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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요람, 아테네를 가다

⊙ ‘神들의 재판’이 열렸던 아레오파고스 언덕… ‘언론의 자유’ 주장한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로 이어져
⊙ 국회의사당 앞에 무명용사의 묘, 신타그마(헌법) 광장 배치… 무명용사의 묘에는 한국전 참전기념 銅版도 있어
⊙ 시민들의 삶의 터전 아고라, ‘인류 최초의 의회’ 프닉스 언덕
⊙ 소크라테스, 몰락기의 아테네 시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다가 죽음 맞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9-07-10 00:44

▲ 필리파포스 언덕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전경.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게 아니다. 아테네 도착 첫날 밤, 호텔 옥상에서 보았을 때, 아크로폴리스는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듯했다. 호텔에서 나와 10여 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기념품점과 성구점(聖具店), 예쁜 카페들이 이어지는 좁은 골목들을 지나 리시크라테스기념비(BC 344년의 디오니소스제 경기에서 리시크라테스 합창단의 우승을 기념해 세운 비)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아크로폴리스에 다 온 기분이었다. 아크로폴리스가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었으니까…. ‘아크로폴리스’라고 적힌 작은 간판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까지 찍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가 안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이 이렇게 좁고, 걸핏하면 막다른 골목길로 이어질 리가 없다. 마주치는 사람을 붙잡고 아크로폴리스 가는 길을 물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불쌍한 관광객들이었으니까….
 
  한참 만에야 ‘귀한 현지인’을 만나 길을 물어보았다. “이 길이 아니고, 이 앞에 조금 큰 길로 나가서 10분 정도 가야 아크로폴리스 매표소가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람이 많을 테니 10분 정도 더 가서 그곳에 있는 매표소에 가면 입구가 한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호텔을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매표소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길만 제대로 찾았으면 호텔에서 15분이면 올 수 있는 길이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아레오파고스 언덕. 고대 그리스의 원로원이자 재판정이었던 곳이다.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위 언덕에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안내판을 보니, 아! 아레오파고스 언덕이다. ‘전쟁의 신(神)’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미끄럽고 우둘투둘한 언덕을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아테네 시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들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기 딸을 겁탈하려 한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한 죄로 포세이돈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올림포스 12신의 재판 결과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신들조차 법 앞에 평등하며,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의 대상이 된다는 발상이 상쾌하다.
  
이후 오랫동안 이 언덕은 귀족들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이자 재판정으로 기능했다. 로마로 치면 ‘원로원(元老院)’이 있던 곳이라고 할까? 《아테네의 변명》의 저자 베터니 휴즈는 “아레오파고스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인간에 불과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신처럼 고귀하게 여겨졌다”고 했다. 후일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민회(民會)의 힘이 커지면서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약화됐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대법원’을 ‘아레오파고스’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이곳은 각별한 울림을 주는 곳이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언론의 자유를 역설한 《아레오파지티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 제목이 바로 이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
  
프로필라이아 문을 통해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섰다.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인류 문명의 요람에 내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득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불리던 노래가 생각났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끌려가던 학우를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학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군가 ‘전선을 간다’를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기)한 노래였다. 그 시절 서울대를 비롯해 학내(學內) 광장을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던 대학이 여럿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원래 신들에게 봉헌된 땅이었지만, 그때 한국의 지식인・학생들에게 아크로폴리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문명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원래 아크로폴리스에는 목조(木造) 신전들이 있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침공해 왔을 때 불타버린 것을 기원전 449년 페리클레스의 발의로 석조 건물로 재건되기 시작했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처녀신 아테네의 신전’이라는 의미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된 후인 6세기부터는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교회가 됐다가 오스만튀르크 지배 아래서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1687년 베네치아-튀르크전쟁 당시에는 화약고로 쓰였는데,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크로폴리스 곳곳에서는 지금도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덩어리로 되살리고, 그걸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아 집어넣는 작업이겠다.
  
