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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누이였고 누군가의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배우 한지민

글 | 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사진제공 | BH엔터테인먼트 2019-07-29 10:56

2017년 무렵이었다. 한창 시사회를 다니던 중에, 뜻밖의 영화에서 한지민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멈칫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 번 포스터와 팸플릿을 열어봐도 거기에 한지민의 얼굴은 없었다. 영화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주 잠시, 이병헌과 박정민이 주연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한지민은 한쪽 다리를 잃은 피아니스트 역으로 등장했다.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진태 역의 박정민과 피아노 협연 장면을 위해 그는 연주곡을 몽땅 외워 왔다고 했다.

영화 〈허스토리〉에서는 거의 등과 목소리만 등장한다. 극중 김희애 딸의 담임선생님 역으로 출연한 그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학교에 모셔 이야기를 듣는 교사로 나왔다. 그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어려운 이 한 장면을 위해 한지민은 부산 사투리를 연습하고, 인물의 전사(前史)까지 만들었다.
 
이후 작품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짧은 단편 영화 〈두개의 빛 : 릴루미노〉, 역할은 시각장애인 수영이었다. 한지민은 이 작은 영화에서 시각장애인의 초점 없는 눈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개의 안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보내는 큰 연기를 해냈다. 당시 그를 소개하는 말은 ‘특별출연’ 혹은 ‘우정출연’이었다.

한지민의 연기는 한 번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보는 사람의 마음은 다소 착잡했다. 한 작품의 주연을 해도 모자람이 없는 배우가 어떤 작품에 ‘우정으로’ ‘특별히’ 출연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건 애석한 일이다. 2010년대는 여성 배우들의 입지가 좁아진 엄혹한 날들이었지만, 그 최전방에 한지민이 서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20대, 찬란한 날을 보내던 여배우가 30대에 설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 보게 된 것 같아서. 그럼에도 스크린에 걸어 나왔다가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란 듯이 씩씩해서.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한지민 연기 인생의 2막을 연 영화 〈미쓰백〉.
나중에 들어보니, 한지민이 그 작품들을 선택한 이유는 심플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연기를 정말 잘하는 이병헌 선배와 눈 마주치고 연기를 해보고 싶어서”,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출연했다. 〈두개의 빛 :릴루미노〉 시사회에서 한지민은 “영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저시력자에게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했다”고 말했다.

영화가 큰가 작은가, 배역의 등장이 긴가 짧은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다양한 기회를 얻길 원했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찾아갔다. 같은 맥락에서 〈미쓰백〉이 찾아왔다. 〈미쓰백〉을 쓰고 만든 이지원 감독에게 누군가 주인공으로 한지민을 추천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누구? 됐어~”였다고 한다. 그렇게 한지민이 후보군에서 사라졌을 때 두 사람은 영화 〈밀정〉 뒤풀이에서 마주쳤다. 검은 티에 검은 바지를 입고 클러치백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온 한지민을 보고 이지원 감독은 주인공 ‘백상아’를 떠올렸다. 충무로를 돌고 돌아 그를 찾아온 〈미쓰백〉의 책을 받고, 한지민은 바로 “하겠다”고 했다. 변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가 아니라, 꼭 만들어져야 하는 영화일 것 같아서. 학대받는 소녀 지은이는 자라서 버려진 어른인 상아가 될 텐데, 지은이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상아밖에 없는 게 너무 마음 아파서. “이제 우리가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키우면 투자하겠다” “영화 제목을 바꾸면 투자하겠다” 등의 난항을 거쳐 영화가 제작됐지만, 문제는 배급이었다. 찍은 지 1년이 넘도록 배급사를 찾지 못하는 동안 한지민은 자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주연을 맡았다면 〈미쓰백〉의 처지가 좀 더 나았을까”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2018년 10월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한지민은 그해 런던동아시아영화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올해 열린 백상예술대상도 그를 여우주연상으로 호명했다.

“이 상의 무게를 무겁게 견디지 않고 연기하면서 안주하거나 주저하게 되는 순간 용기를 삼아, 도전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한지민의 수상 소감이었다. 그가 수상자로 호명돼 소감을 말하는 동안 연신 눈물을 훔친 건 〈미쓰백〉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배우 김혜수는 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앞으로 너에게 펼쳐질 길이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지금처럼 한 걸음씩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그 즈음에도 한지민의 행보는 다르지 않았다. 김혜수가 주연한 〈국가부도의 날〉의 마지막, 짧은 에필로그에 한지민이 등장했다. 그리고 올해도 아흔넷의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여정을 담은 영화 〈김복동〉에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데뷔 후 한지민에게는 줄곧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잡지나 CF를 통해 우리 곁에 당도한 스타들이 그러하듯, 그의 존재는 주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그래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풍겼다. 한지민에게 주어진 역할도 그랬다. 드라마는 어느 정도 판타지를 바탕으로 하는 장르이기에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비현실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었고, 그런 모습은 그와 썩 잘 어울렸다. 2003년 드라마 〈올인〉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그의 필모 역시 동시대 톱스타 배우들과 다르지 않게 꾸려졌다. 2012년 〈옥탑방 왕세자〉나 2015년 〈하이드 지킬, 나〉도 그랬다. 박유천, 현빈 등 당대의 가장 핫한 남자 배우와 함께 가장 트렌디한 드라마를 찍었다.

