리아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항상 몰려들었다. 수시로 그는 시리아 국방부와 주요 군사시설에 고급장교들과 들락거렸다. 또한 군사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는 코헨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울러 돈 많은 실업가 코헨은 정치인·군 수뇌부 인사들의 부인에게 진주목걸이, 팔찌, 모피 코트 등 온갖 사치품을 적절한 이유를 만들어 선물하곤 하였다. 뭇 남성들은 선물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의 코헨 칭찬에 녹아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코헨이 올린 첩보 중 가장 큰 전과는 당시 시리아군 참모총장 조카인 마지 대령으로부터 입수한 골란고원의 군사기밀들이었다. 즉 민간인 출입이 절대 금지되었던 이 지역의 비밀군사기지를 마지 대령과 함께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예들 들면 코헨은 이 여행으로 골란고원 서쪽의 122M 야포(80문)와 전차부대 위치, 주요 요새 내부설계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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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군 벙커와 주변 교통호
 
  그 후에도 코헨은 시리아군의 실력자들과 함께 수차례 골란고원을 여행했다. 어떤 때는 우쭐해진 시리아군 장교들이 그에게 상세하게 병력 배치와 이스라엘 공격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마다 영민한 코헨은 “나는 일개 비즈니스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러나 명석한 이 스파이의 머리속에는 이미 시리아군 작전계획이 다 입력되어 있었다.
 
 드디어 1963년 8월, 코헨('카밀 아민 터베스'라는 가명 사용)은 시리아 정권에서 빛나는 실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정계와 군부 유력자들 사이에 신용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실업계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어 시리아 정부의 요직을 맡을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시리아 알 하페즈 대통령은 그를 국방상 차관으로 임명하여 향후 국방상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어떨까? 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사실 알 하페즈 대통령은 과거 아르헨티나 시리아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할 때 이미 코헨이 돈독한 관계(사실 포섭함)를 맺어둔 사이였다.
 
 그러나 긴장의 연속인 스파이 생활은 코헨의 성격을 점점 변화시켜 나갔다. 온화하며 누구보다도 친절한 품성을 가졌던 코헨이 오래간 만에 이스라엘에서 가족들을 비밀리 만났다. 그의 성격은 신경질적으로 되었고 때로는 포악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가족들은 그가 프랑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조용히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다시 복귀했다.
 
 골란고원 격전지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으로 안내자 나아만은 자동차를 몰았다. 그녀 역시 이스라엘 전설의 스파이 코헨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정말 이스라엘은 특이한 나라다. 국가 간의 스파이전은 비밀리 소리없이 진행되는 줄 알았으나 이스라엘은 일반 국민들조차 적국에서 사로잡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간첩에 대해서도 이렇게 후손들이 기억하고 있다니... 그녀는 이스라엘 스파이 코헨을 “다마스커스 속의 우군(Our man in Damasus)"으로 수차례 표현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러시아계 이스라엘 여성이었지만 자기 조국의 전쟁사·수난사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고 있다. 사실 그 내용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로서 이런 분야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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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군 과거 진지를 돌아보는 안내자 나아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에 유대인 인구는 불과 60만 내외. 이런 소수의 인구로 주변 아랍민족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에 2000여 년 전에 없어졌던 선조의 나라를 결국 다시 세웠다. 그 이후 1956년 스웨즈 전쟁(제2차 중동전쟁),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1973년 욤키브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등 주변 아랍제국들과 무려 대규모의 전쟁을 4번이나 치루었다. 그러나 그때 마다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1973년에 약 400만 명, 2012년에 약 700만 명에 달했다. 현 인구 중 약 200만 명 정도가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나아만이 갈리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폐기된 시리아군 벙커로 나를 안내했다. 갈릴리 호수 옆 멀리 이스라엘 정착촌도 보였다(현재 골란고원에는 약 33개의 이스라엘 집단마을이 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1960년대 이곳 시리아군 진지에서 수시로 이스라엘 마을에 포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스라엘군의 반격도 있었다. 뒤이어 시리아군은 헤르몬산에서 갈릴리 호수로 흐르는 수로를 차단하여 이스라엘 식수원을 고갈시키고자 했다. 이스라엘은 절대 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권 수호를 위해서는 무력수단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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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군 진지에서 내려다 본 갈릴리호수 옆 이스라엘 마을

 이런 상황에서 스파이 코헨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아만은 또다시 시리아군 진지 옆에 무수히 서있는 “유칼립투스” 나무와 코헨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1950년대 말부터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갈릴리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골란 고원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골란고원은 별다른 삼림이 없어 병력과 장비의 위장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이스라엘군 정찰기가 수시로 국경근처까지 와서 골란고원 일대를 촬영하곤 하였다.
 