흐린 하늘 아래 파란색과 흰 줄이 그려진 그리스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잘난 조상들 덕분에 후손들이 먹고사는 나라’의 깃발이다. 이 국기 게양대에서 그리스 국기가 내려진 적도 있었다.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침공했을 때다.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국기 게양대를 지키던 그리스 근위병 콘스탄티누스 코우키디스에게 그리스 국기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코우키디스는 국기를 내린 후 국기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문득 ‘지금 대한민국 군인 가운데 그만한 결기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 아테네 니케의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 걸음을 떼기가 아깝다.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숨결이 느껴졌다. 수풀 사이로 뒹구는 돌 한 조각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 고졸(古拙)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유적이 눈에 들어왔다. 수천 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바닥과 부서진 대리석 기둥들 위에 새로 대리석 벽체와 기둥을 올린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아!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기 전에 친구 크리톤에게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절대 잊지 말고 갚게나”라고 했다는, 그 아스클레피오스 신이다. 베터니 휴즈의 《아테네의 변명》에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복원하고 있다는 얘기를 읽었는데, 이게 그 복원 작업의 산물인 모양이다. 그런데 영 어색하다.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노란색을 띠게 된 대리석 폐허 위에 새로 올린 흰색 대리석의 벽체와 기둥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걸 ‘복원’이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만약 파르테논이나 에레크테이온 신전도 이런 식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새 벽체를 세우고 지붕을 얹는다면? 차라리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데는 더 낫지 않을까?
  
  
멜리나 메르쿠리
 
배우이자 민주투사인 멜리나 메르쿠리의 흉상.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옥상 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박물관 관람을 하지 않아도 데스크에 얘기를 하면 옥상에 있는 식당만 이용할 수 있는 무료 티켓을 내준다. 음식이 특별히 맛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크로폴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음식값이 아깝지 않은 식당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서 나와 지하철 아크로폴리스 역 앞에서 한 여인의 흉상을 만났다. 어딘지 도도해 보이는 얼굴….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올드팬들에게는 향수(鄕愁) 어린 이름이다.
  
열렬한 사회주의자 메르쿠리는 1970년대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이기도 했다. 1980년 민주화 이후에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정권 아래서 두 차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영국이 가져간 고대(古代) 그리스 문화유산의 반환을 요구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대학 시절 메르쿠리가 쓴 《이 더러운 대령놈들》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제목에서 보듯 그리스 군사정권을 호되게 비난하는 책이었다.
  
민주주의의 요람인 그리스가 현대에 들어와 군사정권이라는 암울한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했던 기간은 100년 남짓하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중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는 민주개혁을 시작한 것이 기원전 508년의 일이다.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거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해 스파르타에 무조건 항복하고 민주정을 폐기한 것이 기원전 402년이다. 이후 아테네는 독재과두정(獨裁寡頭政)이 들어섰다가 다시 민주정으로 복귀했지만, 이때는 이미 민주주의의 건강함을 잃어버린 중우(衆愚)정치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 후 알렉산더 및 마케도니아왕국의 전제(專制)왕정, 로마제국 및 비잔틴제국의 제정(帝政), 오스만튀르크의 지배, 왕정(王政), 불안한 입헌군주정, 나치 독일의 점령, 공산주의자들과의 내전(內戰),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가 회복된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였다. 오늘날 그리스의 정식 국명(國名)은 ‘엘레니카 디모크라티아’ ‘그리스 민주국’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그리스가 포퓰리즘으로 골병이 들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요람이면서도 그리스가 걸어온 험난한 여정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로마의 아테네 지배를 상징한다.
멜리나 메르쿠리의 흉상이 있는 곳에서 길을 건너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터가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설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신전을 완성한 것은 2세기 로마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신전 앞에는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이 서 있다. 개선문 북쪽에는 ‘이곳은 아테네, 테세우스의 고대 도시이다’라고 써 있지만, 반대쪽에는 ‘이곳은 테세우스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라고 써 있다고 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상당 시간을 제국의 영토를 순행(巡幸)하면서 보냈는데, 그 흔적인 셈이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모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내가 하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통해서였다. 제국의 황제라는 중임(重任)을 다하기 위해 평생 처절하게 고민하면서 살았던 사내가 말년에 자신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된 이 소설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을 이렇게 비교한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이고, 정돈되고, 그리고 멍청한 모든 것은 바로 이 그리스 교육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로마의 약간 묵직한 심각성, 연속성에 대한 감각, 구체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그리스에서의 정신의 훌륭한 면모며 영혼의 분출로 남아 있는 것을 현실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필요했었다고 나는 생각할 때가 있다. 플라톤은 《공화국》을 써서 정의의 사상을 찬양했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서, 국가를 인간에게 보조하는 데 적절하고 인간들을 가능한 한 덜 부스러트리는 기계로 만들도록 힘겹게 노력해왔던 것이다. 박애라는 말은 그리스어다만, 노예의 비천한 상황을 개선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법학자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와 나다. 총론적인 관점들의 대담성을 수정하면서 각론에의 적용, 근면, 예견은 내가 로마에서 배운 미덕들이었다.”
  
