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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머금은 기다림 끝, 다시 피어난 ‘음악의 신’

데뷔 20주년 가수 박효신

글 | 송혜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2019-06-26 09:39

① 예매창만 열어놓고 다른 인터넷 창은 모두 닫아놓는다.
② 미리 로그인은 필수.
③ 0.1초까지 표시되는 ‘네이버 시계’나 ‘인터파크 시계’를 띄워놓는 것도 잊지 말 것.
④ 충분한 준비운동으로 손목을 미리 풀어둔다.
⑤ 빛의 속도로 ‘광(光)클릭’을 시작한다.

6월 29일에서 7월 13일까지 열리는 박효신의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포스터.
가수 박효신의 콘서트 티켓을 얻기 위한 이른바 ‘피케팅’을 시작할 때 알아야 할 다섯 가지 법칙이다. 피케팅은 ‘피 튀기는 티케팅’이라는 뜻. 그만큼 표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박효신은 이 피케팅의 시작이자 마지막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국내 가수 중 가장 뜨거운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인물이어서다.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박효신 LIVE 2019 LOVERS : where is your love?〉가 6월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다. 이번 피케팅은 역대급이다. 4월 오픈한 1차 예매 티켓 4만 5000석 역시 온라인 예매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팔려 나갔다. 소속사 글러브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이날 60만 명 이상이 한꺼번에 ‘클릭’을 시도하는 바람에 온라인 예매처 서버가 순식간에 마비됐다. 뒤늦게 서버가 다시 열렸을 땐 이미 모든 좌석이 증발해버린 뒤였다. 5월 2차 예매에서도 콘서트 좌석 4만 5000석은 온라인 예매 시작 몇 분 만에 모두 팔렸다. 9만 석이 팔려 나가는 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피케팅’의 원조, 시작은 시련이었다

© 조선DB
박효신을 처음 만난 건 2009년 10월 서울 광화문에서였다. 당시 그는 데뷔 10년을 맞았고, 이전 소속사와 긴 분쟁을 정리하고 2년 반 만에 새 노래 ‘사랑한 후에’를 들고 나온 상태였다. 홍역을 길게 치른 듯 살이 내리고 몸 마디마디가 가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10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1999년 ‘해줄 수 없는 일’로 데뷔, ‘동경’ ‘바보’ ‘좋은 사람’ ‘눈의 꽃’ 등을 히트시킨 그였지만 연예계 생활은 혹독했다.

처음부터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유난히 말 없고 내성적이던 그는 탈출을 꿈꿨다. 부모의 이혼 이후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열일곱 살부터였다. 노래로 애써 현실을 잊으려 했다. 그를 가요제에 내보낸 건 친구들이었다. 각종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오디션까지 통과하면서 소속사와 첫 계약을 맺고 데뷔 앨범까지 냈다. 당시 인터뷰에서 박효신은 “처음 데뷔 앨범이 나왔을 땐 믿어지지 않아 여러 번 눈을 비볐다”고 했다.

달콤했던 데뷔의 행복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인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첫 앨범을 내준 소속사는 금세 문을 닫았고, 다시 들어간 또 다른 소속사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계속하더니 급기야 수천만 원의 빚을 갚지 않으면 계약을 종료할 수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헤어지고 혼자 회사를 차렸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예전 소속사가 그에게 언질도 없이 베스트 앨범과 라이브 앨범을 내놓는 바람에 긴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박효신은 “행복했던 기억보단 아팠던 기억이 사실 더 많다”고 했다.

“내가 너무 뭘 모르고 덤벼서 이렇게 됐구나.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정말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 참 많이 했어요. 너무 지친 나머지 음악을 아예 안 듣고 산 적도 있었고요.”


음악을 그만두는 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다신 가수를 하지 않겠단 생각으로 음악을 피해 다녔지만, 갑갑한 마음에 무작정 차를 몰고 거리를 나섰던 어느 날 갑자기 미치도록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차에서 CD 하나를 찾아냈어요. 틀어놓고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정말 바보처럼 숨도 못 쉬고 울었죠.”

군 입대를 한 후에도 또 다른 폭풍우에 휘말려야 했다. 예전 소속사가 또다시 전속 계약을 위반했다며 3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12년 9월 대법원은 15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박효신은 결국 일반 회생 신청을 했다. 군 생활 초반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 날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 써내려간 노래가 2014년 전역 직후 발표한 ‘야생화’다. 군 생활은 뜻밖에도 그에게 약이 됐다. 2년 동안 국방부 홍보지원대에서 300회쯤 공연하는 동안 상처엔 딱지가 내려앉고, 다시 무대에 오를 힘을 얻었다. 전역 후 콘서트 〈War Is Over〉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이틀간 가졌다. 뮤지컬 〈엘리자벳〉도 시작했다. 다시 일어선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 끝에 얻은 ‘Happy together’

© 뉴시스
다시 무대에 오른 박효신은 더는 서툰 세상에서 헤매던 열여덟 살 소년이 아니었다. 감정을 쥐어짜듯 휘몰아치던 ‘소몰이 창법’부터 버렸다. 감정이란 체온처럼 전이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들숨과 날숨만으로 여백을 움직이는 법을 터득했고, 목 놓아 먼저 울며 관객을 뜨겁게 들었다 놓았다 하는 대신 빈 의자 위에서 관객이 그와 같은 호흡으로 감응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게 됐다.