 이때 시리아에서 미래 국방상까지 거론되는 코헨은 군 당국에 고원지역에서도 빠른 성장이 가능한 속성수인 “유칼립투스”를 군사기지 주변에 대거 식재할 것을 조언했다. 특히 그는 유명 가구회사를 운영하여 산림과 목재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넓은 평원에 동일 종류의 산림으로 특정지역을 위장했을 때 그 지점이 쉅게 식별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군사상식을 시리아군은 간과했다. 스파이 코헨의 조언을 받아들인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의 군사기지에 대대적인 위장식수 조림사업을 시행했다. 그리고 “유칼립투스”숲 아래에 수 많은 시리아군 병영이나 장비들을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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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위장식수 유칼립투스

   1967년 6월 7일 아침! 시리아 선제공격을 위해 출격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은 골란고원의 “유칼립투스” 산림지역만 골라서 기습적인 폭격을 가했다. 그들은 이미 이 나무의 형상과 군락지에 대해 사전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울창하게 조성된 위장식수 아래서 은밀하게 행동했던 시리아군들은 졸지에 하늘로부터 불벼락을 얻어맞았다. 오늘날 골란고원의 유칼립투스 조림지에 가면 전쟁 당시 파괴된 시리아군 병영이나 참호·벙커 등을 쉅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국민들은 “유칼립투스”에 얽힌 전쟁사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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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칼립투스숲 안에 폐기된 시리아군 병영 전경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처럼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로 스파이 코헨의 운명은 바꿔었다. 1965년 1월 24일 새벽! 다마스커스 시내 인도대사관 옆 숙소에서 깊게 잠들어 있던 그는 시리아 방첩부대에 포착되어 어이없이 체포되었다. 코헨이 체포되기 전날 밤, 그는 시리아 알 하페즈 대통령이 결정한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편성”에 대한 긴박하고도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 중요한 정보는 코헨의 무전송신기를 통해 즉각 이스라엘로 타전되었다. 그러나 그 전문송신이 코헨의 마지막 보고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음 날 새벽녘, 8명의 시리아군 방첩대원들이 코헨의 숙소로 들이 닥쳤다. 그리고 코헨은 체포되고 송수신기를 포함한 일체의 스파이 장비가 압수되었다. 어떻게 시리아 방첩기관원들이 코헨의 숙소에 기습적으로 들이 닥치게 되었을까? 실로 우연한 계기가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
 
 코헨 숙소 바로 근처에는 인도 대사관이 있었다. 그런데 대사관 전신계가 수개월 전부터 인도 뉴델리로 보내는 무전연락에 전파방해를 받고 있다고 시리아 정부에 신고했다. 시리아 당국은 원인을 규명하려고 했으나 그럴만한 정교한 장비가 없었다. 따라서 소련 군사고문단에 그 수수께기를 풀어 달라는 의뢰했다. 소련 통신전문가들은 대사관 근처에서 누군가가 허가없이 전파를 보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전파탐지장치 탑재차량을 배치하여 은밀하게 추적했다. 추적팀은 금방 코헨의 전파 발신신호를 포착했다. 그러나 발신시간이 짧아 기술자들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방첩부대는 발신원으로 생각되는 주변 빌딩을 철저하게 수색했다.
 
 코헨이 체포되기 전 시리아 당국은 의도적으로 전파발신지 주변빌딩에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인 정전을 미처 알지 못했던 코헨은 축전지를 이용하여 첩보를 이스라엘로 타전했다. 결국 전문가들은 송수신기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했고 그 곳을 급습하였다. 시리아 정보기관은 모르스 전신 전문가 입회하에 코헨에게 이스라엘로 허위첩보를 보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코헨은 송신속도와 리듬의 미묘한 변화로 모사드에 자신의 처지를 알렸다. “나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선고를 받은 인간입니다!”라고
 
 코헨의 체포소식은 즉시 알 하페츠 시리아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 카밀(코헨의 가명)이 이스라엘 스파이라니?”.
시리아 정부는 일시적으로 공황에 빠졌다. 그의 체포에 따라 약 500여 명의 시리아 정치가·군인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코헨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시리아인들을 끝까지 보호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군사기밀을 알려 주었던 시리아군 대령은 코헨이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의 군판사로 앉아 있기도 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모사드는 코헨을 구하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공작을 하였다. 시리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인을 통하여 수백만 달러의 현금과 엄청난 비군사물자의 시리아 지원을 제의했다. 심지어 로마 교황까지도 시리아 대통령에게 코헨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코헨과 절친했던 알 하페츠 대통령 및 군부의 실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오히려 사형선고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렸다. 즉 “우리는 이스라엘 스파이와는 전혀 무관하다!”라는 것을 정적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의 사형집행 전, 한 레바논 저널리스트는 코헨과의 인터뷰를 했다. 그 기자가 전하는 코헨의 마지막 진술.
“나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시리아로 찾아 왔습니다. 나의 동포, 나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내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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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헨의 교수형 사진
 1965년 5월 19일 새벽,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에르마자 형무소의 무거운 문이 열렸다.그 동안 숱한 고문과 정신적 고통으로 코헨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무장 군인 4명에 의해 끌려 나온 코헨은 대기 중인 죄인 호송차에 실려졌다. 그리고 다마스쿠스 구시가지 광장으로 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선 가운데 그는 교수대로 올라섰다. 사형집행인은 죄수에게 허술한 흰자루를 입혔다. 또한 코헨 머리에 용수를 씌우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코헨이 히브리어로 기도의 말을 되풀이하는 순간 발밑의 문은 떨어지고 그의 목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때가 새벽 03시 35분! 이 모든 장면은 시리아 텔레비전으로 중동지역에 생중계되었다.