  
국립정원
  
이곳에서 국립정원을 향해 길을 건너면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는 동상이다. 아마도 구(舊)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북(北)마케도니아공화국과 ‘국명’ 및 ‘알렉산더 대왕’의 소유권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이 알렉산더 대왕 동상보다 더 유서 깊은 것이 인근에 있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기념상이다. 그리스독립전쟁에 투신했다가 1824년 병사(病死)한 그를 기려 1895년 건립한 것이다. 일세를 풍미했던 시인의 낭만적인 자기희생은 대영제국의 여론을 움직였고, 그리스가 오스만튀르크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고마운 것은 고맙다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에는 바이런의 동상이 있고, 체코 프라하에는 자기들의 독립을 도와준 우드로 윌슨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서울에 평생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미국인 호머 허버트나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6・25전쟁 시 미군을 파병해 망국의 위기에서 구해준 해리 트루먼의 동상 또는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가? 대한민국의 독립은 잘난 우리 민족 스스로의 가열한 투쟁의 결과라고만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위선인가?
  
1821~1829년 독립전쟁의 결과 그리스는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그리스 독립을 지원했던 열강(列强)은 아예 국왕까지 선물해주었다. 바이에른의 왕자 오토가 독립 그리스의 초대(初代) 국왕으로 즉위했다. 유럽에서 작은 나라가 새로 생기면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국왕을 수입해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이 간 나라는 제대로 된 왕궁도, 기반시설도 부족한 지지리도 가난한 나라인 경우가 많았다. 새로 들어선 왕실은 자신의 신민(臣民)들에게 ‘문명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국왕 오토의 아내 아말리아는 옛날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이 있던 자리 인근에 아름답고 울창한 정원을 하나 만들었다. 그게 ‘국립정원’이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커다란 정원이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곳곳에서 관광객들이나 시민들이 봄의 양광(陽光)을 즐기고 있었다. 다소 관리가 덜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재정난 탓일까? 
  
  
국회의사당 앞 무명용사의 묘
 
아테네 대성당의 미사 모습.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인들의 구심점이었다.
국립정원에서 피톤치드가 주는 상쾌함을 느끼며 걷다 보면 국회의사당으로 이어진다. ‘정치는 상징(象徵)’이라는 말이 아테네에 오면 실감이 난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근대 정치의 상징들이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 옆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1864~1936)의 동상이 서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1910~1930년대에 수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정치・사회 개혁을 주도하고, 군비를 확장해 영토를 넓힌 정치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가담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전후(戰後)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붕괴하는 와중에 고대 그리스의 영역이었던 소아시아를 탈환하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참패한 것은 실책(失策)이었다. 그리스와 터키는 지금도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베니젤로스는 국내 정치적으로는 국왕과 갈등을 빚으면서 국론(國論)을 분열시켰고, 나중에는 헌정(憲政)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배후조종하기도 했다.
  
이렇듯 베니젤로스는 과(過)도 적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를 ‘현대 그리스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동상을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놓았다. 아테네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따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이다. 과보다 공을 더 높게 보는 그 넉넉함이 부럽다.
 
