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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신종태 교수의 세계 전사적지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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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한국전 참전 경쟁률 10대1이었던 이유는?

군인 700명 국가의 생존전략...힘없는 중립은 무력하다

룩셈부르크군의 총병력은 약 700명이며 그 중 장교는 60여 명이다. 전원 지원제이며 비록 작은 군대이지만 세계 분쟁지역에는 빠짐없이 PKO 요원을 파병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침공시 단 2시간 만에 항복하였다. 많은 청년들이 조국을 탈출하여 연합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며 그들의 사연은 군사박물관에 가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글 | 신종태 육군지상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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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및 EU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룩셈부르크군
 
2시간 만에 독일에 항복한 700명 군대의 나라 룩셈부르크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아르덴느 숲속을 통과하며 북쪽으로 계속 달린다. 급하지 않은 완행열차라 시골 마을마다 기차가 서는 것 같았다. 2시간 후에 도착한 디키르히(Diekirch)역도 너무나 작은 시골역이다. 한적한 마을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도 마을 골목길에서 룩셈부르크 장교 두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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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교통중심 룩셈부르크 중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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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촌락 디키르히(Diekirch) 전경
 
 그들의 말에 의하면 룩셈부르크군의 총병력은 약 700명이며 그 중 장교는 60여 명이란다. 전원 지원제이며 비록 작은 군대이지만 세계 분쟁지역에는 빠짐없이 PKO 요원을 파병한다고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침공시 단 2시간 만에 항복하였단다. 많은 청년들이 조국을 탈출하여 연합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며 그들의 사연은 군사박물관에 가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고 하였다.
 
힘없는 명분상의 중립은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
 
 독일 점령하에서 많은 룩셈부르크 인들이 독일군에 강제 징집되었으며 국내의 유대인들은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 룩셈부르크도 예외 없이 민족을 배반하고 나치에 적극 협력한 부역자들의 처벌로 사회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 후 피에르 베르너라는 걸출한 룩셈부르크 정치가 출현으로 단일 화폐사용을 통한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유능한 정치가 덕분으로 작은 나라 룩셈부르크도 당당하게 EU 국가 대표국 역할을 맡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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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피란가는 룩셈부르크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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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에게 강제 억류당하는 룩셈부르크 유대인
 
 또한 제2차 세계대전 간에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3개국 모두 영국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이들은 약소국의 비애를 톡톡히 맛보기도 했지만 국가 경제발전 장기비전을 서로 협력하여 구상하게 된다. 결국 3개국은 상호관세를 철폐하고 동률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기로 합의하면서 베네룩스(Benelux) 3국을 출범시켰다. 아무런 힘도 갖추지 못한 명목상의 중립은 적국의 침공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다. 결국 베네룩스 3국은 중립정책을 폐기하고 나토(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자신들의 생존을 우방과의 동맹에 의존하게 된다.
 
개인열정과 자원 봉사자들이 만든 룩셈부르크 민간 군사박물관
 
 룩셈부르크의 민간 군사박물관장 로랜드(Roland.J.Gaul)씨는 한국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렬한 친한파였다. 그는 이미 한국을 4번이나 방문하였. 이 곳 박물관은 개인 사재로 설립했으며 각종 장비와 전시물은 외국 단체나 정부로부터 기증받았다. 직원들도 전원 자원봉사자들이며 제2차 세계대전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도움도 많이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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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군사박물관 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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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룩셈부르크 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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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장병의 사진과 약력 전시자료
 
 특히 작은 규모의 전시 공간이지만 한국전에 대해서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한국전 참전용사 80여 명의 사진과 개인 공적사항,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훈장부대수치표창장 등이 빠짐없이 잘 정리되어 있다.
 2차대전시 혹독한 피점령국 국민의 설움을 맛 본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미영 연합군 덕분으로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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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각종 부대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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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군 소대의 한국참전 기록물
 
 그 후 1950,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을 때 미국영국을 포함한 많은 자유진영 국가들이 참전하게 된다. 과거 룩셈부르크가 연합군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다는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이 곳 청년들 사이 전쟁 참여열기가 솟구쳤다. 특히 1개 소대 규모의 소수 전투병력 파병이 결정되었을 시 많은 청년들이 한국전 참전을 지원하였다. 결국 약 10:1의 치열한 경쟁을 물리친 일부 청년들만이 한국에 갈 수 있었다고 박물관장 로랜드씨는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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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룩셈부르크군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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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룩셈부르크군 부사관들

등록일 : 2014-07-03 오후 2:54:00   |  수정일 : 2014-07-0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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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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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  ( 2014-07-03 )  답글보이기 찬성 : 32 반대 : 30
평화는 공짜가 아니라 가장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무형의 자산 입니다. 전교조와 새민련의 처단없이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군은 이승만 대통령께서 세우시고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께서 이끄신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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