  코헨이 처형되고 난 이후 데이빗 벤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수상)은 시리아의 야만적인 행동에 대한 항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텔아비브 시내를 행진했다. 이스라엘의 어떤 시나 자치단체에서는 도로 이름을 『엘리 코헨』으로 개명했다. 숲이나 공원 이름은 그를 위해 바꿔어졌다. 그 시간 코헨의 아내 나디아는 남편의 목이 밧줄로 감기는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 봤다. 코헨이 사형을 당하는 순간 그녀는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그녀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운반되어 목숨은 구했다. 지금도 『엘리 코헨(Elie Cohen)』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영원한 스파이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골란고원의 옛 시리아군 병영이나 진지 주변에는 아직도 어김없이 “유칼립투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추측컨대 현재 시리아 본토 내의 주요 군사기지에는 아직 이 나무들로 덮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일전을 앞두고 소련으로부터 대규모의 전투장비와 물자를 지원받아 전국 곳곳에 전개해 두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자국의 스파이를 영웅화하여 후세에 기억케 하는 국가는 사실 이스라엘과 북한 밖에 없다. 북한의 경우에도 한국에서 송환되어 온 이인모를 포함한 간첩출신 미전향 장기수들을 영웅으로 둔갑시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특히 “이인모 영웅 따라 배우기” 등으로 북한의 신세대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신념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적국에서의 스파이 활동은 비겁하고 부도덕한 행동이라는 인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국의 생존을 위해 적국 내에서의 간첩활동은 어느 국가에서나 일상적으로 다 있는 일이다. 6·25전쟁 당시 약 30,000여 명의 대북유격대원과 특수공작요원들이 북한지역에서 활동했다. 그 중 일부는 체포되어서도 끝까지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전향을 거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과연 이런 이들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안내자 나아만의 전설적인 스파이 코헨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1967년 골란고원의 전쟁은 이미 이스라엘이 이겨 놓고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폐기된 시리아군 진지와 교통호 밑으로는 멀리 갈릴리 호수 옆에서 넓은 농지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보였다. 그들은 오늘 날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를 위해 과거 코헨과 같은 자랑스러운 조상들이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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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정작촌 농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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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란고원 키브츠내의 사업장 전경

등록일 : 2015-02-10 03:00   |  수정일 : 2015-02-1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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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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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신  ( 2015-02-17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10
적에 심장까지 찾아가는 이스라엘간첩도 있는데 우린 중국변방가서 휴민트랄것도 없는 길거리정보나 얻을려는 3류정보로 국가예산을 축내는 어성꾼수준?..허접합니다 로버트김도 못 구하는 정부가 무슨 국가인가? 민간사찰이나 소리없이 하면되지..
신종태  ( 2015-02-10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3
1967년 중동의 6일전쟁은 6월 5일 시작되어 6월 10일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순간적인 착각으로 필자가 6월 7일을 전쟁개시일로 잘못 기록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윤희철  ( 2015-02-10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17
1987 년도에 나온 영화 Impossible Spy 가 엘리코헨의 스토리를 다룬 영화 입니다. 볼만한 영화 입니다.
안홍범  ( 2015-02-10 )  답글보이기 찬성 : 13 반대 : 17
우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중에...
1965년 신분이 탄로나 그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공개처형 당했다.
1967년 6월7일에 발발한 6일전쟁 전,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한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수시로 타전하였다.
년도 기록에 뭐가 문제가 있지 않는지... 6일전쟁이 일어난 해는 1967년이 맞는데... 그러면 잡혀 죽은 때가...?? 뭐가 맞는지 알려주세요...^^
      답글보이기  이동석  ( 2015-02-10 )  찬성 : 16 반대 : 1
그러게 말입니다. 1965년에 죽은 엘리 코헨이 1967년 6월에 발발한 6일전쟁 전,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한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수시로 타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6일 전쟁은 6월7일이 아니라 6월5일에 일어났습니다.
      답글보이기  신종태  ( 2015-02-10 )  찬성 : 5 반대 : 8
1965년 코헨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 이전에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방어실태에 관한 각종 군사정보를 상세하게 파악하여 이스라엘로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결국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군을 격멸하는데 코헨의 정보제공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이 되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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