신타그마 광장 앞 무명용사의 묘를 지키는 근위병. 아테네의 상징 중 하나다.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국회의사당 앞에 무명용사(無名勇士)의 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무명용사의 묘는 에브조네스(Evzones)라고 하는 대통령 근위병들이 지킨다. 붉은색 모자, 흰색 치마에 방울이 달린 가죽 구두를 신은 이들의 모습은 아테네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의 복장은 오스만튀르크 시절 독립투쟁을 벌인 민병대원들의 복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치마의 주름은 모두 400개로, 오스만튀르크 치하 400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한다.
  
근위병들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이 날아와 옆 초소를 불태워도 상관의 이동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아크로폴리스의 국기 게양대에서 국기를 내린 후 자결한 콘스탄티누스 코우키디스도 에브조네스 소속이었다.
  
매 시간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은 아테네의 명물이다. 고작 세 명의 병사가 장교의 인솔을 받으며 들어오는데도 지축이 울린다. 근위병들이 신는 송아지 가죽 구두에는 60여 개의 쇠징이 박혀 있는데, 무게는 3.5kg이나 된다고 한다.
  
  
신타그마 광장
 
무명용사의 묘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 銅版.
무명용사의 묘 벽면에는 그리스가 참전했던 전쟁을 기념하는 동판(銅版)들이 붙어 있다. 한국전 참전 기념 동판도 있다. 6·25 발발 후인 1950년 11월, 그리스는 1개 대대 849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미군에 배속되어 1950년 12월~1951년 2월 원주전투 등에서 용명을 떨쳤다. 한때 한국에 파병된 그리스군은 2000명을 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신타그마 광장이 있다. ‘신타그마’는 ‘헌법’이라는 뜻이다. 신타그마 광장은 아테네 시내의 중심이자, 아테네 여행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결국 그리스 국회의원들은 신타그마 광장을 보며 ‘헌법’을 생각하고, 의사당 입구 무명용사의 묘와 근위병들을 보면서 나라 잃었던 아픔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무명용사들의 헌신을 상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 상징을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하면 뭐하나? 그 국회의사당 안에서 민주화 시대 이후의 정치인들은 포퓰리즘 경쟁 끝에 나라를 파탄 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무덤’
 
로만 아고라에 있는 ‘바람의 집’(왼쪽).
‘소크라테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천체관측소다.
아크로폴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해낸 고대 그리스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실제 시민들의 삶이 이루어진 곳은 아고라였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의 인터넷 토론장 ‘아고라’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아테네 시내에는 아고라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두 곳 있다. 하나는 로만 아고라, 다른 하나는 아테네의 아고라다.
  
로만 아고라는 글자 그대로 로마 지배를 받던 시기의 유적이다. 로만 아고라에는 ‘소크라테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8각형의 특이한 건물이 있다. ‘바람의 탑’이라고도 하는 이 건물은 실은 기원전 1세기 마케도니아 출신 천문학자 안드로니코스가 지은 일종의 천문관측소다. 내부에는 물시계를 보관하게 되어 있고, 외부는 해시계, 상층부는 풍향계 기능을 하게 되어 있다.
  
천문관측소가 소크라테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것은 뜬금없지만, 베터니 휴즈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던 소크라테스에게 이곳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그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로만 아고라는 하드리아누스의 도서관과 인접해 있다. 도서관이라고 하지만, 로마에서 보았던 포룸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정말 이곳에 도서관이 있었을까?’ ‘책은 어떤 형태로 얼마나 소장되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모나스트라키 광장
  
하드리아누스의 도서관 앞은 모나스트라키 광장이다. 아테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자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곳에 있는 옛 모스크(이슬람사원) 건물은 이제는 작은 전시공간이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키블라[이슬람 성지인 메카가 있는 방향을 표시하는 벽감(壁龕)] 흔적이 이곳이 옛날 모스크였음을 보여준다. 전시하고 있는 그림들은 그리스나 에게해의 풍광을 배경으로 한 극사실주의풍의 현대 회화들이었다. 그림 속 소년 소녀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서로 키스를 하거나 노래하고 춤을 출 것만 같다.
  
