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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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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침략 왜군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흔적을 찾아서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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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선봉장이었다. 그는 사카이(堺) 무역상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 -1592)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 시대부터 아즈치 모모 야마 시대에 걸쳐서 이름을 날렸던 사카이(堺) 지역 호상이었다. 부호(富豪)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의 집안은 열렬한 크리스천이었다. 유키나가(行長)의 어머니 ‘막달레나’는 여걸 중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수시로 히데요시(秀吉)의 공문서를 대필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지난 10일 고베(神戶)에서 업무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어 사카이(堺)를 향했다.
 
사카이(堺)를 향해서 달리다
 
고베(神戶)-오사카(大阪)를 거치는 동안 기차를 세 번 갈아타고서 사카이(堺)역에 내렸다. 역(驛) 직원에게 관광 안내소를 물었다.

“여기 관광 안내소가 어디에 있나요?”
 
“없습니다. 이 전화로 물어보시면 답을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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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간이역과 흡사한 사카이역

역원은 ‘안내소는 없고 전화로 알려주는 시스템만 있다’고 했다. 필자가 전화기를 들고서 용감(?)하게 물었다.

“관광 안내소입니까? 혹시, 고니시 류사(小西隆佐)가 살았던 곳이나 가족들의 흔적, 그리고 그들이 무역 거래를 했던 곳을 아시나요?”
“??? 관광 안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외에는 모릅니다만...”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필자는 관광 안내 책자를 집어들고 역에서 나와 우동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서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 역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 동문서답만 했다.
 
‘아! 헛고생이런가. 오래전부터 찾고자 했던 곳인데...’
 
기왕에 택시를 탔기에 관광 안내서에 나와 있는 다인(茶人)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생가터로 방향을 틀었다. 센노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천박한 사람으로 결론내린 실존 인물이다.
“센노리큐 생가터로 갑시다.”
“오케이. 좋습니다.”
신이 난 운전사는 ‘요미우리 신문사 오사카 지사 사회부 전속 운전사였다’면서 으스댔다.
‘신문사 물을 먹었단 말이렷다?’
 
대로변에 서있는 고니시의 흔적
 
택시 운전사는 20분 쯤 달리더니 센노리큐의 생가 터 앞에서 차를 세웠다. 필자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묻자 ‘고니시 유기나가의 흔적이 시내에 있다’고 했다. 운전사는 열심히 커닝을 하더니 “아! 저도 알 수 있습니다”하면서 씽긋 웃었다.
 
운전사는 할아버지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서 거리를 몇 바퀴 돌더니 큰 길 옆에 차를 세웠다.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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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의 고니시 유키나가 집터

그곳에는 외로운 표지석 하나와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안내판에 쓰여 있는 글을 요약해서 옮겨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58년 약재상인 고니시 류사의 차남으로 났고, 이곳(宿屋町 北寄)에 저택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아우구스치노.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서 전공을 세운 결과, 1588년 우도의 14만 6천석의 영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목표로 한 전쟁(임진왜란)에서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함께 군대를 인솔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키나가’는 평화 교섭 업무를 담당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 편에 서서 싸웠으나,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해서 교토에서 참수 당했다.>
 
그렇다. 교토에서 태어나 사카이에서 자란 유키나가(行長)- 태어난 곳에서 참수당한 것도 고약한 운명이로다. 필자는 안내판과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고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제 역사와 소설 속으로

<자치와 자유의 도시 사카이에서는 항상 신흥 세력이 대두했다. 예수교 강당을 설립한 히비야 료케이, 조선과의 상거래로 성장한 약종(藥種) 업자 고니시 일가, 도요고(豊後)나 사가미(相模)에 넓은 상권을 연 덴노지야 쓰다 일족 등이 그랬다,>

“진영 막사 앞에 상인이 와서 나으리를 뵙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여드리면 아실 것이라고 합니다만...”

시종이 내놓은 것은 은으로 된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되어 있는 나무 표찰, 오와리 고오리 마을의 이코마 저택에서 쓰이던 예금표였다.

“그들은 고니시라고 하는 약장사 부부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서른이 넘은 남자에 스물예닐곱 정도의 부인, 그리고 열 살 정도의 남자 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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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오다'의 모습을을 그린 포스터
“당장 들여보내라.”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부인께서는 글씨도 잘 쓰시지만 조선이나 남만(南蠻)의 말도 하실 수 있다고 했지요?”
“예. 이 아이에게도 조선 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니시 부인은 옆에 있는 열 살 가량의 남자 아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사시키며 대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모의 소개로 이렇게 히데요시를 만났던 것이다. 1565년 8월 초의 일이다.

어머니로부터 조선 말을 배운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1593년 1월 평양성을 후퇴하면서 길에서 울고 있는 여자 아이(3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양녀로 키웠다. 아이는 양 할머니로부터 신앙심을 배웠고, 약재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이름은 '줄리아 오다.'

'줄리아 오다'는 지금도 일본에서 성녀(聖女)로 추앙받고 있다. 필자가 사카이에 간 것은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표지석 하나로 결론이 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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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인 오사카 성

필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흔적(표지석)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조선의 원수’로 일컫는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오사카 성(城)으로 이동했다. 오사카 성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 속에 던져버린 듯 아름다운 단풍에 둘러싸여 있었다. 순간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의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이 천지의 경계에는 확고부동하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것을 남김없이 모두 만끽하는 지복은 결코 히데요시 같은 어리석은 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등록일 : 2017-12-20 09:53   |  수정일 : 2017-12-2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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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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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21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3
정말 재미있습니다
문성배  ( 2017-12-20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0
유익한 정 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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