그 후 한지민에게는 약 3년간의 드라마 공백이 있었다. 그 시기는 또한 한지민이 특별출연, 우정출연의 이름으로 영화에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대동소이하다는 걸 안 한지민은 모험을 시작한다. 더구나 당시 한지민에게는 ‘천사 이미지’가 있었다. 착하고 예쁜 드라마 주인공 이미지에 더해 평소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완벽한 판타지가 생겼다. 명동 거리에서 오지의 아이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펼치는 모습이나, 실제 오지를 찾아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부대끼는 모습 등은 미담으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은 사실이지만 당사자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미쓰백〉 이후 인터뷰에서 한지민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 스스로도 계속 비슷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요. 드라마가 달라지고 인물이 달라져도 연기하는 저는 같은 사람이니까요.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더구나 보는 분들이 저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도 부담스러웠고요. 한번은 스튜디오 촬영을 갔는데 제가 낯을 좀 가려서 조용히 있으니까 ‘한지민 씨, 좋은 얘기 많이 들었는데 실제는 다르네요’ 하시더라고요.”

판타지에 판타지가 입혀져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 한지민은 스스로 땅으로 내려오고 싶었다. 아름다운 외모도, 좋은 이미지도 벽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노희경 작가와 함께해온 문화예술인 수행 단체 ‘길벗’ 활동, 그를 통해 알게 된 법륜 스님의 강좌 등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발이 땅에 닿은 느낌

지난 7월 종영한 mbc 드라마 〈봄밤〉.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넘어오고자 했던 그의 자맥질이 기어이 그를 현실에 데려다놓았다. 〈미쓰백〉은 그 빙산의 가장 높이 솟아오른 일각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신기할 정도로 다른 세계가 열렸다.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도 한지민의 다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육아에 찌들어 목이 늘어난 잠옷을 입고 남편에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30대 여성이라는 것도(드라마 〈아는 와이프〉), 40여 년의 시간 여행을 소화하며 김혜자와 한 인물로 보일 수 있는 배우라는 것도(드라마 〈눈이 부시게〉)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제 드라마에서 그가 보여주는 인물은 판타지 속에 살지 않는다. 지금, 여기, 통속적이고 범박한 현실 안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다.

초여름에 접어들며 한지민은 드라마 〈봄밤〉을 끝냈다. 〈봄밤〉은 판타지와 현실이 뒤섞인 작품이다. 한지민과 정해인의 로맨스는 드라마 시작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한지민이 맡은 이정인은 예쁘고 똑똑하지만,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적인 면도 있어 욕먹기 쉬운 인물이었다. 그는 드라마 속에서 오랜 연인을 배신하고, 새 연인과 만나는 중에도 여러 번 흔들린다. 그의 마음은 일관되지 않고, 친구들도 그에게 “딱 나쁜 년 소리 듣기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래서 현실적이다. 우리 현실의 연애가 어찌 그리 정정당당하고 불편부당한가. 인간사의 오욕 칠정을 다 거치고 나면 서로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고 진짜 연애가 시작된다. 극 중 정인의 동생 재인의 말처럼 “서로의 밑바닥을 다 봐야 끝나는 게 연애”다. 한지민은 몸을 사리지 않고 밑바닥을 헤집는다. 이제 한지민이 연기하는 인물은 발이 땅에 닿다 못해 그 땅을 파고 들어간다. 이제는 그가 동시대를 사는 동년배 친구로 보인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고 열두 살 어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도 여전히 퍽 잘 어울릴 테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하늘 저 멀리에 떠 있는 스타로 존재하지 않는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대사처럼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누이였고, 누군가의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인물을 눈이 부시게 살아낸다. 〈밀정〉과 〈미쓰백〉에서 담배 피우는 연기를 하느라 쉬어진 채로 굳어진 그의 목소리도, 낭랑하기만 했던 예전과는 다른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가 그 목소리로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이해인 수녀의 〈우리 모두 초록빛 평화가 되게 하소서〉를 낭독했을 때 ‘몸으로 죽었으나 혼으로 살아 있는 님들’을 떠올리며 몇몇은 눈을 감고, 몇몇은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그의 목소리는 죽은 자, 산 자 모두와 공명했다. 5분여 남짓한 그 시를 거의 외워 온 한지민은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늘 우리 곁에 함께 계셔주십시오”라며 낭송을 마쳤다.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 그 스타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리에서 제 발로 걸어 내려와 땅에 발을 붙이고 함께 호흡하기는 더욱 어렵다. 한지민은 지금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꽃길도, 가시밭길도 한 걸음씩 걸어온 그가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늘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예감이 드는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등록일 : 2019-07-29 10:56   |  수정일 : 2019-07-2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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