모나스트라키 광장 인근 시장 골목에서는 일요일마다 벼룩시장이 열린다. 해외여행에서 벼룩시장을 찾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 벼룩시장을 찾았다.
  
앙증맞은 도기 인형, 옛날 군장(軍裝)과 사진, 출처를 알 수 없는(아마도 십중팔구 중국일 듯한) 조잡한 조각상들…. 그중에는 갓 쓰고 도포 입고 장죽을 입에 문 조선시대 양반과 한복 차림의 아낙네의 목상(木像)도 있다. 인사동이나 국내 관광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도 그와 똑같은 목상이 있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저 물건은 어쩌다가 이 이역만리 벼룩시장까지 흘러오게 된 것일까?
  
  
그리스의 투표용구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의 메인 스트리트였다. 시장과 신전, 정부청사, 감옥 등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아테네 아고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은 아탈로스의 ‘스토아(stoa)’다. 흰색 대리석 기둥에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2층 건물이다. 스토아는 ‘주랑(柱廊・콜로네이드)’이라는 의미다. 스토아는 대개 일종의 상가(商街) 건물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절, 열주(列柱・줄기둥)가 늘어선 이 스토아에서 자기의 철학을 대중에게 설파하던 일군(一群)의 학자들이 있었다. ‘스토아학파’가 바로 그들이다. 이 건물을 보니 말로만 듣던 스토아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렇게 완벽하게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는 게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고대 아테네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복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 1층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물건들을 전시하는 아고라박물관이 있다. 그림이 그려진 채색 도기, 조각상, 무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편(陶片)과 투표용 도기(陶器)였다. 아테네인들은 민주 정체를 도입한 후 참주(僭主・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도기 조각에 장차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적게 해서 다수(多數) 이름이 나온 사람을 10년간 국외 추방했다. 나름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제도는 민중을 선동해 정적(政敵)을 축출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낙일(落日)을 앞두고 아테네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킬링필드에 비하면 훨씬 나은 해법(解法)이었는지도 모른다.
  
투표용 도기도 흥미로웠다. 캐스터네츠처럼 생긴 도기인데, 겉으로 보기에 모양은 똑같지만 속이 빈 것과 찬 것이 있다. 하나는 찬성, 다른 하나는 반대였다. 속이 빈 것과 찬 것을 집계해 찬반을 헤아렸다. 아테네식 비밀투표였던 셈이다.
  
아고라박물관에서 클레로테리온을 만난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배심원을 비롯한 공직자들을 선발했는데, 클레로테리온은 그 추첨에 사용하는 기구였다.
  
1층 주랑을 돌아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흉상이었다.
  
  
아고라
 
아테네 아고라의 중심인 헤파이스토스 신전. 앞은 아폴로 신전의 유적이다.
스토아를 나와 헤파이스토스 신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아테네 아고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주춧돌이나 돌기둥들만 남은 폐허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다른 한편으로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보였다.
  
그냥 볼 때는 그게 그것 같아 보이지만, 친절하게 서 있는 표지판들이 지금은 돌무더기로 남은 자리가 옛날에는 아폴로나 제우스의 신전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던 종교법정인 스토아 바실레이오스가 있던 자리를 찾아본다. 베터니 휴즈의 책에는 제우스 엘레우테리우스 신전 옆에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울타리 밖 지하철 철로 옆에 보이는 유적이 아닌가 싶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은 드물게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볼 때에는 ‘옛 그리스 양식을 본떠 만든 근현대 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에서 내려오면 문서보관소였던 메트룬, 평의원들의 집무실이었던 톨로스와 그들의 회의장이었던 불레우테리온, 최고통치자였던 장군(스트라테고스)의 집무실이던 스트라테게이온 터가 이어진다. 그리스인들은 임기 1년의 스트라테고스를 10명 뽑아 국가와 군대를 맡겼다. 영어 ‘전략(strategy)’이라는 말은 바로 스트라테고스에서 나온 것이다.
 