군 생활 중 만든 ‘야생화’는 이런 그의 변화를 가장 기민하게 담아낸 노래다. 가사의 내용 일부는 이렇다.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

2015년 공연에서 박효신은 “이 노래 가사를 군대 화장실에서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나처럼 살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을 만져줄 수 있는 가사를 써보려고 했는데 며칠 동안 집중을 해도 가사가 안 써졌다. 그렇게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1절 가사가 술술 나왔고 다 쓰고 혼자 한참을 또 펑펑 울었다”고 했다.

© 글러브엔터테인먼트
‘야생화’ 가사는 박효신의 내밀한 고백에 가깝다. 서툴게 세상에 나왔고 그만큼 쉽지 않은 시간을 견뎌야 했던 그는 줄곧 성장통보다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야 했다.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시기도 거쳤고, 누구에게도 진심을 털어놓을 수 없어 골방에 틀어박혔던 때도 있었다. 박효신의 노래는 그래서 때론 그늘을 골라 딛는 듯하고, 외마디 혼잣말 같기도 하다. 그 독백이 기묘하게도 외롭고 지친 또 다른 이들에게 위무와 평온을 준다.

2014년 발표한 노래 ‘Happy together’는 소년 박효신이 허물을 벗는 과정을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세상을 몰랐었던 마냥 웃기만 했던 푸른 하늘 닮은 꿈을 가진 키 작은 꼬마가 어느새 담을 넘는다 (중략) We belong together 혼자가 아냐 영원히 너를 위해 불러줄 이 멜로디 (중략) 지금 내 앞에 있는 내가 찾던 세상’

2016년 그가 직접 가사를 붙이고 발표한 노래 ‘숨’도 비슷하다.

‘오늘 같은 날 마른 줄 알았던 오래된 눈물이 흐르면 잠들지 않는 이 어린 가슴이 숨을 쉰다 고단했던 내 하루가 숨을 쉰다’

박효신이 비로소 심호흡을 하고 담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정상, 가수들의 가수로

© JTBC
시장의 역설이 빚어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효신이 애써 클라이맥스를 토해내지 않아도 그가 마이크를 쥐면 차트가 움직이고 티켓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역 후 발표한 ‘야생화’는 차트에 진입하자마자 1위를 차지했고, 그해 말 공연장엔 7만여 명이 들어찼다. 2016년 9월부터 발표된 정규 앨범 7집의 수록곡 ‘숨’ ‘I am A Dreamer’와 2018년 출시한 디지털 싱글 ‘겨울소리’도 모두 나오자마자 단숨에 1위에 올라섰다.

전역 직후부터 섰던 뮤지컬 무대도 어느덧 박효신이 장악하다시피 했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팬텀〉 등에서 전석 매진의 신화를 썼고, 2018년 〈웃는 남자〉에선 그윈플렌 역할을 맡아 공연 시작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1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박효신은 곧 ‘매진’의 동의어고, ‘관객몰이’의 아이콘이다. 그냥 얻어진 건 아니었다. 단 한 소절을 불러도 몇 시간씩 발성 연습을 하는 치밀함, 하다못해 남의 결혼식에서 축가 한 곡을 부를 때도 리허설을 하고 나중에 그 노래를 녹음해 따로 모니터링을 하고 마는 징글징글한 완벽주의가 빚어낸 결과다. 가수 유희열은 2016년 10월 KBS 음악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박효신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6년 전 음악에 대한 꿈을 꾸던 한 소년이 이제 음악의 신이 돼 돌아왔다. 박효신과는 오랫동안 라디오 게스트로 호흡을 맞췄다. 그땐 어렸는데 (그가) 이렇게 컸다. 이제 박효신은 가수들 사이에서 ‘가수들의 가수’로 불린다.”

데뷔 20주년 공연 〈박효신 LIVE 2019 LOVERS : where is your love?〉를 앞두고 박효신은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무대 위에서 노래와 공연만으로 팬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게 소속사의 설명. 사실 박효신은 전역 후부턴 〈유희열의 스케치북〉처럼 노래를 할 수 있는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TV 출연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 콘서트 이외의 시간은 노래 연습에만 쓰고, 거의 매일을 음악 작업을 하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언론 인터뷰도 가급적 거절해왔다. 신비주의를 지키려는 몸짓처럼만 보이진 않는다. 이건 어쩌면 그가 방황 끝에 찾아낸 ‘자신의 자리’를 계속 기억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2009년 인터뷰 당시 박효신의 말을 떠올려본다.

“요즘엔 베어 무는 순간 혀를 자극하는 음식 같은 노래들도 참 많잖아요. 저만큼은 다른 노래를 하고 싶어요. 다시 나오면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들 그러더라고요. ‘네 자리는 따로 있다’고요. 잊기 힘든 조언이었어요. 힘들게 찾은 제 자리를 이젠 잊고 싶지 않아요. 기억할 거예요, 제 자리를.”

20년을 건너온 박효신은 이제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설 곳은 결국 마이크 앞이고 건반 앞이라는 것을. 팬들로 꽉 찬 공연장이고, 조명이 켜진 무대 위라는 것을. 그 위에서만 그는 비로소 하고픈 이야기를 모두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박효신의 라이브는 그래서 검(劍)이고 활이다. 탁성과 연한 소리를 섞어가며 길게 호흡하고 유연하게 소리를 낸다. 눈물을 닦으며 건너온 자리, 환호와 함성이 가득한 공연장 무대, 박효신은 이제 그곳에 서 있다.
등록일 : 2019-06-26 09:39   |  수정일 : 2019-06-2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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