나무 아래 국립 감옥터라는 표석이 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 수감됐었을 것이다.
톨로스 맞은편에는 흥미로운 표석이 하나 서 있다. ‘구두장이 시몬의 집’이라는 표지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600년 후에 나온 철학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가르침・격언》에 의하면 ‘구두장이 시몬’은 아고라 변두리의 한 공방 주인으로 열성적인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 이곳에서 못이 널려 있는 공방 터가 발굴됐는데, 바닥에서 대문자로 ‘시몬’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기원전 5세기 중반의 잔 조각이 출토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중반이면 바로 소크라테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이다. 이곳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말한 ‘구두장이 시몬의 집’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아고라의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구두장이 시몬의 집’은 스트라테게이온이나 톨로스와는 걸어서 2분 거리도 안 된다. 아테네의 정부 지도자들은 시민들과 괴리된 곳에 지은 으리으리한 정부청사가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사는 거리에서 집무했다는 얘기다.
  
‘구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2분 거리 정도에 국립감옥 터가 있다. 노란 꽃이 핀 나무 아래에는 ‘국립감옥’이라고 하는 표지석이 있다.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프닉스 언덕 근처에 ‘소크라테스의 감옥’으로 전해지는 동굴이 있지만, 민간전승일 뿐이다. 아테네 국가의 공식 감옥은 이곳이었다.
  
  
‘백의 얼굴을 한 악당’
  
내가 아테네에 온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테미스토클레스도 있고,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도 있지만, 내가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내가 이해하는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기생(寄生)하는 악성 종양인 중우(衆愚)정치, 포퓰리즘에 맞서 싸우던 사람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이나 시민운동가는 아니었다. 보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기는 했지만, 공직을 맡은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기원전 408년 아르기누사이 해전(海戰)에서 승전하고도 당시 조난당한 승조원들을 제대로 구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6명의 장군(스트라테고스)에 대한 재판을 위한 청문회의 1일 의장을 맡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개별적 책임이 아니라 집단적 책임을 묻는 것은 아테네의 법체제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난 군중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겠다고 소리쳤지만 소크라테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열린 재판에서 선동가들은 조난사고의 생존자들을 앞세워 대중을 선동했고, 6명의 장군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국가의 동량인 최고지도자 6명-그것도 해전에서 승리한-을 자기들 손으로 잡아 죽인 이 재판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니 중우정치가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동료 시민들에게 인간으로, 시민으로서의 덕성(德性)을 갖추라는 촉구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자유’는 덕성을 가진 개별 시민들의 자유였다.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이 상정하는 자유는 ‘헬라스인’의 ‘집단적인 자유’였다.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니?”라고 물어대는 이 못생긴 철학자는 당시 아테네인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이미 기원전 423년에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아주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뱀장어처럼 알 수 없고, 교묘하게, 거드름 피우는 악한, 백의 얼굴을 가진 악당, 교활하고, 견딜 수 없는 게걸들린 놈.”
  
공개 상연된 연극에서 특정인을 이렇게 표현했다면, 명예훼손도 이만저만한 명예훼손이 아니다.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
  
소크라테스의 중・장년 시절에는 그래도 아테네에 그의 귀찮은 말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년에 들어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리스 세계의 패자(覇者)였던 아테네는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했다. 해군을 해체하고, 아테네와 피레우스항(港)을 연결하는 도로를 방어하는 장벽을 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자랑이었던 민주정이 폐기됐다. 대신 스파르타의 후원을 받는 ‘30인 참주정’이라는 과두정이 들어섰다. 이들은 적폐(積弊)청산에 나섰다. 1년 동안 1000~1500명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됐다. 당시 아테네 인구가 6만명 남짓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에 대입시키면 83만5000명~125만명이 죽은 셈이다.
  
공교롭게도 크리스티아스를 비롯한 참주정의 요인 가운데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다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참주정에 반대했지만, 아테네 민주정의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소크라테스를 민주정의 반대자로 여길 수도 있었다.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아테네 시민들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귀찮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기원전 399년 ‘신에 대한 불경(不敬)’ ‘청소년 타락’이라는 혐의로 기소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답잖은 비판을 듣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재판정에서 변론을 생각해주어야 하지 않나?”라고 묻는 친구 헤르모게네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 있게 말했다.
  
“부당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거야말로 최고의 변론 아닌가?”
  
그러자 헤르모게네스가 말했다.
  
“부당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연설 한 번에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얼마나 많이 받는지 아나?”
  
흔히 소크라테스는 “악법(惡法)도 법이다”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이른바 민주화를 주장하던 지식인들 -자기들이 악법에 맞서 싸운다고 믿던- 가운데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열심히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처럼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탈옥을 권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도주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국법(國法)과 국가공동체가 다가와 우리를 막아서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가정하세.
  
‘소크라테스, 말해보게. 그대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런 일을 기도함으로써 그대는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즉 국법과 국가 전체를 파괴할 작정인가? 아니면 그대는 국가의 법정에서 선고된 판결이 아무 효력도 갖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훼손된다면, 그런 국가가 전복되지 않고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소크라테스의 가정 속에서 국법과 국가공동체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불의(不義)를 불의로, 악행을 악행으로 앙갚음한 뒤 우리와의 합의사항과 계약조건들을 어기고 그대가 가장 해쳐서는 안 될 그대 자신과 그대들의 친구들과 조국과 우리 국법을 해치고 나서 그렇게 수치스럽게 떠난다면,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그대에게 분개할 것이고, 저승에서는 우리 형제들인 저승의 국법이 그대가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유린하려 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대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 것이네.’

  
죽음을 앞두고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간 소크라테스, 그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책장의 그리스 고전들 옆에 소크라테스의 상(像)이라도 하나 사다 모셔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모나스트라키 시장의 기념품점들을 뒤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상을 보니, 너무 못생겼다. 대머리에 뭉툭한 코, 험상궂은 얼굴…. 흉상, 좌상, 전신상… 어느 걸 봐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결국 소크라테스상 사는 것을 포기했다. 
  
  
프닉스 언덕
 
‘소크라테스의 감옥’으로 알려진 용도를 알 수 없는 동굴. 실제 감옥은 이곳에서 15분쯤 떨어진 곳에 있다.
아고라가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던 곳이라면, 정치활동의 공간이던 곳은 민회(民會)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이다. 아고라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처음에는 ‘굳이 가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호텔에 비치된 관광지 안내 카드에서 프닉스 언덕을 ‘세계 최초의 의회(the first parliament of the world)’라고 설명한 문구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프닉스 언덕 일대는 잘 가꾸어진 공원이다. 나 자신도 ‘굳이 가볼 필요가 있을까’라며 우선순위에서 제쳐놓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크로폴리스나 아고라 등에 비하면 찾는 이들이 적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으로 알려진 작은 동굴도 이곳에 있다. 앞에 쇠창살까지 쳐진 것이 정말 감옥 같다. 하지만 그 쇠창살은 문화재 보호용으로 후세에 쳐놓은 것이다. 목욕탕이라고도 하는데 용도는 정확지 않다.
 
아테네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 언덕. 5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필리파포스 언덕에 올랐다. 로마의 아테네 총독이던 필리파포스의 무덤이 있는 언덕이다. 이 언덕에서 보면 아크로폴리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한참 동안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다가 언덕을 내려와 프닉스로 향했다.
  
5000~1만3000명이 모일 수 있었다고 하는 이 바위 언덕은 한산했다. 한 사내가 고대 아테네 시절에는 연단으로 쓰였던 바위 위에 올라 참선(參禪)을 하고 있었다. 어느 장년의 여성은 세상의 고민을 다 끌어안은 듯한 얼굴을 하고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도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네 니케 신전, 프로필라이아 문, 파르테논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민주주의의 明暗
  
가슴이 뻐근했다. 여기가 ‘국민이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현장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법 앞의 평등이 어느 면에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밝혀졌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이 참주들의 지배를 받은 동안에는 전쟁에서 어떤 나라도 능가할 수 없었지만, 참주들에게서 벗어나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戰士)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압제하에서는 주인을 위해 일하기에 일부러 게으름을 부린 반면 자유민이 된 지금은 각자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놓고 슬기로운 결정을 여러 번 내렸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 남부 라우리온에서 은광(銀鑛)이 발견되었을 때, 아테네 시민들은 그 이익을 10드라크마씩 ‘배당금’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민회에서 시민들은 눈앞의 이익을 나누어 갖는 대신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200척의 3단 노선을 건조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찬성했다. 이 결정이 3년 후 아테네, 아니 그리스 문명을 구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가 침공해왔을 때, 결사항전(決死抗戰)을 결의한 것도 이 프닉스 민회에서였다. 결국 아테네군은 마라톤에서 단독으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때에도 프닉스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은 ‘물과 흙’(항복의 상징)을 바치는 대신, 전 주민을 살라미스 섬과 인근 도시로 소개하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다.
  
자유를 위한 이런 용기 있는 결정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한 세대 넘게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고, 민주주의라는 위대한 유산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양지(陽地)가 있으면 음지(陰地)도 있는 법이다. 민주주의와 거의 동시에 포퓰리즘이 생겨난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도편추방을 당했다.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에는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급급해하는 알키비아데스나 크레온 같은 포퓰리스트에게 권력을 주어 시켈리아 원정 같은 무리한 대외 강경정책을 추진하다가 패망(敗亡)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아! 데모스 크라티아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어 민중(demos)과 통치(kratia)의 합성어이다. ‘민중에 의한 통치 체제’쯤이 되겠다.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인들은 ‘데모스 크라티아’를 물신화(物神化)했는데, 데모스크라티아는 여성이었다. “운명은 여성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성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살짝 빌린다면, “민주주의가 폭력과 유혹에 그렇게 약한 것도 데모크라티아가 여성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리스는 포퓰리즘으로 골병이 들어 있다. 해마다 교통요금이나 관광지 입장료가 오르는 것도, 부가가치세율이 24%나 되는 것도 구멍 난 나라 재정을 메꾸기 위해서다.
  
그러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늙은이나, 시내 중심부의 폐점한 건물 입구에서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는 노숙자를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궁기(窮氣)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들은 “그리스인들은 낙천적”이라고 했다.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그리스는 나라는 가난하지만 백성들은 돈이 많다” “그리스는 이렇다 할 산업은 없지만 관광과 해운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나라다”라고 했다. 오히려 그들은 조국을 걱정했다. “그런 대통령을 뽑아놓았으니…”라고 탄식하면서….
  
  
살라미나의 병사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구상하기 시작, 19세기 말에 완성된 코린토스 운하.
수에즈 운하·파마나 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로 꼽힌다.
코린토스 운하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차창 밖으로 살라미스 앞바다를 봤다. 가슴이 뭉클했다. 이번 여행에서 꼭 보고 싶었던 곳 가운데 하나가 살라미스 섬과 바다였다.
  
도마뱀처럼 생긴 큰 섬 살라미스. 이 앞 해협에서 아테네 함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동맹군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의 함대를 격파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스튜어트 등은 《자유의 역사》에서 이 싸움을 인류의 자유를 지켜낸 7가지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문득 스페인의 소설가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소설 《살라미나의 병사들》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이라는 제목은, 20세기 전체주의 체제와 맞서 싸웠던 이름 없는 영웅들을 살라미스 바다에서 페르시아 침략군과 맞서 싸웠던 무명의 병사들에 비유한 데서 나온 것이다. 세르카스는 말한다. “결국 문명을 구한 것은 항상 소수의 전사들이었다”고…. 살라미스 바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우리 조국도 ‘살라미나의 병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등록일 : 2019-07-10 00:44   |  수정일 : 2019-07-0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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